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살아남은 자의 수치

물론 나는 알고 있다단지 운이 좋아서

내가 그들보다 너무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오늘 밤 꿈에서 그들이 나에게 말했다

"적응한 자가 살아남았다(적자생존)"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었다

-<생존자>베르톨트 브레히트, 1942

5.18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의 일들을 지칭하지만실제로는 이후 남한의 사회운동은 물론 정치·경제·문화에까지 총체적인 영향을 미쳤다광주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깊고 거대한 질곡이었다이 캄캄한 구멍에는 그들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자책과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불가피함과그 시대에 대한 역사적 부채감 같은 것들이 마구 뒤엉켜 있을게다그러니까 우리는 5.18 이후스스로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과 수치를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 출처: 5.18기념재단

엄마어떻게 나만 살 수가 있어.”

1980년 5광주에 들이닥친 전두환의 계엄군은 민주주의를 외치던 광주의 인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암매장했다당시 광주상고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문재학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친구를 보았다이후 문재학은 전남도청에 머물며 광주 시내에 쌓여가는 시신들을 수습하고 유족들을 안내하는 일을 도맡았다문재학의 가족들은 수차례나 그를 만류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어떻게 나만 살 수가 있어.

⟪소년이 온다⟫의 첫 장면은 문재학을 모티프로 한 주인공인 동호를 라고 칭하며 시작한다이것은 하나의 문학적 언술로써 소설 전체가 일종의 편지나 시로서 읽히게 하는 단서로 작용한다작가는 동호를 라고 호명함으로써 과거에 말을 거는 동시에독자들에게 역사적 서간(書簡)을 시도한다소년과 네가 함께 무언가를 목격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얼마나 됐다고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1980년 5월 27전두환 신군부의 계엄군은 광주의 인민학살을 마무리 짓기 위해 최후의 작전을 벌인다작전명은 충실하고 정직하게 무력을 숭상한다는 뜻의 상무충정작전이었다계엄군은 끝내 도청에 남은 이들과 동호마저 살해하고광주시민군의 시신들을 통으로 불태운다.

동호와 함께 일했던 은숙은 살아남았고도청 민원실에 날마다 전화를 걸어 분수대의 물을 잠가달라고 부탁한다제발 물을 잠가 주세요민원실 직원들은 인내심 있게 응대하지만그의 요구는 불가능한 것이었다이후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진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동호의 가족들은 그날의 수치와 모멸을 견디며 살아간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좋은 문학은 반드시 애도의 감수성을 품고 있다애도는 특정한 개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때로는 역사적 사건 전체이거나 혹은 시대일 수도 있다애도는 기억을 통해 전승하기에애도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년이 온다⟫는 죽음에 대한 애도인 동시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서간이다여전히 한국사회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도이후의 민중들이 광주와 연결되고 연대하는 것에도 같은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5.18 광장의 인민들이 염원했던 민주주의는 도래하지 않은 것 같다어쩌면 우리는 해방과 민주주의 사이에 너무 먼 거리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시간을 보내왔는지도 모른다사회운동이 이뤄야 할 목표 또한 광장의 공백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애도를 하는 사람은 슬픔에 지쳐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추모와 기억을 통해 존엄해진 삶의 주체이기에 여전히 광주를 기억하고 광주에 수렴한다. 한번은 깊은 수치심으로, 또 한번은 깊은 연결과 연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때의 소년(小年)이 온다.

덧붙이는 말

왕의조는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한내와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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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민주주의 518 광주민중항쟁 계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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