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관

참세상연구소(준). 《부채 전쟁》을 함께 지었고 참세상 주례 토론회를 기획하고 있다.


 

 

거침없는 양적 완화 논쟁

총선 시기 ‘한국판 양적 완화’가 거론되었을 때만 해도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더구나 여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태풍은커녕 미풍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대통령 입에서 구조조정과 양적 완화가 오르내리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처음엔 부정적이었던 한국은행도 모양새만 갖춰지면 구조조정 자금 지원을 위해 양적 완화를 할 수 있다는 뉘앙스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야당은 양적 완화가 경제 실정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박근혜 정권의 꼼수라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중앙은행 독립성과 통화 가치 안정을 외치는 자유주의적 쟁점들이 결합하면서, 논쟁은 구조조정 자금에만 국한되지 않은 더 큰 쟁점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 논객들 누구나 이에 대해 한마디씩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젠 이 논쟁이 어떻게 결론 나든 한국 사회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중간 단계를 건너뛴 박근혜표 양적 완화

논쟁이 이렇게 격화된 이유는 박근혜표 양적 완화가 중간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사실 구조조정 자금 마련은 정부가 먼저 자기 예산으로 집행해야 한다. 부족하면 추경 편성을 해야 하고 이것은 의회 동의를 거쳐야 한다. 만약 정부가 더 부채를 늘릴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있거나, 의회 동의를 기다릴 수 없을 만큼 급할 경우 중앙은행이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다. 실제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때,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은 붕괴한 금융 시스템을 되살리기 위해 의회 동의 없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찍어 금융 시장에 공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구조조정 과정은 이런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제기된 문제라 기업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인수 합병을 원활하게 돕기 위한 〈원샷법(기업활력제고법)〉과 같은 법률도 의회에서 지난 2월 통과됐다. 그런데 4.13 총선에서 패배한 청와대가 자신의 정치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위기 국면을 강조하면서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대통령은 여기에 ‘국가재정건전화법’을 제안하면서 재정 안정을 피력했는데, 사실 이는 구조조정 자금 마련과 관련해 정부의 손발을 묶는 행위와 다름없다. 구조조정과 재정 위기 등을 거론하면서 위기 국면을 활용하려는 이런 정치적 꼼수가 되레 정부의 역할을 옥죄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의회와의 정책 소통 의지가 없는 대통령의 마이웨이식 국정 운영이 결합했다. 결국 의회라는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자는 말을 대통령 스스로 꺼내게 된 것이다.

만약 대통령이 정석대로 했으면, 양적 완화 논쟁은 불거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균형 재정을 강조하는 일각에서는 국가 부채 문제를 거론했겠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부채 비율이 낮은 한국이 구조조정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리는 없다. 더구나 현재 3년 국고채 금리가 사상 최저치인 1.47%이다. 이는 기준 금리인 1.5%보다도 낮다. 그만큼 정부가 돈을 매우 싸게 조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의회에서 머리 한번 숙이면 될 일을 정치적 위기를 모면해 보려다 오히려 논쟁을 키우게 된 셈이다. 이젠 구조조정 논쟁보다 양적 완화 논쟁이 더 격화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 열린 논쟁과 바리케이드

그렇다면 이 열린 논쟁의 공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전향적으로 개입해야 할까? 지금도 대통령은 구조조정 상황이 매우 긴박하니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빨리 동원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렇다면 구조조정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긴박한 곳에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자고 대통령에게 되물어 보자. 가령 “당신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무상 보육이 중앙정부의 재정 책임 회피로 이뤄지지 않아 지금 보육 현장이 파탄 난 상황입니다. 이보다 시급한 게 어디 있을까요? 돈 찍어서 아이들 교육합시다!” 일종의 ‘무상 보육을 위한 양적 완화’이다.

이런 질문은 경제적 옳고 그름을 떠나 매우 정치적인 논쟁을 끌어낸다. 만약 대통령이 이것을 거부한다면, 그래서 한국은행의 발권력은 오로지 구조조정을 위해서만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국민은 의아해할 것이다. 부도난 기업을 되살리는 데 필요한 돈은 잘도 찍어내면서, 왜 미래 세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돈은 찍어낼 수 없는지 말이다. 도대체 그 기준이 뭔지 대중은 대통령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한국은행의 발권력은 매우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논쟁을 낳을 수밖에 없다. 과연 여기서 두 야당 대표들은 뭐라 답을 할까? 박근혜표 양적 완화를 그렇게 비판했던 두 야당도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구조 개혁이니 하는 원론적인 말로 얼버무릴 수 없다. 만약 이들이 양적 완화는 어떤 경우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한국은행의 대차 대조표를 들이밀어 보자. 한국은행은 450조 원에 이르는 국외 자산, 즉 외환 보유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산에 대응하는 부채로서 통화 안정 채권 184조 원, 외국환 평형 기금 예금 100조 원이 있다(통화 안정 채권은 한국은행이 외화 매입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해 지급했던 원화를 다시 시중으로부터 거둬들이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이다. 일종의 통화량 조절을 위한 장치다). 이처럼 이미 한국은행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외환 보유고를 확충하기 위해 발권력을 동원해 양적 완화를 해 왔다. 양적 완화가 지금 새삼스럽게 등장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외환 관리를 위해 지금도 수백 조 원의 양적 완화를 하는 건 괜찮고, 보육 재정 확충을 위해 양적 완화를 하는 건 왜 문제가 되는지 그들에게 되물어 보자. 액수로 따지면 외환 보유고의 1%에도 못 미치는 4조 원이다. 만약 이 때문에 통화량 과잉이 문제가 된다면 통화 안정 채권을 더 발행해서 흡수하면 된다. 이미 184조 원이 넘는 통화 안정 채권을 발행했는데, 여기서 조금 더 발행한들 갑자기 엄청난 사건이 나는 건 아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이라 대답할까?

일각에서 이런 주장에 대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를 순 있으나 경제적으론 틀린 얘기다”라고 비판할 수 있다. 또는 양적 완화라는 건 기축 통화국들만의 전유물이라 우리 상황엔 맞지 않는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르다고 혹은 우리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그 양적 완화가 사실은 십여 년째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고, 지금은 대통령마저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양적 완화 논쟁은 경제적인 올바름을 따지는 상황을 벗어났다. 일은 벌어졌고,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이제 이 논쟁을 ‘경제적 올바름’을 따지는 문제로 축소하는 건 퇴행이다. 대중의 이데올로기가 충돌하고 있고,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누구를 위해 돈을 써야 하는지 최고 권력자에게 묻고 있다. 바리케이드 저편에 설지 아니면 이편에 설지 말이다.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을 향해 현수막을 들자. 이게 바로 중간 과정을 건너뛴 박근혜표 양적 완화의 논쟁 국면을 확대하는 길이다.

 

양적 완화와 이른바 ‘경제적 올바름’의 문제

양적 완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긴장감을 팽팽하게 만드는 논리가 있다. 바로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전가 문제다.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찍어내는 것이 결국 미래 세대로부터 부를 당겨오는 것이고, 이것은 고스란히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전가된다고 지적한다. 이 논리는 국가 부채 및 국가 재정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마치 고장 난 라디오 소리처럼 항상 흘러나왔던 익숙한 얘기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이 말을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바로 ‘미래’라는 점에 있다. 이 논리가 성립하기 위해선 미래에 경제적 부를 책임질 세대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돈이 없어서 미래 세대를 키우지 못한다면? 돈이 없어서 청년들이 헬조선인 이 땅을 모두 떠난다면? 이런 상황에서 미래 세대를 운운하는 건 한가한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 ‘경제적 올바름’의 전제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부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만약 그 재생산의 토대가 무너진다면 이는 공허한 논쟁일 뿐이다.

‘무상 보육을 위한 양적 완화’, 이 한 가지 사례가 강조하는 중요한 핵심은 재정난의 우회로를 찾는 것에만 있지 않다. 무너져 내리는 사회 재쟁산의 토대를 재건하고 미래의 경제적 번영을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의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기엔 자원 배분을 위한 권력의 문제가 개입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 권력과 사회적 통제”라는 옳지만 오래된 서랍장 속에 잠자고 있었던 말들을 다시 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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