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관
참세상연구소(준). 《부채 전쟁》을 함께 지었고 참세상 주례 토론회를 기획하고 있다.

IMF발, ‘돈 풀기 시즌 2’

지난 4월 15일 ‘주요 20개국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G20 회의)에서 예전엔 자주 듣기 힘들었던 얘기가 나왔다. 라가르드 IMF 총재가 재정 확장 정책을 이끌 몇몇 나라들을 콕 집어 말한 것이다. 이미 지난 2월 상해에서 열린 G20 회의에서 확장적 재정 정책에 대한 화두가 제기되었던 터라 이번 회의에서 구체적인 논의들이 있을 것으로 예견되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IMF 총재가 직접 몇몇 나라를 지목한 것이다. 한국과 독일, 네덜란드가 거론됐다. 이처럼 IMF 총재가 특정 국가를 직접 거론하며 확장적 재정 정책을 촉구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박근혜 정부가 그동안 수차례 “비정상의 정상화”를 언급하고 국가 재정의 안정을 강조했던 걸 우린 기억한다. 국감 시즌이 되면 국가 부채가 1000조를 넘었다는 얘기가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런데 IMF 총재가 재정 여력이 있는 나라로 한국을 직접 언급했다고 하니,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혹시 무슨 음모론이라도 있는 것일까? 외환 위기를 겪었던 우리에겐 IMF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어서 음모론에 더욱 솔깃해진다. 그러나 사실 객관적인 통계 지표상 한국은 재정 여력이 충분한 국가이다. 공기업 부채를 국가 부채에 포함시키면 부채 비중이 상당히 높아지지만, 여전히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국가 부채 비율이 크다고 볼 순 없다. 그렇다고 IMF 총재 말대로 지금 당장 한국 정부가 재정 정책을 확대할 의무는 없다. 권고 사항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IMF 총재가 직접 몇몇 나라들을 언급할 정도로, 최근 수년 동안 선진국들이 펼쳤던 ‘중앙은행 돈 풀기 전략’의 약발이 다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제로 금리를 뛰어넘어 마이너스 금리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기대만큼 경기를 부양시키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부상한 확장적 재정 정책에 대한 국제적 강조는 8년 가까이 진행되어 온 완화적 통화 정책(초저금리, 양적 완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는 계기라고 평가된다. 그동안 완화적인 통화 정책 속에서 균형 재정을 강조했던 흐름에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재정 위기의 당사자였던 유럽은 재정 긴축 노선을 고수하면서 유럽 대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왔다. 그러다 보니 이에 반발한 정치 집단들이 급부상했고, 기존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종속된 정당 체제를 허무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반긴축을 주장하는 신생 정치 집단들이 부상하고, 심지어 유럽의 중심국인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는 이민자 문제와 결부되어 극우 세력들이 약진하고 있다. 나라별로 상황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건 긴축에 따른 사회적 불만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번 IMF발 확장적 재정 정책으로의 선회는 이런 정치적 사회적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 통합과 안정을 위해 국가의 재정적 역할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기존의 재정 긴축 노선이 그 흐름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IMF 총재가 독일을 지목한 이유도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이 가장 긴축적인 재정 운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진 독일의 적극적 화답을 기대하긴 힘들다. 화폐 남발을 유독 경계하는 전통적인 경제 이데올로기와 재정 규율을 통해 유럽 내 산업적 지배력을 지키려는 전략을 독일이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IMF발 ‘돈 풀기 시즌 2’는 많은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일종의 타협책으로 완화적 통화 정책으로 국가 재정을 보조하는 시도가 잦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수년 동안 시행되어 왔던 중앙은행의 양적 완화도 사실은 재정 보조를 담당해 왔다. 현재 전 세계 중앙은행의 양적 완화 매입 대상 중 국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그리고 국채 매입으로 인해 국채 금리가 떨어지는 효과도 발생시킨다. 이건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이 정부의 원활한 자금 조달을 돕는다는 걸 의미한다. 최근엔 중앙은행이 마이너스 금리정책까지 도입했는데, 이로 인해 단기 국채는 물론이거니와 10년짜리 장기 국채도 마이너스 금리로 떨어지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이니 이론적으로 정부가 계속 국채를 발행하면 모든 빚을 갚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마이너스 금리, 비정상의 정상화?〉, 《워커스》 4호 참조).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for people)

그런데 이런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국가 재정을 보조하려는 시도는 여러 경로를 통해 확대되고 있다. 작년 영국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압승한 제레미 코빈의 경우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를 주장한다. 가령 주거 복지를 위한 국민주택공사를 설립하고 이 공공 기관의 자금을 영란은행의 발권력으로 충당하자는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친환경 녹색 산업의 인프라 구축과, 공공 서비스 확대, 빈곤 가구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하여 먼저 투자와 소비를 증대시키면 이에 비례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고 이것을 다시 재정 투자로 활용한다는 선순환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www.qe4people.eu 참조).

한편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는 복지국가 담론에서 제기하는 부자 증세론과도 쟁점을 이룬다. 보통 우리는 세금을 거둬 복지 재원을 마련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세금을 걷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세법을 개정하기 위해 의회에서 긴 논쟁을 하느라 1년을 소비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법 적용을 해서, 그다음 해에 전년도 소득에 대한 과세를 한다. 최소 2년 동안 기다려야 복지 제도의 시행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증세를 둘러싼 계층 간 갈등으로 사회적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고려하면, 그 효과가 불확실하며 중도에 좌초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2012년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범했던 프랑스 올랑드 정부는 고소득자 세율을 75%로 올리는 엄청난 부자 증세를 시도했었다. 그런데 결국 2012년 12월 헌법위원회에서 위헌 결정이 나는 바람에 세몰이가 꺾이게 되었고, 이후 증세 논쟁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뭐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주저앉았다. 사실 이 법을 적용받게 되는 고소득자는 2천 명 남짓이며, 전체 세수의 1%도 되지 않는다. 크게 실익도 없는 상징적인 정책에 국정 동력을 소실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 코빈이 제시한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는 투자 및 소비 활성화라는 수준의 논쟁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년 동안 전 세계 중앙은행이 퍼부었던 천문학적인 돈을 과연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 돈을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돈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고, 돈은 얼마든지 필요에 따라 찍어 낼 수 있다고 설파한다. 지난 금융 위기 때,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선 얼마든지 돈을 찍어 낼 수 있다는 중앙은행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돈의 사용 목적에선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다. 마치 서로 반대편에 비친 거울 쌍과 같다.

한국판 양적 완화와 기업 구조조정

한편 한국에선 총선 기간  ‘한국판 양적 완화’가 논란이 됐다. 하지만 이제 쑥 들어갔다. 여당이 총선에서 대참패를 하면서 이 주장을 할 만한 여건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판 양적 완화’ 주장의 배경은 언제든지 다른 형태로 재등장할 수 있다. 기업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는 현재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여기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한국판 양적완화, 한국은행은 누구를 위해 돈을 뿌리나〉, 《워커스》 6호 참조).

이것은 앞서 제기했던 IMF 총재의 발언, 즉 재정 여력이 있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한 것과 서로 접목될 수 있다. 현재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국책 은행들의 구조조정 기금 확충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선 재정 투여가 필요하고 이것을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간접 지원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방법은 정부가 구조조정 확충을 위한 국채를 발행하면 한국은행이 시장에서 이를 되사는 것이다. 사실 정부와 한국은행은 광의의 국가 기구 개념에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중앙은행 독립성’ 논리는 국가의 시장 개입이 절실한 상황에 직면해선 별로 큰 쟁점이 되지 못한다. 경제 위기 때마다 등장한 ‘대마불사(too big to fail)’에서도 우리는 확인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쟁점들을 정리해 보자. 정세적으로 확장적 재정 정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국가 재정의 보조자로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요구받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마련된 돈을 어디에, 어떻게, 누구를 위해 쓸 것인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돈 풀기 시즌 2’는 더욱더 계급 및 계층 간 갈등을 드러낼 것이다. 특히 객관적 지표상으로 봐도 한국의 국가 재정 여력은 아직 충분하다. 구조조정, 복지 재원 등 국가의 시장 개입 요구가 더욱 확대되고 있는 현 상황은 국가 재정을 둘러싼 논쟁의 질을 높이고 폭을 넓게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이에 대한 응답을 준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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