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월호 유가족 박혜영 씨 / 신나리 기자 / 사진 정운


윤민은 갈비를 좋아했다. 상추에 밥을 놓고 갈비를 얹어 먹었다. 집 앞에 있는 학교보다 교복이 예쁘고 자율 학습이 없는 단원고를 1지망으로 써냈다. 다섯 시 반이면 집에 와 엄마와 장을 보고 함께 저녁 먹는 걸 좋아했던 윤민.

윤민의 엄마는 겁이 많았다. 딸 셋을 키우며 안전에 또 안전을 강조했다. 밤 10시를 통금 시간으로 둘 정도였다. 외박은 꿈도 못 꾸게 하고 친구들끼리 여행도 안 보내며 딸 셋을 길렀다. 딸들의 안전을 위해서. 2014년 4월 16일 이후, 엄마는 ‘안전’을 놔 버렸다. 내가 엄격하게 지킨다고, 나만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딸아이의 안전을 지키려 했던 엄마는 이제 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그 시작에 세월호가 있다.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묻고 따지는 사람. 단원고 2학년 3반 최윤민의 엄마, 박혜영 씨를 만났다.

며칠 전 합창 공연을 하셨다고 들었다. 어떤 공연인가

성남시청에서 백기완 선생이 ‘돌아올 땐 쪽빛으로’라고 세월호 2주기 특별 강연을 하셨다. 4.16 가족 합창단이 그 무대에 섰다. 노래만 하는 건 아니고 노래하고 3~4분 발언하는 시간도 있었다. 노래와 이야기가 섞인 무대가 가슴으로 울리는 효과가 있더라. 그래서 되도록 부르는 곳은 다 찾아다니며 서고 있다. 4월에만 잡혀 있는 스케줄이 열 개다. 무대마다 곡이 달라 연습을 꾸준히 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이면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꼬박꼬박 연습하고 있다.

합창단은 어떻게 꾸려지게 됐나

작년 여름에 어느 시민 단체 활동을 하시는 분이 시민과 유가족이 함께 〈네버 엔딩 스토리〉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하셨다. 촬영하고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의도는 일회성이었는데 파급 효과가 좋았다. 그걸 본 사람들이 공연을 부탁하기도 해서 그 이후로 꾸준하게 연습하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끼리만 하는 건 아니고 ‘평화의 나무 합창단’에서 많은 도움을 준다. 노래 지도도 해 주고 같이 무대에도 서 준다. 그분들이 안 계시면 우리끼리는 못 했을 일이다. 평화의 나무 합창단 분들도 다들 직장이 있고 가족이 있는 분들인데, 월요일 저녁이면 서울에서, 일산에서 안산으로 다 모인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요즘 스케줄이 많으시던데, 건강은 괜찮으신가

두통이 심하다. 일요일에 합창 공연이 끝나고 집에 왔더니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 부슬비가 내리는데 플래시몹 준비를 하느라고 얇은 옷을 입고 바깥에 서 있어서 그런지 두통이 심했다. 약을 먹고 누웠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한 시간 정도 있다 다시 약을 하나 더 먹었다. 그래도 똑같았다. 결국 한 알을 더 먹었다. 집에 들어가면 늘 아픈 것 같다. 약을 두 번 세 번 먹는 것도 그 다음 날 할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활동을 해야 하니까. 앓아누울 시간이 없다. 유가족들 중에 안 아픈 사람이 없다. 우리는 아프면 안 되니까 순간순간 조절하면서 버티고 있다. 유가족들이 제일 안 좋은 부분이 잇몸이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잇몸이 다 내려앉아 임플란트를 하고 있다. 어느 엄마는 일곱 개, 어느 엄마는 열 개 이런 식이다. 나도 세 개를 했다. 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가방이 큰 이유가 있다. 약을 챙겨 넣고 다니니까.

“2학년 3반 윤민을 기억해 줬으면”

조금 전에 분향소에 들러 윤민에게 인사하고 왔다. 참 예쁘더라

사실 윤민이 나이대가 예쁠 때가 아니다. 이마에 오돌도돌 여드름도 나고. 윤민이도 그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나 보더라.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앞머리가 눈썹 위까지 와서 이마를 덮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면 여드름이 더 나니까 앞머리를 길러서 옆으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2학년 때 사진에는 이마가 보이는 머리를 하고 있다. 이쁜 거 좋아하고 신경 쓸 나이였다. 윤민이는 아직도 그냥 아기 같다. 윤민이가 나이는 열여덟 살이지만 키가 16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38킬로그램이었다. 가족이 다 말랐는데 윤민이는 특히 더 말랐다. 게다가 막내라 마냥 아기 같았다. 하늘하늘하고 막내고 엄마만 쫓아다니는 그런 아기. 내 기억 속의 윤민이는 중학생 정도다. 성격도 그렇다. 윤민이 떠나고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친구들이 윤민이는 보호해 줘야 할 동생 같았다고 하더라. 친구 무릎 위에 앉고 막 그런 아이. 애가 성숙한 타입은 아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어느 정도 하고 말썽도 안 피우고 눈에 안 띄는, 어떻게 보면 존재감 없는 아이였는데, 윤민이도 그랬다. 사고가 나고 가장 속상했던 것도 그거다. 음악이나 미술 쪽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그 꿈을 실현시켜 준다고 하면서 한 번이라도 더 이름이 나오고 사람들이 기억하는데, 우리 윤민이는 그런 게 없었다. 별 특징이 없는 아이는 별로 안 알아 주는 것이다. 어느 부모든 제 자식이 제일 중요한데, 사람들이 아무도 윤민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게 어느 순간 서운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인터뷰도 하고 기자 회견도 하면서 “2학년 3반 최윤민 엄마입니다” 하고 알리게 됐다. 내 이름이 나오면 윤민이 이름도 같이 나오니까. 유가족 활동을 하는 것이 물론 내 아이의 일이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뛰쳐나온 게 맞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 윤민이를 기억해 줬으면, 알아 줬으면 해서 열심히 활동하는 것도 있다.

윤민에게 언니가 둘 있더라. 첫째 언니는 페이스북에 일기 쓰듯 동생의 이야기를 꾸준히 올리고 있고. 지난 주말에 윤민과 제주도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올렸더라

그게 우리 가족이 윤민이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윤민이에 대해 편하게 얘기한다. 어느 가족들은 가족끼리 아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 방식이 다른데, 우리는 윤민이 얘기를 스스럼없이 많이 한다. 집에 가면 텔레비전 아래 장식장이 있는데, 거기에만 가족 사진이 40장 넘게 있다. 그리고 윤민이가 양말을 좋아하고 매니큐어도 좋아했다. 가족들이 지금도 지나가다 예쁜 양말, 새로운 색상의 매니큐어가 나오면 꼭 사서 윤민이 사진 앞에 둔다. 마치 제단처럼. ‘윤민아, 엄마 매니큐어 좀 바를게’ 하고 살짝 바르고 다시 윤민이 앞에 갖다 두기도 하고. 첫째인 윤아가 동생을 기억하는 방식도 그런 거다. 첫째 아이가 영화를 보거나 이번에 제주도 여행을 갈 때에도 윤민이 학생증을 목에 걸고 다녀왔다. 윤민이랑 같이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갔다 온 것이다. 윤민이가 막내이고 위로 언니가 스물일곱, 스물다섯 살이니까 아무래도 유가족 형제자매 중에 우리 아이들이 나이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윤아가 희생자 아이들의 형제자매를 모으는 역할도 했다. 지금도 어디 가서 발언을 많이 하는 편이고. 그게 윤아가 윤민이를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가리고 숨어서 하는 진실, 믿을 수 있겠는가”

1년 전, 갈 길이 멀다고 하셨다. 열심히 해 왔는데 나라가 바뀌지 않았다고. 지금은 달라졌다고 할 수 있나

상황은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처음에 세월호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 주셨는데 갈수록 잊혀 간다. 점점 약해지고 있다. 지금은 뭐라고 해도 무시당하고 “유가족이 별거야”, “그만 좀 해” 한다. 가방에 리본 달고 다니면 “언제까지 달래, 그만 좀 떼지” 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내 가방에 내가 달고 다니는데 그만 좀 하라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겠지.

변한 게 없어 할 일이 많다. 올해 특히 그렇다. 일단 청문회를 한 번 더 하고 싶다. 3차 청문회를 국회에서 생방송으로 하고 싶다 요청했지만 국회에서 내 주지 않았다. 생방송도 지상파에서는 다뤄 주지 않았다. 2차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졌다.

일반 국민이 청문회를 이틀 동안 지켜봤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그런지 생중계를 안 해 준다. 그래서 우리끼리 본다. 일반 국민은 모른다. 3차 때는 국회에서 안 해도 좋으니까 생중계는 좀 해 줬으면 한다. 또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활동 기간이 6월 말로 끝난다. 그런데 배(세월호)는 7월 말에 인양된다. 특조위가 배를 조사하고 활동을 마쳐야 하는데 시간을 안 준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배를 조사 안 하고 세월호 조사를 했다고 할 수 있나.

정부는 작년 1월 1일에 특조위가 출범했다고 특조위 활동 기간이 6월 말까지라고 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위원장 등 상임 위원들이 임명장도 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들이 임명장을 받은 것은 지난해 3월이었고, 직원이 모두 출근한 날은 지난해 7월 27일이다. 결국 특조위가 일한 기간은 몇 달 안 된다. 6월 30일로 끝나는 게 말이 되나. 이걸 바꾸려면 시행령을 개정해야 한다. 시행령이 특조위보다 위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활동 기간을 늘려야 한다. 적어도 배를 인양하고 3개월, 연말까지는 연장해야 한다. 그래야 배를 조사할 시간이 생기지 않나. 그리고 특검이 필요하다. 특별법을 만들 때 특검을 하기로 했는데 지금 국회에서 막고 있다. 왜 묵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두 가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시행령을 개정해 (특조위) 기간을 연장하고 특검을 요청해야 한다.

가족들은 세월호 인양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선체) 손상을 많이 시키며 인양하고 있다. 현재 상하이 세비지라는 회사가 인양하고 있는데, 이들이 과연 인양할 능력이 있는 회사인지 의문이 있다. 가족들에게 공문을 자주 보내는데 배에다 구멍을 10개, 20개 뚫는다고 한다. 지금 거의 50개 가까운 구멍을 뚫었다. 조그만 것부터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구멍까지 수십 개다. 부력제 때문에 구멍을 내야 한다고 하더라. 또 크레인 걸 자리 때문에 배를 절단하기도 했다. 결국 배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배가 올라왔을 때, 침몰 원인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남아 있을까, 그것도 의문이다. 대학에서 간담회를 했는데, 한 대학생이 질문하더라. “당신들이 말하는 세월호 진실이라는 게 너무 뜬구름 같다”고. “당신이 말하는 세월호 진실이 뭐냐”고 묻더라. 그래서 나는 조사하면 진실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지만, 이 사람들이 우리가 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배제하고 작업을 하는데, 인양 작업을 하는지 증거물 훼손 작업을 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진실은 주관적이라고 답했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만족할 수 있도록 나를 설득해야지.

일단 인양 과정에 유가족을 합류시켜야 한다. 지금 다 비밀주의다. 유가족이 배(인양선)에 못 올라오게 하고 서너 달에 한 번 시간을 주고 배만 보고 내려가라고 한다. 한 번에 유가족 다섯 명 정도가 갈 수 있다. 결국 그들이 보여 주는 것만 보고 온다. 우리가 원하는 건 모니터로 작업 과정을 보는 거다. 그러려면 거기에 상주를 시켜 줘야 하는데 그걸 못 하게 한다. 몇 달에 한 번 배 위에서 반나절 보고 가라는데 어떻게 진실을 파악하냐. 이 사람들이 인양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 줬으면 진실이 아니어도 믿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믿을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은 낮에 작업을 안 하고 밤에만 한다. 가족들이 망원경으로 지켜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한테 진실을 믿으라고? 외국에서는 유가족이 특검을 요구하면 몇 번이고 한다더라. 정부에서 이게 진실이다 보여 줬는데 유족이 한 번 더 해 달라 하면 또 특검을 한다더라. 유가족이 믿을 때까지 특검을 계속 한다더라. 우리가 억지를 피우는 게 아니다. 우리를 믿게끔 해 달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게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들이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진실을 들이밀 수도 있다. 그런데 다 감추고 조작하고 은폐하고 인양 과정도 꽁꽁 숨겨 놓고 하면, 그게 진실이래도 믿을 수 있겠나.

우리는 어떻게 세월호를 기억하고, 무엇에 희망을 두어야 할까

학생들이 어른들의 정책과 비겁함으로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 잘못 없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이게 나의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윤민이와 같은 시기를 보낸 고등학생들에게 희망을 둔다. 세월호 배지를 달고 팔찌를 하고 서명을 하는 사람 중에 고등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이 아이들은 자기들이 세월호에 탔을 수도 있다고, 자기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는 일로 생각하더라. 체감 온도가 다른 것이다.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투표권을 갖고, 나라에 힘을 미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 조금은 변하지 않겠나 싶다. 세월호를 겪은 동년배의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이 아이들이 끝까지 비겁한 어른이 되지 않게 하는 것,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워커스 5호. 2016.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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