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박정희 기념관 '도둑' 건설현장]공사 표지판도 없이..

6백50평 규모 2층건물 국민혈세 2백억 지원..이문옥 서울시장후보 "선거기간 문제삼겠다"

정경섭 jks@kdlpnews.org
길을 잃었다. 출발하기 전에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에 전화를 걸어 ‘박정희 기념관’ 신축 공사 현장 위치를 받아 적을 때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월드컵경기장 전철역에서 내려 서부운전면허시험장 옆”에 있다는 설명.

그런데 없다. 눈을 이리저리 돌리니 공사현장이 보인다. 걸어서 10분. 그런데 ‘가양대교북단연결 공사현장’이라고 써있다.

“여기가 아니고 저쪽으로 가면 있을 거요. 나도 얘기만 들었는데 저쪽 어디서 공사하고 있다던데….” ‘가양대교 공사현장’ 노동자인 김수정(66)씨가 기자에게 길을 설명하고는 “기념관 짓는 것이 뭐 나쁘냐. (박정희의 아들)박지만이가 마약은 했지만 저 혼자 망쳤지 누구 등쳐먹지는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아들처럼 나라 망치지는 않았다. 훨씬 나은 지도자가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걸어서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에 도착해 길을 물었다. “저리로 쭉 가면 있어요. 표지판도 없이 공사를 하더만요.” 식품점을 운영하는 40대 아주머니는 재미있다는 듯 얘기하고는 그 이상의 말은 아꼈다.

박정희기념관 공사현장(사진 쩖)에는 정말 아무런 표지판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는데 “상암지구(2·3공구) 택지조성 공사”라는 표지판이 커다랗게 있었다.(사진 ②) 상황이 이 정도면 길을 못 찾을 만도 하다.

기자가 공사현장을 찾은 날은 비가 흩뿌리는 궂은 날이었다. 비오는 날은 공사를 하지 않는다. 칸막이가 사방으로 처진 공사현장에 들어서니 작은 글씨로 ‘기념관 신축현장’이라고 쓰여있다. 여기가 박정희 기념관 공사현장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내년 3월 완공될 예정인 박정희기념관은 언론에서 수차례 보도된 것처럼 지난 1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기념관에 대한 찬반논란을 의식한 탓인지 언론에 보도자료 한번 내지 않고 기습적으로 단행된 공사였다.

서울시는 6백50평 부지에 2층 건물이 들어설 예정인 박정희 기념관이 지어질 토지를 무상으로 임대했으며, 국가에서는 2백억원의 세금를 지원키로 2000년 정기국회에서 결정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공사규모는 2천5백평 부지에 7백억원을 들인다는 것이었는데 박정희기념사업회에서 장담했던 5백억원의 민간모금 목표액이 목표치를 훨씬 밑도는 16억원에 그치면서 부득불 공사규모가 축소됐다. 결국 민간주도 사업으로 시작하겠다던 기념관은 전적으로 국고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국민적인 합의는 관심 밖.

기초공사만 진행된 공사장 왼편에 관리사무소가 있었다. 기자는 문을 열고 들어가 “취재협조”를 부탁했다.
“최근에 언론사에서 많이 왔어요. 시공사 입장에서 뭐라고 드릴 말은 없습니다.” 시공을 맡은 태영개발 공무과장은 “난처한 입장”이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공사 표지판은 왜 없는거죠”, “없을 수도 있는 겁니다”, “상암지구(2·3공구) 택지조성 공사라는 안내판은 왜 붙어 있습니까, 제가 보니까 택지조성 공사는 저 너머에서 하고 있던데요”, “글쎄요, 왜 그게 붙어있는지…”,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

386세대라고 밝힌 공무과장은 “개인적인 입장이야 따로 만나서 얘기할 수 있지만 공적인 입장은 말할 처지가 아니”라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무실 칠판에 적힌 ‘민족문제연구소 4월 18, 19일 집회’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시공사로서는 공사를 하면서 반대집회까지 신경써야 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시민 강성근(46·용산구)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를 동시에 전시한다면 역사에 교훈이 되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그렇지만 과연 박정희의 ‘과’가 이곳에서 전시될 수 있을까.

서울시와 박정희기념사업회간에 체결된 협약서를 살펴보면 해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협약서에는 건축을 위해 갑(서울시)은 을(박정희 기념관 사업회장)에게 필요한 토지사용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을은 건물을 완성함과 동시에 시설 일체를 갑에게 기부하고, 대신 을은 모든 시설을 전담, 운영, 관리하며 건축물 명칭은 건립목적과 용도에 맞춰 을이 정할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재미있는 건 공사비용으로 절대 금액을 국민의 세금 2백억원으로 충당하는데 겨우 16억원을 모금한 기념사업회가 기부하는 형식이라는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왜곡된 역사를 만드는 세력이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라며 “문제는 ‘왜 진보세력들이 이 문제를 방기하고 있느냐’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문옥 민주노동당 부패추방운동본부장(당 고문)이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한다. 이문옥 후보는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이문옥 후보가 “서울시장선거를 통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문제를 적극적으로 이슈화시키겠다”고 밝힌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박정희기념관 공사현장 길 건너에는 잘 조성된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걸어서 15분은 족히 될 정도로 넓고 아름답다.

전태일 분신터에는 낡은 동판만 놓여있다. 박정희 정권시절에 모진 탄압을 받고 산화해간 영령들이 아름답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서 쉴 수는 없는 일이었을까.
[ 86호] 5.6 ~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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