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 흑표범을 듣다

인터뷰 하림 / 정리 신나리 기자 / 사진 정운 기자

 

흑표범

미디어 아티스트. 퍼포먼스부터 영상, 회화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하림은 흑표범이 부드럽게 굴러가면서 계속 무언가를 해 나간다며 ‘구르는 돌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하림

음악가이자 화가 그리고 기획자. 자기만의 음악색이 또렷해 보헤미안 뮤지션, 한국의 히피라는 호칭이 붙는다. 흑표범은 하림을 ‘안 웃기는 연예인’이라 칭했다.


한 남자가 가면을 쓰고 거리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던 여자는 그 음악에 끌렸다. 음악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춤을 췄다. 2000년대 초 하림과 흑표범은 길 위에서 만났다. 그날 이후, 둘은 서로를 이어 가고 있다.

하림(하)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흑표범(흑) 수영을 다닌다. 수영장에 가면 요즘 평영을 떼서 선생님이 깊은 물에 들어가라고 한다. 깊은 물은 발이 안 닿는데, 거기서 수영장 바닥을 보면 그 생각이 난다. 아이들 생각이. 그럼 겁이 확 난다. 발이 안 닿는데 겁을 먹으면 서두르게 되고 숨이 차면서 가라앉으려고 한다. 그때 로프를 잡고 있는데, 힘들다. 생각이 나서. (괜찮아지는 데) 오래 걸릴 거 같다.

최근 세월호 작업만 했을 텐데. 세월호 관련 첫 작업은 어떤 거였나.

‘4분 16초의 진심’이 시작이었다. 평범한 사람들, 세월호랑 관련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월호로 겪은 내상・외상을 얘기하자고 해서 시작했다. 그게 처음이다. 구술 아카이브 같은 작업이다. 각자 개인적인 삶에서 그 사건이 어떤 경험, 감각이었는지 서로 토로하는. 정신과 진료 같은 데 가면 각자의 어려움, 담배 끊는 얘기나 수영장 얘기 같은 걸 하지 않나. 같이 해소하고 자가 치유하는 느낌이었다. (4.16 참사 당시)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당시 장석준 작가가 우리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연락이 왔다. 작가들이 모여서 작가의 양심으로 작은 거라도 해 보자 해서 내가 도와줄게 했던 것이 여기까지 왔다.

그 이후 작업은?

세월호 참사 1주기 때 시작한 ‘이불 한 장’이다. 지금 2주기인데, 일 년 동안 이불을 사람들한테 빌려주는 프로젝트를 했다. 1주기 때 일베가 유가족 앞에서 치킨 먹고 그랬다. 이런 감정적인 혐오감을 조장하는 정치적 프레임 앞에서 아이들이 죽은 이야기가 희화화됐다. 세월호 얘기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라는 얘기가 나오는 분위기였다.

‘이불 한 장’ 프로젝트를 보면서, 옆에서 보기만 해도 바로 느낄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힘이 있는 프로젝트다.

흑 사실 이렇게 탄탄한 프로젝트가 될 줄 몰랐다. 작은 거라도 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1주기 때 4.16 기억 저장소에서 기억 전시관 기획 일을 도와주던 작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먼저 뛰어들어서 어머니들을 만나고 활동했다. 그 친구가 ‘4분 16초의 진심’을 했을 때 연락을 해 왔다. 기억 저장소에서 ‘아이들의 방’이라는 전시를 하려고 하는데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작했다. 그곳이 세월호 기록 수집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 이불들을 아카이브해 뒀더라. 이불이 엄청 많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자마자 이걸로 뭘 해야지 했다. 진도체육관에서 유가족들이 항상 바닥에 깔고 쓰고 있던 그 이불들.

그 사람들이 그 이불로 무엇을 했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1년 동안 열여덟 번 대여됐다. 각양각색의 도큐멘터를 보내 줬다. 천주교 신자인 어떤 분은 이불을 보고 기도를 떠올렸다고 한다. 한 달 동안 그 사람이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묻고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를 일일이 손으로 받아 적어서 기록을 모아서 돌려줬다. 누군가는 자기 집 안방에 깔아 놨다. 이분은 친구가 자살을 해서 죽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배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남편과 노래를 만들고 불러서 영상으로 보내 줬다. 이분에게는 세월호와 친구의 죽음이 개인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느껴졌나 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연극의 소품으로 사용했다. 무대 미술을 하고 있는 분이었는데, 연극이 실직한 아버지를 둔 청소년들 이야기였다. 청소년이 나와서 자기 아버지 역할을 하기도 하는 식이었는데, 아버지가 텔레비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다 실직하고 텔레비전만 보다 나중에 그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이다. 그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누워 있는 뒷모습이 나오는데, 우리 이불이랑 베개를 소품으로 썼다. 배우와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하더라. 어떤 친구들은 여섯 시간 동안 이불을 잡고 팽목항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온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퍼포먼스가 있다. 전남 도청 앞 분수대에서 온몸에 과녁을 그리고 퍼포먼스를 했다. 어떤 의미였나.

2011년에 한 ‘정오의 목욕’이다. 일종의 씻김굿 같은 거였다. 도청 앞 분수대가 삼단 원형으로 접시를 세 개 쌓아 놓은 것같이 되게 커서 묘하게 보였다. 당시 순환성, 존재의 유한함에 꽂혀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분수대를 보며 그게 떠올랐다. 미국 플로리다의 노인들만 사는 동네에 중산층 저택에 있는 수영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로마 시대 광장에 있는 공중 목욕탕 같기도 했다. 그때는 목욕탕이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광장이지 않았나. 도청 분수대는 5.18이라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던 곳이다. 정오에 애국가가 울리고 그걸 신호로 사람들을 총살한 곳.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까 정오에 여기서 사람들이 발가벗고 목욕하면 좋겠다 싶었다. 원래는 퍼포먼스 필름으로 만들려고 했다. 분수대 뒤로는 총알 자국을 메꿨지만 1980년대 느낌이 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는 2011년에 광주에서 핫한 동네가 자리하고 있다. 유흥적인 공간인데, 이 두 모습을 통해 시간이 순환하고 있다는 느낌을 필름에 담고 싶었다.

얘기하고 싶은 작업들이 있다면.

지금 제일 얘기하고 싶은 건 이번에 한 VEGA 퍼포먼스다. 그건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니까. 세월호 이야기다. 녹취를 바탕으로 한 퍼포먼스인데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열여덟 살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주로 이야기하는 아이들 나이가 열여덟 살이고. 그 나이는 어머니와 사춘기 딸, 아들과의 관계가 많다. 예진이는 수학여행 가기 전날에 늦게까지 잠을 안 잤다고 한다. 엄마는 그게 보기 싫었고. 빨리 자라고 했는데 결국 새벽 여섯 시까지 카톡을 했단다. 나중에 알게 된 게 그날이 담임선생님 생일이라 아이들끼리 그 준비를 한 거다. 어머니는 나중에 카톡을 보고 내 딸이 그래서 그날 늦게 잤구나 이해하고, 혼낸 걸 미안해하셨다. “엄마가 미안했어. 난 몰랐어. 담임선생님 생일인지” 말하고 싶지만, 그 말할 기회가 없는 거다. 나도 열여덟 살 때 엄마, 아빠 속을 썩였다. 부모님과 그 갈등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부모님과 소통하는 게 제일 어렵다. 그런데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특정한 어떤 사건이나 거시적인 것들보다 우리 엄마, 그리고 내 열여덟 살 때 미안했던 이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 자전적인 기억을 교직한 영상을 만들었다. 내가 열여덟 살 때 살던 화순에 가서 20년 만에 살던 집을 살펴봤다. 내 영상의 기록을 광주 사투리를 쓰는 남자 고등학생에게 부탁해서 학생의 목소리로 녹음했다.

아이들이 즐겨 가던 곳도 찾아갔다. 시찬이가 자전거를 타고 자주 가던 장소, 엄마랑 매일 가던 관산공원을 찾아가서 장소를 기록했다. 이런 것들을 다 영상으로 찍어 나의 기록과 섞는 작업을 했다. ‘공간 해방’에서 이 영상들을 아프리카 티비로 방송했다. 여기에는 꽉 차게 앉아서 건너편을 보고 나는 건너편 찻길 차고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체육관에서 덮고 있던 이불을 덮고 새까만 코트를 입고 앉아 있었다. 관객과 눈을 마주치면서 유가족의 모습을 대신 수행했다. 퍼포먼스 러닝 타임이 한 시간이었는데, 내가 잠깐이라도 유가족이 기다리던 모습이고 싶었다. 현장에서 유가족 분들의 영상과 화면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들의 기억을 계속 같이 들었다. 나는 아프리카 방송으로 듣고 있고 관객은 이어폰 꽂고 방송을 봤다. 관객도 관객 역할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다.

오늘도 팽목항에서 올라왔는데.

아이들의 흔적을 쫓다 왔다. 시찬이 어머니 꿈에 나왔었다고 한다. 시찬이가 사고 나고 20일 만인 5월 5일에 나왔다. 그 전에 어머니 꿈에 나와서 ‘농협과 우체국 사이에 있다’고 했다더라. 시찬이가 ‘엄마’ 이렇게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애잔해서 꿈이지만 안 가 볼 수 없었다더라. 그런데 실제로 팽목항 가는 길에 임회 우체국 앞에 농협이 있었던 거다. 그 사이에 도랑같이 물이 흘러가는 곳이 있는데 한 시간이 넘게 헤매고 다니셨다고 했다. 실제로 시찬이는 다인실과 그 옆 칸 사이에서 발견됐는데, 어머님은 아이가 일부로 꿈에 나타나 ‘사이’에 있다는 말을 한 것 같다고 하셨다. 이번에 어머니가 헤매고 갔던 데를 찾아가 봤다. 임회 우체국과 농협 사이에 도랑이 있더라. 거길 가는데 뭐랄까, 내가 그 어머니가 돼 본 거지. 어머니가 되어서 시찬이를 부르는 마음으로 거기를 헤매고 다녀 봤다. 그런데 물가에 되게 예쁜 애기 나무가 있더라. 그게 시찬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사진도 찍어 왔다.

이런 열여덟 개 기록들을 홈페이지(blanket416.net)로 만들어서 2주기 때 공개한다. 그중에 한 디자인 팀이 낸 아이디어인데, 세월호 유가족뿐만 아니라 활동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을 위한 쉘터(보호소)를 설치하는 것이다. 2년간 지친 사람들한테 휴식과 위안의 장소가 되길 바라며 그걸 공간 안에 구현해 놓으려고 한다. 이것도 ‘이불 한 장’ 프로젝트로, 이름은 세월호 2주기 프로젝트다. 그때 틀어 두려고 사운드 녹음하고 겸사겸사 다녀왔다.

‘이불 한 장’ 프로젝트를 지구력 있게 끌고 왔다. 작가가 사회 문제에 직접 참여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 예술로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인가.

나는 사실 예술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불 한 장’ 프로젝트를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내 지구력보다는 사람들 덕분이다. 사람들이 이불을 갖고 정말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자기 생활의 범주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심이 담긴 뭔가를 돌려보내 준 거다. 세탁한 이불이랑 도큐멘터를. 나는 그걸 보고 다시 힘을 얻었다. 동생이 그런 얘길 하더라. 생각보다 사람들은 약하지 않다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정말 나서야 되는 때에는 나서고 해야 되는 사람들은 한다고. 그러니까 예술이 무슨 힘이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더라.

‘이불 한 장’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 다른 계획도 있나.

글쎄. 나는 어디서 불러 주는 곳이 없다. 그래서 내가 한다. 내가 안 하면 없으니까. 계획은 일단 ‘이불 한 장’ 프로젝트까지 있고, 올해는 어머니들에 대한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 웹에서 수집한 유가족 어머니 모습을 많이 드로잉했다. 삼베에다 그리고 종이에다가도 그리고. 어머니들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고, 어머니들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다.

(워커스 2016.4.13)

정운, 고급진, 흑표범, 20160404

정운, 고급진, 흑표범, 201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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