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권에 의한 심판과 비례대표제의 파괴력

정병기(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기획실장, 노동자의 힘 회원)

6월14일 밤거리는 대형승용차와 트럭 위에서 개선 장군처럼 환호하는 청년들과 태극기를 어깨와 허리에 두르거나 기수처럼 휘날리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청년들로 가득 찼다. 그들의 붉은 가슴에는 한결같이 'Be the Reds'가 선명하게 써 있었다. 붉은 색은 슬라브어로 아름다움을 뜻한다. 누군가는 '붉은 악마'로부터 레드 콤플렉스가 사라지는 모습을 상상한다지만, 지방선거 결과는 레저스포츠적 향락계층의 단면을 보여 주는 듯했다. 48%의 낮은 투표율은 한나라당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애국심'으로 치장된 16강의 광기는 대중적 '반미' 감정을 보수주의로 왜곡시켰다. 그리고 붉은 악마와 월드컵 열기는 홍3의 비리로부터 국민들의 눈을 돌리려 했던 민주당과 정부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6·13 지방선거는 모든 정당과 정치관심층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일대 사건이었다. 민주당은 혼란에 빠져들고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후보직에 대해 재신임을 받겠다고 하며 최고위원들은 총사퇴를 준비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역풍을 조심하며 말을 아낀다. 자민련의 정치적 자연사가 예고되고 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입을 즐긴다.

민주 참패와 한나라 압승, 자민련 몰락과 민주노동당 약진

6·13 지방선거의 결과는 한마디로 민주당의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승, 그리고 자민련의 몰락과 민주노동당의 약진으로 요약될 수 있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1998년에 비해 두 배 이상의 후보자들을 당선시킨 반면 민주당과 자민련은 각각 2곳과 3곳을 상실하였다. 기초단체장 선거는 더욱 심한 차이를 보여 민주당과 자민련이 각각 절반으로 줄어든 반면 한나라당은 배가되었다.
민주당은 또한 서울, 인천, 경기 등 주요 지역에서 고배를 마셨는데, 이는 특히 광역의회 의원 선거에서 심각하게 나타났다. 세 지역에서 모두 민주당은 교섭단체 구성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전국적 의석점유율을 보면(<표 2>), 한나라당이 68.5%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보였고 민주당은 21.0%, 자민련은 4.8%에 불과했다. 정당명부 득표율도 한나라당이 52.5%를 보인 반면 민주당은 29.1%에 머물렀으며 자민련은 의석배분을 위한 봉쇄조항수치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는 민주노동당이 정당명부투표에서 8.1%를 획득하여 제3당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진보정당 등장의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표1> 2002년 각급 단체장선거 결과 (명)
소속/광역단체장(1998,2002)/기초단체장(1998,2002)
한나라당/6,11/74,140
민주당/6,4/84,44
자민련/4,1/29,16
민주노동당/0,0/0,2
무소속/0,0/44,30
합계/16,16/231,232

<표2> 2002년 지방선거 정당별 광역의원 구성과 정당명부 득표율(명,%)
소속/광역의회의석수(의석점유율)/비례대표의석수(득표율)
한나라당/467(68.5)/36(52.5)
민주당/143(21.0)/22(29.1)
자민련/33(4.8)/4(6.5)
민주노동당/11(1.6)/9(8.1)
미래연합/2(0.3)/2(1.1)
사회당/0(0)/0(1.6)
무소속/26(3.8)/-(-)
기타/0(0)/0(1.1)
합계/682(100.0)/73(100.0)


기권으로 표현된 국민적 심판

이러한 충격적 결과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현 정권의 부정부패를 돌아볼 때 지극히 당연한 국민적 심판의 결과이다. 그러나 노후보의 말처럼 "부패의 원조는 이회창과 한나라당"이라는 주장을 인정한다면, 국민의 심판은 민주당 표들이 한나라당 표로 옮겨가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48%의 투표 참가 중 50%를 조금 넘는 수치라면 전체 유권자들의 25% 정도에 불과하다. 한나라당의 득표는 고정적 지지층의 범위를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들의 많은 부분은 부정부패에 대한 실망으로 투표를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정치와 기성정당에 대한 젊은층들의 회의는 월드컵 열기로 일시적 분출구를 찾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20-40대의 투표율이 낮았다는 점은 분명 한나라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민주당 참패가 부패한 정권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기권으로 표현된 직접적 결과라면, 한나라당 압승은 국민적 심판의 간접적 결과이자 노풍의 반사효과로서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결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속되는 지역주의 투표경향

한편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주의적 투표경향은 여전하였다. 울산과 전라도 지역에서 민주노동당이 선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전라도 지역의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과연 진보성을 담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보기에는 70% 가까운 민주당의 득표율을 설명할 수 없다. 경상도와 충청도도 마찬가지이다. 경상도 지역에서 한나라당이 70%를 넘는 득표율을 보였으며, 충청도 지역도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자민련의 목숨을 부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지역주의 투표경향이 일정하게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만족하기에는 아직 한없이 부족하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

민주노동당의 약진에 대해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선거 며칠 전 강의시간에 대학생들을 상대로 모의투표를 한 적이 있다. 이 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은 30%의 정당지지율을 얻었다. 표본집단이 학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8.1%라는 지방선거에서의 지지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무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계급성으로부터 일탈해 가는 민주노동당의 전략이나 학생들의 의견과 선거의 뒷 얘기로 미루어 볼 때,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의 적지 않은 부분은 사회당의 인지도 문제와 결부됨으로써 진보정당 진출을 위한 비판적 지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찬성이라기보다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출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비례대표제의 파괴력

그렇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비례대표제의 파괴력은 충분히 드러났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진보정당이 발돋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다수대표제의 폐해는 가장 높게 잡아도 50%+1표를 획득한 후보자가 독식함으로써 일부의 이해관계가 과다대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례대표제일지라도 인물중심적 선거를 확실하게 탈피하기 위해서는 정당후보 명부에 대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이념과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제도가 더 바람직하다. 정당후보 명부의 작성도 당내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한 당중앙이나 핵심엘리트들에 의해 독점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홍보와 공청회를 통해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정치문화도 이제는 사회주의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는 레드 콤플렉스에 옥죄어 있지는 않은 듯 하다. 득표율은 비록 저조하였지만 선거를 사회주의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는 사회당의 활동은 이러한 측면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이념과 정책의 선명성을 통해 경쟁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명실상부한 보수혁신 구도의 가능성이 보인다. 득표만을 위해 진보성을 탈각해 가는 것은 득표 전략상으로도 장기적인 면에서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1998년 선거에서 구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민사당(PDS)은 독일어로 공산주의자들을 비칭하는 속어인 '빨간 양말'을 마스코트로 하여 당당히 선전하기도 했다. 한국 청년들의 가슴에 붉은 'Be the Reds!'가 '빨갱이가 되라!'로 당당히 해석되고 주장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