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진상 규명위원회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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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1과


1. 사건 조사 경위
이내창 사건은 2000년 12월 28일 유가족 이내석(이내창 형)과 이내창 열사 사인진상규명을 위한 범중앙인비상대책위의 장임원 교수(현 보건진흥원 원장) 외 9,600여 명의 연서명을 첨부해 진정 접수하였다.
진정인들의 제기한 진정 요지는 다음과 같다(구체적인 내용은 접수시 제출한 자료집 『의문의 죽음, 그리고 10년』 참조).


*이내창은 중앙대(안성)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산하 수대협 의장권한대행 및 전대협 대의원 활동을 하면서 전대협 주최 각종시위 참석 등으로 인해 공안기관의 요시찰 대상이었던 상태에서 임수경양 방북파트너로 중앙대(안성)생 강동윤이 선정되었던 사실과 이내창도 한때 임수경양 방북파트너 후보자로 선정된 적이 있었다는 소문과 관련하여 공안기관의 예의 주시를 받고 있었던 상태에서

*임수경양 방북과 함께 전국민족미술운동연합(민미련)이 민족해방운동사 대형 걸개그림을 압축한 슬라이더를 제작하여 북에 밀반출한 사실에 대해 당시 공안기관이 미술운동을 빙자한 국내 간첩조직으로 기획했던 민미련 조직사건 일명 홍성담 사건과 관련하여 이내창이 민미련 산하 청년학생미술운동공동체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미련 산하 미술운동 단체인 가는패 조직원 이태구(중앙대8 4, 89. 8. 10. 노량진경찰서 구속) 등과 함께 문제의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을 같이 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을 중앙대(안성)에 먼저 전시한 것과 민미련 핵심조직원 차일환(중앙대 80)이 89. 8. 6. 안기부에 구속되었을 때 안기부 인천분실 고위급 직원이 걸개그림 제작에 대한 자금 출처를 캐묻는 과정에서 중앙대(안성) 총학생회장 이내창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89년 문익환 방북, 전교조 결성, 전국 대학교지의 주체사상 특집, 이철규 사망 등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공안당국에서는 학생운동을 북한에 동조하는 반체제세력으로 판단해, 불순세력의 전모를 밝히는 데 총력을 기을였으며, 전대협의 핵심 간부이고, 여러 사건에 개입 여지가 많은 이내창이 공안기관의 광범위한 내사를 받았을 개연성이 높으며, 이내창이 공작 대상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으로

*이내창은 1989년도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동년 8월 14일 중앙대 안성교정 미대 실기동에서 이내창을 찿는 신원 미상의 남녀 2명의 방문을 받은 후 동일 학교에서 안성읍까지 3회나 왕복하는 등의 기이한 행적을 남기고 다음날인 8월 15일 거문도 덕촌리 소재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는 바

*동 변사자 이내창은 중앙대 안성교정 총학생회장과 수원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 권한대행으로 8월 15일 전민련 주최의 민족해방기념식 집회, 8월 16일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의와 등록금협상을 위한 중앙대총장 면담, 8월 17일∼18일 총학생회 집행부 MT 등의 일정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의문의 거문도 행을 하였다는 점에 따라 거문도 행 동기를 밝혀 달라는 것과

*당시 학생조사단과 전직 한겨례신문 이공순, 오룡 기자 등이 수소문 한 결과 이내창의 거문도 행에 동행인이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에 의해 안기부 인천분실에 근무하는 A씨와 남자친구 백○○이 이내창의 동행인으로 밝혀졌으나, 수사기관의 계속되는 조사과정에서 목격자들의 최초진술이 부인되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이내창의 거문도 행에서의 동행인 존재여부와 사망과의 관계를 밝혀 달라는 것과

*이내창의 사체상태가 상체에 상의가 없는 점, 하체 바지에 혁대가 없는 점, 사체에 나타난 다발성 상처가 실족에 의한 찰과상이 아니라 피하출혈을 동반한 타박상이라는 점 특히 우측 전두부에서 발생한 3×2㎝ 크기의 두피 박탈을 동반한 12×6㎝크기의 전두부 골절은 가격에 의한 중상이라는 점 등에 의해 수사기관이 결론지어 발표한 실족에 의한 단순익사보다는 타살의 개연성이 높음으로 사망원인과 정황을 밝혀달라고 본 위원회에 진정했다.

위원회는 이 진정 내용을 바탕으로 한 달여의 기초조사를 거쳐 진정인 주장에 상당한 개연성이 있음을 확인, 2001. 1. 20.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후 위원회는 1년여 기간 동안 약 600여 명의 거문도 현지 탐문 및 주민 면담을 실시해왔고, 이를 바탕으로 사건 현장인 유림해수욕장 바다의 부유물 실험, 승선자, 동행인, 목격자, 학생운동 관계자 등 사건 관련자 200여 명의 면담 및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2. 89년 수사 결과

여수경찰서에서 1989. 11. 17. 작성한 중앙대생 이내창 변사사건 수사결과 기록에 의하면, 변사자 이내창은 중앙대(안성) 총학생회장으로서 1989년 8월 등록금 동결문제, 총장 직접 선출문제, 학생회 간부 하계수련회 개최 등 학내 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아 혼자 계속 고민 끝에 괴로운 심정에서 학생회 업무를 일시 떨쳐버리고 무작정 하절기 피서지인 거문도 여행을 택한 후 동년 8월14일 밤에 안성에서 단독으로 야간 교통편(평택에서 야간열차 편으로 추정)을 이용 출발. 15일 새벽에 여수에 도착하여 15일 08:00 여수항 여객선터미널에서 거문도 행 신영고속훼리 호를 타고 동일 12:50경 거문항 도착. 14:00경 거문도 희망식당에서 점심식사 후 15:30경 거문리 선착장에서 나룻배를 타고 유림해수욕장 쪽 연륙교 공사장 제방에 하선하여 약 750m 떨어진 유림해수욕장까지 걸어간 후 다시 동쪽으로 해안을 따라 약 200∼250m 지점인 암석해변을 걸어가서 무더운 날씨에 직경 2∼5m 되는 미끄러운 암석 위를 오르내리다가 왼발이 미끄러져 실족추락하면서(실족 추락 지점은 사체발견장소에서 동쪽으로 250m 떨어진 험한 암석지점으로 추정됨) 좌전하부와 좌우주부(관절부) 등을 넓은 암석에 강열하게 충격함과 동시 3m나 되는 높은 파도에 휩싸이면서 두전부, 전액부, 사지 등을 다른 암석 등에 경하게 충격하면서 바닷물 속에 빠져 질식 사망한 후 심한 파도와 바람 및 조류에 의해 사체발견장소로 표류된 것으로 사료됨.


3. 사건 조사 내용

사건 당시 거문도에 존재한 기관원에 대하여

1989년 8월 13일부터 서울시경 형사라고 하는 두 명의 남자가 유림해수욕장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스총과 수갑을 소지한 채 8월 15일까지 텐트를 치며 유림해수욕장에 계속 있었으며, 8월 16일 아침에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과거 여수경찰서 수사기록에 의하면 조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목격 진술에 포함 8월 15일 아침에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또 8월 15일 대전경찰서 형사라고 자칭한 5명이 거문도에 들어왔다. 이들은 유림해수욕장이 위치한 섬인 서도에 체류한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여수경찰서에서는 이들에 대한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내창이 탄 배에는 감시자가 있었는지에 대하여

89년 여수경찰서에서 확인한 선상 목격자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은 아직까지 이내창에 대해서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내창은 매우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으며, 자신이 초도에 내릴 때까지 계속 누워 있었다.”

그러면서 이내창과 이내창을 주시했던 감시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저희가 앉아 있던 바로 옆 건너편에 40대 중, 후반으로 보이던 남자가 있었는데, 당시 그 사람들은 관광객이나 피서객의 복장도 아니고 농어민이나 섬 사람의 모습도 아닌 웬지 공무원인 듯한 냄새가 나는 스타일의 사람들로서 그 중 2명은 누워서 자는 듯한 행동이었고, 1명은 자리에 앉아서 우리가 있는 쪽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누워서 갔던 남자들이 계속 누워만 간 것이 아니라 가끔 가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있었는데 주시하던 1명의 남자와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때는 귓속말로 얘기할 때도 있었고 주시하던 1명의 남자가 자리를 비우거나 할 때에는 대신해서 이쪽을 주시하거나 서로 같이 주시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쪽을 계속 주시하니까 신경이 쓰여 그 사람들의 동태를 알게 된 것입니다.”

김○○은 거문도 전 초도에서 하선했는데, 이후에는 배 난간에서 이내창 혼자 소주 1병을 마신 것으로 확인되었다.


거문도에 도착 직후 행적에 관하여

이내창은 12시 50분 배에서 하선해, 선착장을 빠져나와 마을이 형성되는 초입의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서, 민박집에 들어간다. 이 민박집 주인 할머니의 아들 진술에 의하면 “학생풍의 젊은 사람 1명이 쫓기는 듯한 겁을 먹은 표정으로 방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마루에 올라와 방을 가르켜줬으나 쳐다보지도 않고 뒷문이 있느냐고 질문을 해 가르켜 줬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급하게 뒷문으로 나가 어리둥절하게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 후 다음날쯤인가 죽은 학생이 그 사람이더라 라는 말을 하여 …… 죽은 학생의 사진을 보았을 때 그 사람과 같이 생겼다라는 말을 저의 처와 함께 들어 정확하게 기억이 납니다.”라고 한다.

이 진술은 89년 당시 가족회의에서 복잡해질 것을 두려워해 묻어두었으나, 위원회 조사관과의 몇 차례 대화 속에서 과거 사실을 밝히겠다고 한 것이다. 목격 당사자인 주인 할머니는 현재 사망했지만, 당일 오후에 그 사실을 들은 아들과 며느리의 진술이 확보되어 있다. 주인 할머니는 다음날 사체 사진을 보고는 숨겨주지 못해 죽었다고 안타까워했으며, 할머니와 친하게 지냈던 김00 아주머니도 동일한 내용의 얘기를 들었다는 진술을 확보한 상태이다.

이내창과 동행 사실 여부
89년에 안기부 직원의 동행 여부의 핵심이었던 안기부 여직원과 이내창이 삼호다방에서 차를 마셨느냐의 여부는 다방 종업원의 진술 번복으로 종결지었다. 다방 여종업원은 현재 과거의 진술 번복은 너무도 많은 사람이 질문을 해와 피하고 싶어서였다는 것이고, 자신이 진술한 첫번째 진술이 사실과 같다라고 하며, 이내창과 안기부 여직원 A씨의 사진을 제시하자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였다.

“주로 여자가 얘기를 하였는데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듣기만 한 거 같은데 …… 여자가 서울 말씨를 써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한편 죽은 학생과 여자가 얘기할 때 안을 쳐다보면서 기웃거리는 남자 한 분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자가 돈을 주고 나간 후 이내창과 여종업원이 차를 마셨는데, 요구르트를 마셨다고 한다. “저와 죽은 학생이 차를 마실 때 먼저 나간 여자와 남자 1명은 다방 밖에서 죽은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차를 마시는 중에도 죽은 학생은 출입문 밖에서 기다리는 남녀를 의식한 듯 가끔씩 뒤돌아보고는 하였습니다.” 이후 이내창은 기다리던 남녀 2명과 여객선터미널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안기부 여직원과 대질심문 때 왜 아니라고 했느냐는 질문에 “지금까지 시달려왔는데 지금에 와서 그 사람이라고 하면 저도 어떤 피해를 또 입을지 모르고, 그 여자 분도 어떠한 피해를 입을지 몰라 아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라면서 자신의 이 진술이 진실이라고 하였다.

덕성호를 타고 유림해수욕장으로 갈 당시의 상황

덕성호 선장은 자신이 태워준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내창이 분명하며, 나머지 두 남녀의 인상착의는 현재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이내창과 남녀 2명이 있었는데 이내창이 사진도 찍어주어 3명이 동행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 3명이 유림해수욕장으로 걸어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 자신은 그 날 밤 사체 발견지점으로 가서, 자신이 태워준 학생임을 확인했고, 이 학생이 생전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고 해, 삼산지서 순경이 주머니를 뒤져 학생수첩의 사진을 꺼내, 신원을 확인했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동행인 두 사람을 찾으러 다녔으며, 17일 거문도 선착장에 나갔다고 진술했으나, 그때 두 명의 동행인을 자신이 지목했는지는 현재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동행인 친구인 C씨, D씨의 진술에 의하면, 17일 선착장에서 대기한 형사들이 A씨와 B씨를 지목해, 데리고 갔다고 한다. 또 덕성호 선장이 선착장에서 지목했다는 목격자도 있으며, 당시 A씨와 B씨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덕성호 선장뿐이었다.

유림해수욕장 실족 추정 지점 상황에 대한 목격 진술

15:30 이내창과 남녀 2명이 유림해수욕장으로 건너간 후 16:00경 유림해수욕장에서 야영을 하던 김○○과 이○○은 배탈이 나 인적이 없고 바위가 많은 암석지대로 간다. 가는 길에 남녀 2명이 있었는데 인상착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며, 쌍바위 지점에서 또 몇 사람을 봤는데 이들도 기억이 없다고 한다. 어쨌든 사람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암석지대 안쪽 돌출부위 부근에 두 남자가 서서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은 너무 급해 바닷가 바위 안쪽으로 들어갔고, 이○○은 지나쳐서 위로 더 올라갔다. 자신들이 일이 보고 나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용변을 볼 때 본 사람은 남자 두 사람이었습니다. 남자 한 명은 긴팔소매가 있는 흰색 계통의 상의를 입고 있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검은색 계통의 긴 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영훼리호를 타고 올 때 이내창과 함께 있었던 김○○의 진술에 의하면 이내창은 흰색 계통의 긴팔 상의를 입고 있었으며, 사체 발견시에는 상의가 벗겨져 없어진 상태이다.

18:00경 거문도 주민 박○○은 체육대회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유림해수욕장으로 들어오면서, 오늘은 얼마나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이때 암석지대에 남녀 2명이 목격되었다.

“유림해수욕장 초입에서 피서객이 몇 명 정도나 있는가를 살펴보는 도중 건너편 암석지대에 사람들이 있어서 보았더니 서 있는 여자 한 명이 밑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남자는 무엇인가를 찾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 이빨을 닦는데 자신이 운영하는 매점 앞에서 카메라를 맨 25세 가량의 검정색 계통의 상의를 입은 남자가 사체가 떠밀려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지나갔다고 하며, 자신은 그래서 사체가 밀려온 곳으로 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안기부 직원의 알리바이에 관하여(아래 사진 참조)

여수경찰서 수사 기록에 의하면 먼저 놀러와 동도에 있던 친구들이 2시에 거문리선착장으로 마중나와, 매점에서 컵라면과 맥주를 하고 거문초등학교로 올라가 잠시 놀다가 영국군 묘지에 갔고, 이후 해안가로 가서 각자 사진을 찍고는 거문도 선착장으로 왔다라고 되어 있다.

먼저 놀러왔던 C씨, D씨는 동도에서 기다린 것이지 마중 나가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C씨는 “A씨, B씨가 거문도에 들어오는 날 ○○이 집이 있는 동도에서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D씨는 “○○의 집이 있는 동도 죽촌리 선착장에서 기다렸는데, ○○이 기다리던 도중 다이빙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먼저 놀러온 친구들은 과거 수사결과와는 다르게 영국군 묘지에 놀러 가기는 했는데 언제 누구와 갔는지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 8월 15일 일행 4명이 영국군 묘지에서 내려와 해안가에서 각자 독사진을 찍었다는 사진을 보면, A씨, B씨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이고, C씨, D씨의 사진도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이다. 즉 두 사진의 시간대는 A씨, B씨는 18시경, C씨, D씨의 사진은 13시에서 14시 사이로 동일한 날짜라 하더라도 약 4시간의 차이가 있다.

과거 수사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3시 40분경에 해안가에 갔고, 약 40분간 체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진의 그림자로 보면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각기 따로 간 것이거나, 다른 날 다른 시간대에 간 것이다.





실족 추정 지점에서 익사할 가능성

여수경찰서 수사 결과 실족 추정 지점은 쌍 바위에서 돌출 부위 사이 암석 지대이다(사체 발견 지점에서 약 250m 지점). 이 지점에 대한 6 차례에 걸친 위원회 현장 조사 결과 여수경찰서가 수심을 3m 이상이라고 측정한 것과는 달리 실제 1.5m 미만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동지점에서의 바위 상태 또한 전혀 미끄럽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여수경찰서가 추정한 것처럼 동지점에서 실족하여 바닷물에 빠졌다고 가정해 보아도 동지점에서는 해수면 위로 돌출되어 있는 주변 바위들로 인해 수영을 잘하는 이내창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지점이었다.

여수경찰서에서는 수사결론으로 실족시 바위에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고 가정하였는데 동지점의 바위상태는 모난 데가 없이 전부 둥글둥글하여 대한외상학회에 의뢰한 감정에 의하면 실신에 이를 정도의 중상으로 나타난 12×6㎝ 크기의 두피박탈 및 피하출혈을 동반한 우전두부 손상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임에 따라 동지점에서는 실족 익사가 어려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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