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인
한국 정치와 사회 운동을 연구하면서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며, 한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근대 역사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정치 팸플릿들이 있다. 마르크스(K. Marx)의 《공산당 선언》(1848)이나 레닌(V. I. Lenin)의 《무엇을 할 것인가》(1902)와 같은 팸플릿들은 한 시대의 거대한 정치적 주제를 요약한 압축 파일로 이후 시대에 깊고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페인(Thomas Paine)의 《상식(Common Sense)》(1776)만큼 변혁에 있어서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팸플릿도 드물다. 《상식》은 발간되자마자 식민지 미국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을 거의 동시적으로 바꿔 놓았고, 출간 6개월 만에 미국의 독립을 실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또 다른 팸플릿 《인권(Rights of Man)》(1791~1792)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서의 인권을 국가 체제와 사회 제도의 근본 원칙으로 제시함으로써 당시의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세 나라 인민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책이다.

《상식》과 《인권》(박홍규 옮김, 《상식, 인권》, 필맥, 2004)은 간결하면서도 명료하다. 《상식》은 상식 그 자체이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를 보편 타당하게 입증했기 때문이다. 소박하고 직선적으로 미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다. 빈틈없는 논리와 적확한 비유로 자신의 주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미국 독립의 당위와 필연을 행성과 위성에 비유한 것은 가벼우면서도 명쾌하게 핵심을 찌른다. “하나의 대륙이 섬에 의해 영구히 통치돼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하다. 자연을 보라. 위성이 그의 행성보다 큰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관계도 그런 자연의 질서를 뒤집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체계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58쪽)

《상식》의 핵심은 영국처럼 정치 체제의 균형을 자유의 필요조건으로 보는 전통적 관념에 대한 비판이었다. 페인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필요성을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관념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영국 정체에 대한 비판에서 구한 점에서 근본적인 ‘혁명가’였다(394쪽). 페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인간 해방과 자유의 이념인데, 이는 《상식》 안에 점철되어 있다.

그는 공화정을 주장하면서 인권의 기원, 헌법과 국가의 원리, 정치의 기본 원칙 등을 논하고, 나아가 대중 교육, 빈민과 실업의 구제, 노인 연금 등 국가가 수행해야 할 사회 정책의 내용과 그에 필요한 재원 조달 방법 등을 제시했다(398쪽). 페인의 최대 관심사는 전제주의 타파와 공화국 수립이었다. 그리고 공화국의 효율적인 작동을 위해 대의제와 헌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주된 관심이 선거와 대표에 의한 대의제 공화국이었기 때문이다. 페인은 공화국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공화국을 이성의 기반 위에 선거와 대표에 의해서 조직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관점은 다르게 나타났는데, 《상식》에서는 로크를 따라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았으나, 《인권》에서는 아나키즘과 비슷한 태도를 보여, 필요한 것은 국가의 개혁이 아니라 국가의 폐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국가 개념은 “사회의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인민의 결합에 불과”(242쪽)하며, “전 공동체의 소유물”(212쪽)이며,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수립되어야”(226쪽)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의 기능은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으로 국한된다(226쪽). 페인은 “문명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국가의 필요성은 더욱 줄어든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자율적으로 처리하게 되고, 자치하게 되기 때문”(239쪽)이라고 보았다.

인류를 지배하는 대부분의 질서는 국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의 원리와 인간의 자연적 본질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는 국가의 역할은 사회와 문명이 쉽게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최소한의 일을 맡는 수준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할조차도 불필요한 상황이 조성된다면 국가를 폐지할 수 있다는 논리로 아나키즘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페인의 혁명론은 간결하다. 세계적인 평화 문명, 상업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요소라면, 그것은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혁명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인식한다(233쪽).

그는 혁명의 원인으로 세금, 빈곤, 전쟁, 인권 침해 등과 함께 사람을 들고 있다. 그는 “혁명은 기존의 전제 제도에 대한 반대이지 사람의 원리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 영국의 혁명은 개인적 전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반란이었다. 반면 프랑스 혁명은 기성 국가의 세습적 전제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104~105쪽)이라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비교 설명하고 있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에 대한 증오감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인권에 대한 합리적인 사고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권은 상식이다. 페인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자연적 인권을 타고났다고 하면서, 자연권은 한 국민의 주권, 개인적 자유권, 선거권, 언론의 자유, 혁명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자연 상태에서 나오는 자연권과 구분되는 것이 시민권이다. 시민권은 인간이 사회 구성원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권리다. 모든 시민권은 개인에게 이미 존재하는 자연권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모든 개인이 그것을 실제로 누릴 처지에 있지는 않다. 시민권은 자연권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자유, 평등, 안전, 재산, 사회적 보호, 압제에 대한 항거를 그 내용으로 한다(402~403쪽, “The natural, civil and political rights of man are liberty, equality, security, property, social guarantees, and resistance to oppression.”).

페인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실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쳤고, 그의 사상은 그러한 실천 과정 속에서 나왔다. 그가 추구한 자유의 이념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한다. 미국 독립에 대한 페인의 강한 신념은 인간이 자연적 권리, 즉 자연권을 가지고 있고 이는 자연적 기능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가 파악한 인간의 자연권은 자유였고, 인간의 자연적 기능은 이성이었다. 《상식》은 바로 이성을 통해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의 표현이었다.

그가 꿈꾸는 자유로운 사회는 인민의 인권이 상식으로 보장되는 사회였다. 혁명의 당위성도 거기서 찾았다. 상식이란 자연과 이성 및 감정에 의존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말한다. 페인은 오직 이상과 대의에 충성할 뿐 권력과 명예에는 담백한 인간이었다.

(워커스 5호 2016.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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