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인
한국 정치와 사회 운동을 연구하면서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며, 한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6년 4.13 총선만큼 예측이 빗나간 선거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대중의 가변성과 역동성(?)이 확인된 선거였기 때문이다. 정치는 대중으로부터 동의와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는 늘 위기였고 정당 정치의 위기를 한꺼번에 보여 주었다. 정당 정치의 위기는 결국 정치인들이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 소박한 의미와 함께 대중의 욕망을 수용할 정당이 부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샤츠슈나이더(Schattschneider)가 “정당 정치의 위기는 정당만이 민주주의의 가장 실용적이고 현실적 대안이라는 데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대중은 늘 고독한 존재인가 보다.

대중이 진취적이며 민주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수동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인지에 대한 논쟁은 사회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가 대중 사회이지만 주체로서의 대중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초반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과 계급 해방을 위해서는 소수 정예의 ‘프롤레타리아 전위당’이 나서 사회주의적 계급 의식을 확고하게 심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늘 소외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위의 지위를 절대화한 레닌에 비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대중을 통해서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필연을 역사적 현실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기반하면서도 정치 변혁의 전망과 통합되는 ‘새로운’ 변혁 전략을 대중 파업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137쪽, 책세상). 그녀에게 대중 파업의 가장 중심적인 특성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결합이다. 무엇보다 ‘대중의 자발성’이 혁명을 추동하는 힘이라고 사고했다.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소수가 폭력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이상에 맞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운명적인 시도를 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또한 역사적 필연성을 역사적 현실로 바꾸어 놓기 위해 부름 받은 수백만 대중 일반의 자각에 의한 행동일 뿐이다”(로자 룩셈부르크, 1974: 445)라고 하면서 봉기를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와 달리 대중의 자발성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룩셈부르크의 인식은 당시 보수주의적 경향에 빠진 독일 사민당 지도부의 무능함과 의회주의적 전략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자신에 대한 극단을 오가는 평가 속에서 혁명관이나 조직 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벌이며 독자적인 체계를 보여 주었다.

루카치(G. Lukács)는 그녀가 혁명 과정에서 “자발적이고 기본적인 세력들을 과대평가”한 반면에 “당의 역할을 축소시켰다”고 비판했고, 샤하트만(M. Shachatman)도 그녀의 혁명적 열정을 찬양하면서도 대중의 자발적 행동에 대해 과도한 신뢰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자동 붕괴만 기다리는 기계적 유물론자라는 비판과 ‘대중의 자발성에 몸을 내맡기는’ 대중추수주의자, 또는 주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의 비판자들이 내린 결론은 다름 아닌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적 행동은 그녀의 이론과 모순된다”라는 것이었다(《로자 룩셈부르크 생애와 사상》, 194쪽, 책갈피).

한편, 이러한 비판은 당시 ‘정통적 레닌주의’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레닌을 권위주의적 인물로, 룩셈부르크를 민주주의자로 위치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 대비는 정당과 노동 대중 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를 규명하는 데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모순도 증가하면서 노동자들은 역사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주체로 나서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녀에게 노동 대중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종래의 혁명이 소수의 이해를 위해서 대중을 동원했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다수인 대중의 이해를 따르는 최초의 혁명이라고 보았다.

룩셈부르크가 노동 대중을 중심에 놓고 혁명 운동을 벌였지만, 그렇다고 정당이나 전위의 역할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자로서 그녀의 삶은 폴란드의 프롤레타리아혁명사회당에서 시작해 폴란드 사회민주당, 독일 사회민주당 그리고 독일 공산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한 번도 사회주의 정당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룩셈부르크가 계급 투쟁이나 혁명 운동에서 정당의 지도적인 역할을 부정하고, 객관적인 요인들을 과대평가했으며,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의 중요성을 간과하면서, 역사 발전의 필연성이라는 깊은 함정에 빠졌다는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 레닌과의 차이는 정당의 역할과 임무 그리고 형식과 운영에 대한 것이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노동자 대중에게 혁명의 시기가 필연적으로 도래하고,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회적 관계들을 분석하고, 혁명의 정치적 귀결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명확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투쟁의 슬로건을 제시하고 방향을 부여하며 노동자 대중의 폭발적인 힘이 정당의 전투성과 결합할 수 있도록 전술을 세우고, 단호하고 예리하게 마련된 사회주의 정당의 전술이 실질적인 세력 관계를 앞서 나가게 하는 것이 정당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로자 룩셈부르크, 1995: 64)

룩셈부르크의 “전체 인민 대중이 참여하지 않으면, 몇몇 지식인들이 책상 위에서 사회주의의 운명을 결정하고 말 것”(로자 룩셈부르크, 1987: 359-60)이라는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룩셈부르크의 레닌에 대한 비판이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공간적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은 적절한 지적이다.

룩셈부르크를 객관주의자라고 하는 비판에 대해 프뢸리히(Paul Frölich)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역사의 필연적 법칙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이 법칙의 수행자는 인간이며,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는 수백만의 대중이며, 그들의 조직이고 그들의 지도자들인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생애와 사상》, 197쪽, 책갈피)고 방어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노동 대중의 혁명성을 믿었고, 그들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혁명 운동을 전망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당의 임무는 노동 대중에게 행동하라고 지령을 내리거나 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정치적 지도’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주의 정당이야말로 가장 계몽되고 계급 의식이 투철한 노동 대중의 전위이기 때문에 대중의 자발성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안 되고 언제나 사태의 발전을 앞지르고 가속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 정당이 노동 대중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억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속하고 종합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자율집중주의를 조직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녀의 방법을 보면 수정주의 논쟁 시기에는 이론에 강조점을 두어 노동 대중이 과학적 이론들을 철저하게 학습할 것을 역설했으며, 제국주의 위기가 몰려오면서부터는 실천을 강조해 노동 대중 스스로 전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도 노동 대중이 스스로 전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거나 기회가  다가왔을 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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