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술은 ‘벗’이 될 수 있을까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신나리 기자

 

세기의 대결’이라는 수식이 대한민국을 뒤덮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두고 미디어는 인간과 기술의 대결이라며 견줬다. 이세돌 9단의 승리에 인간의 승리라며 환호하고, 알파고가 4승에 성공하자 사람을 대체하는 인공 지능의 위협을 경고했다. 인공 지능 시대를 대비해 윤리적인 문제를 예상한 국제 협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요란을 떨기도 했다. 인공 지능이 쫓아올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인간과 기술, 이 둘은 서로를 위협하는 존재일까. 누군가의 한판승으로 정리될 문제일까. 지배가 아닌 공존, 기술과 인간이 함께 살아갈 방법은 없는지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에게 물었다.

 

“사람과 공생하는 기술이 있을 뿐”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세돌의 승리와 패배가 인간의 승리와 패배일까

인간과 알파고가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이 집대성한 기술과 인간의 직관이 격돌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알파고는 사실상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이다. 대등 관계로 보거나 적대 관계로 보는 것은 우스운 것이다. 한쪽은 기술을 손에 쥔 인간이고 다른 쪽은 직관을 가진 인간인 셈이다. 문제는 알파고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그게 인공 지능이든 고도의 알고리즘 기술에 기반을 둔 것이든 기업에서 유지되는 방식의 기술이다. 그게 소위 현재 자본주의의 가상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 기술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게임에 응하는 방식을 두고 여러 가지 해프닝이 벌어졌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기업을 브랜딩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반대로 기술을 긍정하는 이들은 알파고를 최적화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세돌을 버그 픽서(버그를 수정하는 프로그램)와 같은 존재로 본다. 일회용 인간 같은 느낌 말이다. 알파고는 대국을 치를수록 완전체로 간다. 이런 방식의 해석은 알파고의 존재론을 무시한 기술 지향적 해석이다.

인공 지능(기술)과 인간의 대국이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세돌 9단이 1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패배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1승을 올렸다. 물론 다섯 번의 대국이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대표성을 갖지는 못한다. 일종의 이벤트에 불과하다. 또한 한 기업의 기술 수준을 인류 전체의 기술 수준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없다. 기술(알파고)은 인간을 버그로 취급해 볼 수 있지만 인간은 버그라기보다 고유의 능력, 기술이 행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기술은 인간이 추론하는 방식으로 유사하게 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감성과 사랑같이 연동되기도 하고 우정과 호혜 등이 피어오르는 비예측적 사고가 함께 작동한다. 그것이 비규칙성이나 우발성을 만들어 낸다. 인간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이세돌 9단의 1승도 그렇게 나왔다고 본다. 이는 기술(알파고)이 예측하지 못한 수다. 논리적인 상황에서 나올 수 없는 상황일 때 기계는 적절히 반응하지 못한다. 기술의 생각이라는 건 기계적인 알고리즘이 누적되고 학습되어서 누적적으로 작용하면서 이에 의거해 판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인간은 비예측적 사고들이 결합된 존재다. 1승에 많은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아니어도 그런 부분은 되짚어 볼 만하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 기술이 계속 고도화되더라도 여분의 1%의 문제점, 오류나 버그가 언제든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이는 인간에게 위기가 될 수 있다. 기술이 적용되는 사안이 클 때에는 엄청난 위기가 된다. 완전체로 믿었던 것에 작은 틈이 생기면, 전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공 지능을 비롯한 기술은 결국 인간의 생각과 욕망, 지식이 집약된 하나의 작품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다

대체로 기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기술의 오류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실 완벽한 기술은 이론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술은 만든 사람의 의도가 반영되지 기술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을 만들 때에도 사회 문화적 논리가 있고 쓸 때도 그런 기능이 들어가 있다. 기술에 돌발 변수도 굉장히 많다. 기술은 갇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이폰 하나만 봐도 그렇다. 하드웨어에 전 세계 노동자들의 노동이 포함돼 있다. 부품은 아프리카의 천연자원을 사용하고 여기에 중국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노동이 들어간다. 액정은 삼성에서 저임금 노동자를 이용해 만들어 낸다. 소프트웨어 역시 다양한 특허로 구성돼 있다. 아이폰 자체는 완전체이지만 딸려 있는 기술적 총합과 네트워크는 어마어마하다. 인간의 죽음, 피와 땀으로 얼룩진 희생과 저임금 노동이 다 들어 있다.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역학 관계가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져 보면 아이폰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 즉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돌발 변수들은 더 많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단순한 기술일수록 돌발 변수가 적다. 고도화된 기술 자체로만 보면 엄청난 기술의 축복처럼 보이지만 위험성도 있는 것이다. 검열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추악한 기술이 된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처럼 애플이 아이폰의 잠금 장치를 해제해(최근 애플은 아이폰의 잠금 장치 해제를 요구한 미 연방수사국(FBI)의 요구를 거부했다) 특정 기관에 의해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장악당하면 완전체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 기술의 완전성은 기술 그 자체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당대의 역사, 사회 문화적 조건, 그 사회의 성숙도와 맞물려 있다.
“공동체적 공생의 틀 속에서 과학 기술의 성장, 발전, 가치 개념 재규정해야”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기술과 정보 누적 속에서 발생하는 한국 특유의 사회 문화적 야만성에 대한 지적이 있는데

한국은 기술과 정보 수준에서 세련돼지기 시작했다. 전국적 물리망(도로, 철도 등)은 물론이고 휴대 전화와 인터넷망으로 연결해 사회적 관계망을 극도로 동시화하면서 일상의 스마트한 속도감을 증진시켰다. 오래 전부터 정부가 지향해 온 것이 인터넷 인프라 구축이다. 정부 주도하에 기술을 장려한 톱-다운 방식으로 기술 성장을 이끌어 온 것이다. 그 결과 주요 통신사 몇 개가 휴대 전화 단말기뿐만 아니라 휴대 전화 요금제도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 삼성이나 엘지는 휴대 전화 교체 주기를 빠르게 만들었고 소비자의 구매 욕망을 키웠다. 우리는 저항을 못 하고 신제품이 나오면 휴대 전화를 재빠르게 바꾼다. 지하철에서 전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에 집중한다. 일정 부분 위(통치 권력)에서 만든 질서에 사람들이 길들여지는 상황인 셈이다. 물리적인 조건에 있어서는 특정의 기술이 한국 사회를 만들어 왔다. 동시에 속도감에 따른 극도의 피로감이 증가했다. 그 피로감으로 인해 사회적 타자로의 실제 관심과 참여보다는 ‘클릭주의’(‘좋아요’나 ‘리트윗’ 등)나 끼리끼리 수다 떠는 온라인 ‘소(小)’사회로 빠져들기도 한다. 게다가 정치적 ‘신’권위주의 국면이 기술·정보와 맞물리면서 기술이 통치를 매개하는 촉수이자 연장이 되는 경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사회에 만연한 CCTV 감시나 도감청은 물론이고, 유전 정보 수집, 딥 패킷 감청(DPI), 일상 데이터 정보 사찰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과학 기술을 과용하거나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그것과 공존하며 사용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과 태도를 취해야 할까

적정 기술, 메이커 문화, 탈성장(de-growth), 회복력(resilience) 등 공존과 공동의 호혜적 기술 논리가 공존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과학 기술의 성장주의와 발전론이나 시장 가치화는 인류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공동체적 공생의 틀을 세워 기존의 과학 기술의 성장, 발전, 가치 개념을 그 속에서 재규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제주의 성장이 아닌 지속 가능한 성장을 말해야 한다. 공동체가 필요한 성장을 하고, 성장이 더디게 가더라도 모든 사람이 이로울 수 있는 파이를 키우는 성장 방식이다. 커뮤니티가 같이 사는 방식을 택하는 것과 같다. 공통의 것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회복력이 계속해서 재생산할 수 있는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공동의 호혜적 기술 논리다. 외곽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시민 사회 진영, 예술가, 실천가, 활동가, 대안적 매체들이 이러한 호혜적 기술 사례들을 자주 알려 주는 것이다. 대안 기술과 적정한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국가 주도하에 이뤄지는 기업의 약탈적 시장에서의 기술이 아니다. 기업이 만드는 기술은 쓰기만 하는, 소비되는 기술이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변형시키고, 읽을 수 있고, 커뮤니티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기술을 대안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공동체 적정 기술의 논리라는 것이 있다. 가난한 나라의 처지에서 고급 기술을 수입할 수 없지 않나. 기술이 떨어지더라도 자기 수준에 맞는 기술을 응용해서 사용해야 한다. 국가별 수준이라는 게 다르다. 아프리카에서는 새로운 원료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널려 있는 동물 똥을 모아 연료로 쓸 수 있다. 동력화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적정 기술의 초창기 모델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대로 손에 감각을 찾는 문명의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갈수록 사람들을 소비하는 주체로만 요구한다. 개인이 갱신하고 변형시키고 자기화하는 것을 막고 소외시킨다. 기술로부터 소외되며 소비만 하는 주체로 만든다. 창의력이 대기업으로 흡수되면 이윤으로 가지만 커뮤니티로 가면 자본주의에 위협이 될 것이다. 시장 질서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커뮤니티 안에서 물건을 만들고 기술을 만들고 운영하고 시스템을 돌리면 자본주의에 타격을 준다. 지금은 국가가 창조 경제를 외치며 창조성 자체를 기업 정책으로 산업 정책, 문화 산업에서 흡수한다. 산업적 흡수를 하는 것이다. 기업은 이익을 가져가고 국가는 위에서 땡기고 스타트업으로 성장하고 이용될 것이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창조성은 정부나 기업의 논리, 정책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생성의 논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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