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 근접 촬영, 총파업 속의 일상 - 바쁜 사람들과 한가한 사람들-

유명한 선배급 활동가,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고 개인이 되고, 패잔병이 된 우리. 그 속의 나는 파업 기간 내내 언뜻 남의 불륜 현장을 본의 아니게 본 느낌이라는 내 이 기분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김영희(노동자의 힘 회원)


2월 24일·2월 25일

아직도 2월 24일 밤 명동성당 주변의 분주함을 잊지 못한다. 쉼없이 터지던 카
메라 플래쉬, 시민인지 신도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지천에 깔린 사
복경찰, 대열지어 목석처럼 서있던 정복경찰들, 총파업 대오가 불어대는 환청
으로 들리던 차량 통제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총파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빠
른 발걸음으로 오가던 사람들.
동일한 시간 명동성당 안에서의 초조함과 적막함 또한 지워내려 해도 지워지
지 않는 모습이다. 어두웠다. 명동성당 가장 깊숙한 곳에 침낭 몇 장과 가벼
운 옷차림만으로 줄줄이 서있던 철도노조, 발전노조, 가스노조 3사의 투쟁지도
부들. 그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끔 담배를 피울 때마다 초조한
얼굴이 보였다 사라졌다. 담배 빠는 그 순간 작게 떨리고 있던 손가락도 함
께. 이렇게 총파업은 준비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서울대와 건국대는 3사 조합원들의 함성과 열기로 달아올랐다. 적
어도 이곳은 이미 총파업은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 25일 새벽
4시. 김 재길 철도노동조합 위원장의 총파업 돌입 투쟁명령이 떨어지기 직전까
지 국가기간산업 3사 동맹파업이 성사될 것이라 믿었던 사람은 적어도 '명동에
는' 분명 없었다. 김 재길 위원장과 모두는 명동성당 공간에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계획되지도, 같이 준비되지도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기대고
있던 각자의 파업이 이렇게 '3사 동맹파업'으로 묶어진 건 정말 수수께끼다.
25일 새벽을 가까스로 넘기자 가스노조의 타결소식이 어수선한 명동을 휘젓고
다녔다. 총파업 투쟁명령 이후 두 번째 고비였다. 가스노조 집행부와 전화통화
를 했다. 첫 번째 전화통화내용은 '사실무근'이었고 거듭된 유언비어(?)에 시
도한 두 번째 전화통화 결과 '지금은 머리가 아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말
을 들었다.


깜짝쇼인가, 선무당이 사람 잡는가

4시5분이 넘어서라도 철도가 타결될 수도 있기에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다. 이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 서로들 우왕좌왕하며 농담도 아니고 정식발언도
아닌 이야기들이 어지럽다. "이게 뭐냐, 발전이 정말 파업에 들어 간 거냐, 무
슨 파업을 깜짝쇼처럼 하냐,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더니 원." 그 말들을 그냥 이
어보면 이런 것들이리라. 발전은 안중에도 없다.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공공이
나, 민주노총이나, 공투본이나 모두 철도만 바라다보았다. 거들어볼 관계가 아
닌 사람들은 그냥 서있을 수밖에. 공투본 상황실장인 오 아무개는 전체 상황
에 대해 정말 아는 게 없는 듯 했다. 상황을 제대로 설명조차 못하고 있으니.
먼동이 터오자 명동성당에서는 이런저런 불만이 터져 나왔다. '너무 추웠
다', '먹을 것이 부실하다'. 우리들은 부지런히 날랐다. 공수가 절대 임무였
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며 대접받는(?) 이들은 '역사적 파업을 했는데
잘 좀 해 줘야지, 왜 이리 부실하냐'는 표정이다.
나중에 전화로 들은 이야기지만 같은 시각 서울대와 건국대에서는 질서정연하
게 줄을 맞춘 조합원들이 식사배급을 받으며 찬밥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의 얼굴은 밤새 추위와 흥분으로 못 이룬 잠 때문인지 푸석푸석해 보였지만 자
신들이 이루어낸 '역사적 사실' 때문인지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솔직히 나중
에 동영상을 봐도 그렇다.


2월말에서 너무 긴 3월 한달, 그 첫 번째

기간 산업 3사의 공동투쟁을 겪으면서 가장 '진실한' 지지자는 명동 주변의 음
식점 주인들과 술집 주인들이다. 그들은 투쟁을 조기에 끊어내려는 김대중 정
부의 방침과 입장을 가장 싫어했고 파업지도부와 조합원을 잡아 가두는 경찰
을 가장 미워했다. 그들은 발전조합원들이 38일간 싸우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
이 그 투쟁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되 뇌였고 명동성당을 오가는 사람들
이 많아질수록 주류도매상들의 차량방문(?)도 잦아졌다. 그들은 계산대 앞에
서 웃으며 우리에게 기운을 내라고 말했고 향후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우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속상해 했던 것은 명동
성당으로 음식배달을 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다. 생맥주와 닭고기 장사를 하던
한 사람은 전경에 의해 배달이 제지당하자 망연자실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
다. 그 표정에는 '고객의 배달주문을 지키지 못한' 난감함이 묻어나고 있었
다. 그러나 그들이 정부의 발전소 매각방침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은 '진실한' 지지자였다.


2월말에서 너무 긴 3월 한달, 그 두 번째

'시작하는 것보다 정리하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2월
24일 총파업 투쟁이 시작된 순간 정리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
지만 잘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시작된 싸움을 강화, 발전시켜내는 것이 더 중요
하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싸움에 모든 혼을 집중해야 한다. 허나 사실 생
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지 못했던 바를 반성해보면 나의 동의는 적극적인 동의
가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기간산업 3사의 동맹파업 성사와 가스, 철도노조의 연이은 협상타결, 발전노조
의 38일 산개 대중파업이 지속되는 동안 명동과 향린교회를 드나드는 모두는
로얄 호텔의 동향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도 총파업 기사가 조간신문 1면에 실
리지 않은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던 모습은 부끄럽지만 글로 옮겨야만 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또 있다. 3월 24일. 발전조합원들이 경찰에게 얻어터지고 쫓겨다니던 그 시
간. 명동의 '진실한' 지지자들은 계속 웃고 있었다. 범대위 사무실에서 민주노
총 임원 한 명은 신고 있던 양말을 빨아 널거나 TV와 참세상 속보를 기다렸
다. 모두 연세대로 가서 함께 얻어터지고 쫓겨다닐 필요는 없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양말을 빨아 널면서 오늘의 외출은 더 이상 없을 것임을 공공연하게 드
러내는 것보다는 그 국면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당장 어떻게 대응할 것인
가, 공공연한 토론과 평가와 대안 조직을 누군가는 해야 했다.
당시 이호동위원장 역시 파업을 접어야 한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조합원
투표도 준비했으니. 중요한 집회였고 중요한 투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경찰과
대치하며 화염병이 오고 갔다. 그러나 범대위 사무실에서는 양말 빨고 술 먹으
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날따라 전 지구당에서 많이 참가한 민주노동당 당
원들이 권영길 대표와 함께 범대위 사무실로 몰려왔다. 연행자도 많았던 듯 하
지만 어디에선가 '향린교회 가면 잘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인지, 투쟁 현장
에 참여하고 힘차게 지지방문 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술자리 광경과 서로 마
주쳤던 것이다. 모두들 민망해 하며 얼굴 맞추지 못하고 술병을 치운다.
결국 3월25일 폭력만행 규탄집회는 '조직한 지도부가 없는 관계로 조직된 조합
원 없이' 치러졌다. 갑작스레 소집된 단체사람들, 발전조합원이지만 밝히지 않
고 있는 조합원들 모두 포함 한 50명뿐이다. 파업 와중에 벌어지는 '집회투
쟁'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어제 밤 민망해 했던 임원은 사진기자 앞에서는 정
말 유창하게 발언한다. 물론 기자들 역시 열심히 찍는다. 파업투쟁의 역사적
기록을 위해서. 그러나 무엇이 과연 파업의 기록인가.


4월은 잔인한 달 - 4월2일 이후

삐딱하지 않게 말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중심에 놓고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투
쟁이 한창 진행될 때는 '내'가 중심이고 투쟁이 끝난 이후 '나'는 쏙 빠져 버
린다. 그리고 다른 사건들과 다른 원인과 이슈와 헤프닝과 잡담과 농담 기타
등등의 곁가지 속에 숨어버린다. 상수는 빠지고 변수를 가지고 이야기하거나
변수를 상수로 바꾸어 버린다.
파업이 중단되자 견고하게 조직된 산개(투쟁) 대오였던 발전조합원들이 '개
인'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진실한 지지자'들도, 로얄 호텔을 드나들던 사람들
도, 나도 '개인'이 되었다. '개인'화된 발전조합원들은 무장해제와 실질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탄압에 놓이게 되었고 '진실한 지지자'들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진실하게 살고 있으며 로얄 호텔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몇 년
간 호텔을 들를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명동에 상주하는 경찰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한매일 레간자, 친숙한 한겨레 보도차, KBS 방송차등 늘 서있던 자
리가 텅 비었다. 꼭 내 고향 마을 '5일장이 끝난 뒤의 쓸쓸한 전경'이다.
유명한 선배급 활동가,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고 개인이
되고, 패잔병이 된 우리, 그 속의 나는 파업 기간 내내 언뜻 남의 불륜 현장
을 본의 아니게 본 느낌이라는 내 이 기분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요즘말
로 '야 구리다'라고나 할까.
어처구니없는 노정합의인지 양보교섭인지 그 지랄 같은 교섭이후 '동지는 간
데 없고 쓰레기만 나뒹구는' 그곳을 나도 빠져 나왔다. 내 현실과는 반대래 머
리 속으로는 '질서정연한 퇴각'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며…. 그날 한밤동
안 난 술을 먹었다. 가난빈주능상득(家雖貧酒能常得. 집은 비록 가난해도 술
은 늘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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