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새벽 6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광주. 이제 막 출근을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온 몸에 끈끈히 묻어있는 잠을 떼고 출근준비에 들어갈 그 시각, 터미널에서 맞는 이른 아침의 광주는 왠지 모를 음습한 겨울바람으로 기자를 맞는다.
지난 4월과 7월, 인근 하남공단 내 캐리어를 찾았을 때와는 또 다른 우울함이다. 캐리어사내하청노조도 어려운 조건에서 노조를 만들었지만, 적어도 업체 계약해지가 있기 전에 투쟁을 시작한 까닭에 좀더 치밀한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기아차의 경우, 하청노조가 설립(12월1일) 7개 업체 재계약 거부 방침이 발표(11월28일) 이후였고, 사측의 의도가 하청노동자 정리해고 이후 일부 라인 도급화를 통한 정규직의 고용축소라는 것임을 감안할 때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한 '총고용보장'이라는 더더욱 힘겨운 싸움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생활화로 침울한 광주공장
5분여 걸었을까, 기아차 마크가 새겨진 큰 버스에서 내린 노동자들이 주머니마다 손을 넣고 하얀 입김을 내뿜은 채 횡단보도 신호등만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고, 길 건너 공장 입구에는 "불조심 생활화로 활기찬 광주공장"이라는 플래카드가 내 걸려 있다. 순간, 그 플래카드 문구가 "정리해고 생활화로 침울한 광주공장"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지난 97년 기아차 부도 사태로, 당시 1,500여명의 하청노동자들이 해고되고 500여명의 정규직이 명예퇴직 등의 이름으로 공장을 떠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불거진 해고위협. 올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서 두 경기 연속 홈런을 두들겨 맞았던 야구선수 김병현에게 선물해야 된다고 했던 '기억상실증'은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하나.
오전 7시30분, 하청노조 집행부들이 노동가요를 틀고 집회 준비에 들어가자 어디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4~50명의 관리자들이 정문 바로 안쪽으로 우루루 몰려든다.
승합차 라인 중단으로 일찌감치 해고자가 된 기아차사내하청노조 고재한 위원장은 승합차 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하청노동자 우선 정리해고 방침의 문제점과 정규직-비정규직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오늘 새벽까지 야간조로 일을 했다는 이태영 부위원장과 노조원 7~8명은 토끼같이 빨갛게 충열된 눈을 쉬이 감을 시간도 없이 "정리해고 철회하고 생존권을 보장하라"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친다.
정규직-비정규직 '총고용불안'이라는 그 절박함을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지 없는 지 출근하던 광주공장 노동자들은 힐끔힐끔 쳐다만 볼 뿐 스치듯 공장 안으로 몸을 구겨 넣는다.
"기아자동차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 단계적인 하청업체 정리방침은 단지 비정규직만의 고용불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단종(생산중단)을 앞두고 있는 차량들만 광주공장으로 떠넘겨 온 현대-기아자본은 하청업체 정리에 이어 정규직에게도 정리해고의 화살을 들이 밀 것입니다. 광주공장의 고용불안은 정규직-비정규직 연대투쟁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고재한 위원장의 계속되는 연설. 출근시간이 거의 끝나가 이제 공장안으로 들어가는 노동자들의 발길도 뜸해진 8시10분경, 저녁시간 야간조 출근시간을 앞두고 이제 하청노조원들은 임시 사무실로 쓰고있는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로 발길을 옮긴다.
"내가 대가리 총 맞았소"
"비정규직 정리 이유가 외형적으로는 생산량 감소에 따른 비용절감인 것 같지만 내년 3월경이면 정규직화 의무가 생기는 2년 이상 계속 근무한 자가 발생하는 데 이를 사전에 정리하자는 것과 정리해고 반발 세력들을 색출하려는 것, 이 2가지가 핵심입니다"
고재한 위원장은 내년 생산계획을 올보다 3만여대 늘어난 20만1천대로 잡고 있는 마당에 일시적 수요변동을 이유로 하청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잘라 말한다.
이태영 부위원장은 "광주(공장)는 전망 없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설비도 낡았고 단종된 노후차량들만 이관된 채 신차 생산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제출되지 않으니까 다들 고용불안 느끼고 있습니다. 정규직 인력도 아웃소싱해서 도급형태로 갈 것이라는 거 사람들 다 알고 있습니다"라며 광주공장 전반에 드리워진 고용불안의 심각성을 얘기한다.
그나마 기아차는 12월31일자로 해고되는 7개 업체 370여명을 대상으로 재취업지원센터를 운영한다는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총 12쪽 분량의 '협력업체 사원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 안내'에 따르면, 기아차는 재취업지원센터를 통해 재취업을 돕고 직업능력 향상을 위한 전직교육을 실시하며, 향후 정규직 신규채용이나 2002년1월1일부로 있을 하청노동자 채용시 우선 충원할 방침이다. 또한 일정액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실업급여도 최대한 많은 사람이 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하지만 전직(재취업) 교육이나 실업급여 등은 이미 고용보험을 통해 당연히 지원되는 것이고, 정규직 신규 채용시 인센티브 부여 방침도 현재로서는 회사가 밝힌 신차생산계획에 따라 2년 뒤에나 정규직 채용이 기대되며, LCV 생산 노사합의를 2개월만에 파기한 경우에 미뤄볼 때 정규직 채용도 '과연 채용하기는 할까'하는 의구심만 부추기고 있다.
특히 내년 1월1일 인력 재배치시 부족인원 OO명을 이번에 계약해지되는 7개 업체 사원 중에서 선발한다는 방침 역시 해당자는 2001년12월31일자로 기존 업체에 '사직서'를 제출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어 이전 근무경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얼마 전 (주)캐리어가 '불법적인 파견근로 사용'을 이유로 담당이사 구속된 이후 2년 이상자 100여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한 그 과오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위로금 역시 기본급(56~59만원)에 20만원 가량을 얹어 주는 것으로 100만원에도 못 미치며, 그나마 사직서를 낸 사람에 한해서 지급된다.
공장 북문 앞 출근 선전전
고재한 위원장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포자기 한 사람들이 많아 정리해고에 대한 분노를 한 곳으로 모으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내년 1월1일 재충원 방침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는 지 아세요? '내가 대가리 총 맞았소' 그럽니다. 기본급이 58만원도 안 되고 잔업 특근 다 해서 90만원 조금 넘게 받는데, 다시 이 짓하고 싶겠습니까. 투쟁해서 승리한다손 치더라도 58만원짜리 인생인데..."
광주공장 장기적 생산계획 수립 시급
점심시간(12시30분)을 앞두고 막바지 오전 작업에 분주한 공장 안을 둘러보았다. 물량이 없다는 이유로 18일부터 라인 자체가 서 버린 승합차와 달리 다소의 물량을 확보한 소형차 라인은 그나마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올 12월31일이면 실질적인 해고상태에 놓인 승합차 라인 200여명의 하청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소형차 라인에서도 150여명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
올 연말이면 같은 라인에서 2명의 하청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한 정규직 노동자는 "마음이 무겁죠 뭐. 한솥밥 먹던 사람 중에서 하청이라고 먼저 나가야 하고... 안 그래도 내일 저녁에 소주 한 잔 하기로 했어요"라고 담담히 말한다.
옆자리의 다른 노동자는 왠지 그런 속내를 비치기 싫은 듯 "저는 할 말 없어요"라며 묵묵히 작업에만 열중한다. 하지만 그도 "하청들이 짤려 나가면 그 다음 수순은 정규직 아니겠느냐"는 질문에 "일단은 전환배치 되어서 일은 하게 되겠지만... 그 다음은 저도 몰라요"라고 한숨을 쉰다.
내년 6월이면 단종돼 라인 자체가 없어지는 타우너 라인에서 기자는 가슴에 '기아자동차'가 아닌 '(주)OO' 마크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있던 앳된 얼굴의 한 하청노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요즘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착찹합니다"
"연말에 정리되는 7개 업체 중 하나에 소속돼 있습니까?"
"다행히 저는 이번이 아니라 내년 2월쯤에나 짤린다고 하더라구요"
"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하청으로 입사하셨을텐데..."
"2년이 넘어야 정규직이 되는데, 그 때까지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어떻게 일 하겠습니까"
"이후 대책은 어떻게 잡고 계시나요"
".... 모르겠어요. 먹고 살 길 찾아야죠"
그 하청노동자 옆에서 같은 라인 작업을 하던 정규직노동자는 마침 전 조남일 집행부 때 고용부장을 지냈던 유주열씨였다. 유씨는 "소형차 라인은 그래도 물량이 많아서 주간조는 잔업도 하고 있지만 하청노동자 정리해고 방침에 (고용이) 불안하기는 정규직도 마찬가지"라며 "광주공장의 장기적인 생산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야, 캠코더 뺏으러 가자"
한숨과 침울함 가득한, 라인 돌아가는 소리와 무슨 노래인지 알 수도 없는 음악소리가 섞여있는 공장을 빠져나오면서 기자는 더욱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시인 도종환은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고 했던가, 하지만 기아자동차에서 나는 어떤 희망의 싹을 보았나"
잠시 들른 정규직노조 고충처리위원회 사무실. 점심식사를 마친 조합원 몇몇이 난로를 쬐며 "오늘은 인력관리부 애들이 나왔네"하며 식당쪽을 바라본다. 점심시간에 맞춰 하청노동자들이 식당 앞에서 매일 진행하는 선전전을 막으려고 현장 관리직들이 나왔는데 오늘부터 인력관리부로 책임이 바뀌어진 모양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한 컷'. 순간 하청노조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다말고 인력관리부 소속 직원 몇몇이 고충처리위 사무실 앞으로 뛰어와서 기자를 노려본다. 캠코더로 그 장면을 담으려고 했던 걸 보았나 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을 포착한 인력관리부 직원 한 사람이 "야, 캠코더 뺏으러 가자"고 소리치며 달려온 것이다.
물론 노조 고충처리위 사무실 안이라 들어와서 캠코더를 빼앗지는 않았지만 하청노조의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 한 번 확인케 하는 대목이었다.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http://www.newscham.net/data/coolmedia/0/KakaoTalk_20180411_120413041_copy.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