이재현
문화 평론가로 모든 중요한 세상사에 끼어들려 한다. 운전 면허, 신용 카드,TV가 없다.

 


 

인지 심리학 혹은 인지 신경 과학에서 거론하는 재미있는 착시 현상 중에 ‘대처 착시’라는 게 있다. 이 착시 이미지에서, 웃고 있는 듯한 얼굴로 보이는 위아래가 거꾸로 된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사진을 바로 돌려놓고 보면, 섬뜩할 정도로 무섭고 기괴한 대처의 얼굴이 나타난다.

대처 착시( atcher illusion)는 영국의 심리학자 피터 톰슨이 1980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알려졌다. 인간은 사람의 얼굴을 식별해 내는 시각과 지각 모듈이 각별히 발전해 있기는 하지만, 이 모듈에서는 얼굴을 구성하는 이목구비와 같은 요소들이 먼저 하나씩 지각된 다음에 얼굴 전체가 합쳐져 인지되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얼굴이 전체로 인지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얼굴의 위아래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경우, 바로 되어 있는 경우보다 얼굴의 구성 요소들을 하나씩 인지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80년은 1970년대 말의 영국 탄광 노조의 장기간 파업 투쟁이 대처리즘의 강경 노선을 만나서 패배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피터 톰슨의 정치 성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대처가 당시 영국에서는 제일 힘이 세고 유명한 정치인이었기에 톰슨이 대처의 사진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포토샵이 없었으므로 톰슨은 자기가 살던 지역의 보수당 사무실에서 선거용 포스터를 얻어 와서 자기 집 마루에서 면도칼로 대처 사진을 잘라 붙였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롤 모델이 대처였다고 하니, 대처 착시를 ‘근혜 착시’로 받아들여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번 총선 국면에, 나는 몇 가지 근혜 착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유승민의 탈당 및 무소속 입후보 사건과 이와 연관된 김무성의 소위 ‘옥새 파동’이다. 유승민은 새누리당 안에서 상대적으로 합리적 보수를 대변하는 인물로 부상해 왔다. 그건 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 운운하면서 유승민을 내쳤고 새누리당에서 막바지까지 유승민의
공천을 질질 끌어서 벌어진 효과다. 유승민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고 사드 배치를 노골적이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다. 미국 유학파고 그런 만큼 친미적이기도 하다.
그가 진정한 합리적 민주주의자라면 <국가보안법>과, <테러방지법>이라 이름 붙은 국정원 권한 강화법에 반대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유승민은 당선되면 새누리당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새누리당의 ‘진박’ 세력이 유승민과 그 동조 출마자들에게 박대통령의 ‘존영(!)’을 돌려 달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웃긴 일이다.

박근혜 대 유승민의 싸움 내지 대결은 제도권 신문의

지속적인 뉴스가 될지언정 현실적 실체를 지닌 정치 투쟁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 대표의 도장을 ‘옥새’라고 표현하는 신문들도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런 발상이라면 ‘존영’이라는 말도 매우 무례한 게 된다. ‘어진(御眞)’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착시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요구다. 이번에 소위 재야 원로들은 단일화와 관련해서 국민의당 및 안철수 대표를 비판 또는 비난했다. 물론,
안철수 대표가 과도하게 단일화 반대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정책적으로 밀고 나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안철수 대표의 입장에서 보면 단일화라는 것이 실제로는 더민주당으로의 단일화 내지 문재인 전 대표로의 단일화를 뜻하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다.

단일화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더민주당이 애초부터 단일화를 전략적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총력을 집중했어야 옳다. 소위 재야 원로들도 일찍부터 목숨을 내걸고 단일화를 성취했어야 했다. 또 안철수보다는 문재인이나 김종인을 더 매섭게 꾸짖고 몰아붙였어야 옳다.

1987년 이래 선거에서의 단일화라는 것은 결국 부르주아적 요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김대중으로의 단일화라든가 김영삼으로의 단일화, 혹은 문재인으로의 단일화라든가 안철수로의 단일화에 불과하다. 단지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나는 배부르지 않다. 소위 ‘더’민주당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자기비판이나 반성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권에 반대하는 ‘반박’ 단일화는 일종의 정치적 착시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가 없다. 비례 대표의 경우, 노동당이나 녹색당을 찍자니 결국 사표가 될 내 표가 아깝고, 그렇다고 해서 정의당을 찍자니 정치적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

요즘 제일 짜증 나는 것은 ‘피 말리는 접전’ 운운하는 기사다. 차라리 구글 코리아가 ‘인공지능당’을 만들어서 이번 선거에 인공지능 로봇들을 국회의원 후보로 내보냈더라면 나는 기꺼이 기계들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워커스 4호 (20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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