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주도로 신파시즘을 향해 경악할 만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그는 미국 국가기구의 억압적 자원을 총동원해 반대 의견을 억누르고, 자신의 극단적 의제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디스토피아적 비전을 이 나라에 강요하고자 하는 의지는 극에 달해, 반파시즘 운동 자체를 범죄화하려는 시도에까지 나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 다음 인터뷰에서, 프린스턴대학교 역사학자이자 ⟪모든 것은 가능하다: 파시즘 시대의 반파시즘과 좌파⟫(Everything Is Possible: Antifascism and the Left in the Age of Fascism)의 저자인 조지프 프론착(Joseph Fronczak)은, “안티파(Antifa)”의 글로벌 역사와 함께, 우리가 오늘날의 신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초기 반파시스트 운동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파시즘 시대의 반파시즘과 좌파⟫(Everything Is Possible: Antifascism and the Left in the Age of Fascism), 조지프 프론착(Joseph Fronczak)
C. J. 폴리크로니우: ‘안티파(Antifa)’는 ‘반파시스트(anti-fascist)’의 줄임말로, 단일하고 구체적인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탈중앙화되고 리더가 없는 네트워크를 뜻한다. 이 네트워크는 자신들을 파시즘과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개인 혹은 집단으로 자임한다. 안티파라는 개념은 1960년대 유럽에서 등장했지만, 그 뿌리는 1920~30년대의 반파시스트 운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전후 유럽의 초기 반파시스트 운동은 1921년 창설된 이탈리아의 ‘아르디티 델 포폴로(Arditi del Popolo, 민중의 용감한 사람들)’라는 운동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조직은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의 폭력에 맞서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 결성된 반파시스트 그룹이었다. 놀랍지만 동시에 전혀 놀랄 일도 아닌 건, 도널드 트럼프가 안티파를 “주요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그가 파시즘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과 관련해, 전간기(interwar period) 동안 반파시즘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간략히 설명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시 파시즘의 위협이 좌파를 ‘글로벌 공동체’로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가?
조지프 프론착: 먼저 아르디티 델 포폴로(Arditi del Popolo)부터 이야기해보자. 이 조직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반파시스트 조직으로, 여러 면에서 이후 반파시스트 정치의 전형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는 이 조직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이탈리아 바깥에서는 더욱 그렇다. 네가 언급한 대로, 아르디티 델 포폴로는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스콰드리스티, squadristi)의 폭력으로부터 노동자 계급과 그들의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1921년 여름 로마에서 처음 결성되었고, 곧바로 핵심 원칙을 세웠다. 그건 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과 맞서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물리적 충돌도 불사한다는, 투쟁적인 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늘 집단적인 방식으로 행동했고, 수적 힘에 의존해 조직적인 대응을 펼쳤다. 이들이 결성된 시점은, 아직 1922년 10월의 로마 진군(March on Rome)이 있기 전이었다. 당시 파시즘은 국가 권력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 운동이었고, 매우 폭력적이었다. 파시스트들은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테러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앞서 트럼프가 안티파를 ‘테러 조직’으로 지목한 것을 언급했듯이) 아르디티 델 포폴로는 파시스트의 테러에 테러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언제나 노동자 계급 방어를 위한 엄격하고 집단적인 실천에 충실했고, 파시스트들의 공포 전술을 그대로 따라하거나, 동일한 방식의 테러로 맞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파시스트 지배를 저지하고자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테러에는 테러로 맞서지 않고, 집단적이고 규율 있는 방식으로 방어에 나섰다.
그런 규율은 위에서 명령해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아르디티 델 포폴로는 급진적으로 평등하고 수평적으로 조직된 집단이었다. 구성원들은 윤리적 책임을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집단의 이름만 봐도 이들의 윤리를 엿볼 수 있다. ‘아르디티(Arditi)’는 복수형으로, ‘용감한 사람들’을 뜻한다. 단수형으로 말하려면 끝을 ‘o’로 바꿔 ‘아르디토(ardito)’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집단은 그 누구도 단수형으로 지칭하지 않았다. 항상 자신들을 집단으로 표현했다. 이 명칭은 구성원 간의 본질적인 위계나 차이가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며, 그들의 공통된 정체성인 ‘아르디티’는 집단 내에서의 근본적인 평등을 상징했다. 이름의 뒷부분인 ‘델 포폴로(del Popolo)’는 ‘민중의’라는 뜻이다. 이는 이들이 얼마나 강하게 대중주의(populism)를 내면화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스스로를 인민의 전위, 혹은 민중 의지의 방패로 여겼다.
아르디티 델 포폴로는 이후 등장하는 다양한 반파시스트 정치 흐름들을 여러 측면에서 선구적으로 예시했다. 그들은 이념을 초월한 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이 함께 모인 ‘큰 우산 아래의 집단’(big-tent group)이었다. 어느 한 계파가 주도권을 잡는 일이 없었고, 그만큼 다양성을 유지했다. 이들 구성원은 다양한 이탈리아 정당들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정당 지도부들은 대개 아르디티 델 포폴로에 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집단은 곧 강력한 대중운동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이들이 대중 앞에 등장할 때마다 카리스마 있는 집단 이미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치적 미학의 힘과, 정치적 행위의 극적 연출이 지닌 잠재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위에 나설 때 극적으로 연출된 방식으로 행진했고, 노래를 부르며 화려한 색상의 복장을 갖추고 등장했다. 공개적인 출현은 항상 영웅적이고 상징적인 자세와 제스처로 가득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단지 노동자 회합이나 지역 공동체를 파시스트로부터 방어만 한 것이 아니라, 극적이고 영화적인 방식으로 방어했다.
1922년 파시스트들이 이탈리아 국가 권력을 장악하자, 새 정부는 곧바로 아르디티 델 포폴로를 탄압하고 해산시켰다. 결과적으로 이 조직의 수명은 짧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그들의 특징들은 이후 반파시스트 정치 전통의 핵심적 요소로 계승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용감한 방식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파시즘은 전 세계적인 의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의 대규모 국제 연대는 아르디티 델 포폴로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921~1922년 아르디티 델 포폴로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반파시스트들 중 일부는 1936~1937년 스페인으로 건너가 세계 파시즘과 맞서 싸웠다.
C. J. 폴리크로니우: 전간기의 반파시스트 운동은 이념적, 정치적 분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나치즘에 맞서 좌파가 단결된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독일 공산당(KPD)은 반파시스트 행동(Antifaschistische Aktion)을 만들어 나치에 저항하려 했고, 사회민주당(SPD)은 철의 전선(Eiserne Front)을 조직했지만, 양측은 통합된 전선을 구성하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반파시스트 진영도 비슷한 분열을 겪었다. 이러한 이념적, 정치적 분열은 지금까지도 좌파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분열은 반파시즘이 초국가적 운동으로 기능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는가?
조지프 프론착: 물론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나는 좌파가 이 문제를 두고 언제까지나 집단적 자책감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좌파는 언제나 종파주의, 배신, 앙금, 철학적 분열로 가득했다. 그렇다,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넘어서야 한다. 초국가적 운동은 원래 조직하기 어렵고, 서로 다른 정당 출신들이 함께 하는 다이념적 연합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좌파를 구축해 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물질적 이해, 사회적 정체성, 철학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로선 좌파에 분열이 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좌파’라는 이름 아래 함께하려는 정치적 상상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그리고 단지 개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좌파 내에는 공통된 정치적 연대의 약속이 살아 있다.
C. J. 폴리크로니우: 1930년대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 참여한 양민족적 반파시즘 운동이 등장했다. 이 운동은 어떤 일이 있었는가?
조지프 프론착: 그 운동은 결국 역사에 의해 사라졌다. 아르디티 델 포폴로조차 오늘날 기억하는 이가 드물지만, 팔레스타인의 안티파는 그보다 훨씬 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규모 급진적 집단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안티파는 어쩌면 유럽 바깥에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안티파’라 부른 집단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언급한 ‘반파시스트 행동’은 1932년 베를린에서 창설되었고,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마자 탄압되어 해산되었다. 이 조직은 공산당(KPD)이 주도했으며, 라이벌인 사회민주당(SPD)의 세력을 흡수하려는 전략적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파시즘에 대한 집단적 방어라는 원칙을 분명히 견지했고, ‘안티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안티파라는 줄임말이 이 시기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며, 특정한 반파시즘의 형식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1934년,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함께 조직되어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맞서고,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유하는 사회 혁명을 추구하고자 할 때, 이들은 자신들을 ‘팔레스타인의 안티파’라 불렀다. 이들은 영국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했으며, 영국이 아랍인과 유대인을 의도적으로 분열시켜 지배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파시즘은 제국주의가 설치한 덫이었다. 인종 혐오와 민족주의는 제국주의가 두려워하는 국제적 연대의 가능성을 방해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 집단은 유대인 노동자들에게는 시온주의를, 아랍인 노동자들에게는 아랍 민족주의를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는 파시즘 논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적 폭력에 빠지는 것 자체가 파시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여겼다. 팔레스타인의 안티파는 사회혁명을 지향했지만, 반드시 평화로운 방식이어야만 진정한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파시즘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다시 파시즘을 낳는다. 팔레스타인의 안티파는 풀뿌리 정치조직화가 반파시즘의 실천적 대안이며,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1930년대 말의 격변은 이 운동을 무너뜨렸다. 아르디티 델 포폴로는 인식되지 못한 유산을 남겼지만, 팔레스타인의 안티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가치는, 아직 꽃피우지 못하고 사라진 평화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사회혁명의 가능성에 있다. 다른 과거가 존재할 수 있었고, 다른 세계도 가능했었다.
C. J. 폴리크로니우: 안티파는 언제 미국에 도착했는가? 그들의 주요 목표는 무엇이었고,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조지프 프론착: 팔레스타인의 안티파를 염두에 둔다면, 그들이야말로 안티파를 가장 먼저 미국으로 가져온 집단이라고 말해도 공정할 것이다. 1937년, 팔레스타인 출신의 반파시스트 두 명 — 유대인인 모리스 에프롬(Morris Efrom, 텔아비브)과 아랍인인 나지브 유수프(Najib Yusuf, 야파) — 이 뉴욕에 도착해 장거리 연대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펼쳤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안티파’라고 하면 떠올리는 정치 형식과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1980년대 미국에서 등장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반파시스트 성향의 스킨헤드 청년들이 ‘반인종차별 행동(Anti-Racist Action)’, ‘인종 편견 반대 스킨헤드(SHARP, Skinheads Against Racial Prejudice)’ 같은 그룹을 조직했다. 이들은 트윈시티(Twin Cities,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 뉴욕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펑크, 스카(ska), 오이(Oi!) 음악 신(Scene)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안티파 정치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다. 핵심 원칙을 지키는 데 집중하며, 단순화된 형태의 반파시즘, 즉 ‘기본으로 돌아가는’ 반파시즘(back-to-basics antifascism)을 만들었다.
C. J. 폴리크로니우: 당신의 책 ⟪모든 것은 가능하다: 파시즘 시대의 반파시즘과 좌파⟫에서는, 1930년대의 반파시즘 연대가 오늘날의 좌파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 시대의 반파시스트 좌파와 오늘날 좌파 사이의 연결 고리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가?
조지프 프론착: 반파시즘의 원칙은 좌파에게 끈끈한 접착제처럼 작용했다. 좌파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건 앞서 언급했던 말과도 연결된다. 좌파는 늘 분열돼 있었지만 ‘좌파’라는 단순한 개념 자체, 즉 평등과 해방을 위한 싸움에서 서로 연대할 것이라는 기대를 공유하는 세계적 공동체라는 발상은 매우 강력하고 귀중한 정치적 자원이다. 이걸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된다. 나는 책에서 바로 그 정치적 자원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1930년대의 반파시스트 좌파 이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좌파’라고 부르는 세계적 규모의 정치 블록을 상상할 수 있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19세기 좌파’ 같은 표현을 쓰지만, 그 시기 사람들 스스로 그런 의식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 개념의 부재는 실제로 많은 걸 방해했다. 그런 좌파를 하나의 정치적 형상으로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은, 결국 파시즘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그 싸움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C. J. 폴리크로니우: 파시즘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파시즘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그리고 트럼프가 안티파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겠다는 발언은, 워싱턴 D.C.에서 등장하는 독재 체제와 세계적 차원의 파시즘에 맞선 싸움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는가?
조지프 프론착: 트럼프가 안티파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자기 발언의 문법적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려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단지 말을 꿰어 붙여서 하나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그가 하는 행위는, 주장들이 논리적 순서로 배열된 합리적 담론이라기보다는, 거칠고 무식한 기호 작용에 더 가깝다.
그는 지금 서로 다른 담론들을 뒤섞고 있다. 트럼프는 먼저 “글로벌 테러와의 전쟁” 담론을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특정 단체를 공식적으로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행정명령에는 안티파가 “젊은 미국인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며, 급진화시킨다”는 문구를 넣는다. 동시에 그는 연방 법률 기소의 일반적인 담론도 사용한다. 행정명령에서는 안티파를 하나의 “기업체”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치 조직범죄법(RICO)으로 기소하려는 프레임과 비슷하다.
트럼프는 이처럼 서로 다른 담론의 전문 용어를 억지로 끼워 맞추며, 정치적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내뱉는다.이건 명백한 권력 남용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주 흔한 방식의 남용이기도 하다. 그 영향은 무엇일까? 나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안티파 청년들을 ‘국가 내부의 적’으로 각인시킨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파시즘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 질문의 표현 방식 자체가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그 질문을 머릿속에서 명확히 정의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우리가 오늘날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방식은 파시즘에 맞서 싸우러 나오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극우나 권력층의 공격 대상이 된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자신이 바로 그 표적이 된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우리”에는 양쪽 모두가 포함되어야 한다. 물론, 자신과 목표가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 그리고 희생양이 된 사람들을 끝까지 지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일은 실천의 요소들을 분명히 해주는 역할을 한다. 과거에 당신이 존경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던 사람들의 사례에서 배우고, 실패하거나 실수한 사람들의 사례에서도 배움을 얻어야 한다.
[출처] From 1920s Italy to 1930s Palestine to 1980s Ska Scenes, Antifa Has Many Faces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C.J. 폴리크로니우(C.J. Polychroniou)는 정치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이며,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