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향한 회상"-진보정치 운동사 18]민주대연합론은 보수야당에 대한 ‘짝사랑’

민주연합론과 독자정당론 - 민중당(1)

▲ 90년 6월에 열린 민중당(가칭) 창당 발기인 대회. 1천21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민중당 출범으로 90년대 독자정당 실험의 첫걸음을 내딛게 됐다.

김원/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1. 민주연합론과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론

90년 출범한 민중당은 87년 백기완 선본, 88년 민중의 당 및 한겨레민주당의 실험 이후 최초로 제기된 민중의 독자정당 시도였다. 하지만 그 출발은 쉽지 않았다.

87년 민중후보의 사퇴 및 88년 총선 이후 조직적 성과가 남아있지 않았고, 87년 이후 여전히 재야운동 내부에는 ‘민주대연합론’ 또는 ‘비판적 지지론’이라고 불리는 보수야당과 의 연합을 중시하는 세력이 강했다. 그만큼 초기 민중당의 출발은 재야 혹은 민중운동으로부터 넓은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87년 대선은 재야운동 내부의 친보수야당 지지세력(비판적 지지론, 민주연합론)과 보수야당으로부터 독자적인 정립을 추구한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 세력의 ‘맹아적’ 분화 시기였다. 하지만 대선 결과, 종속적 파시즘 정권은 재생산됐고, 87년 직후 계급대중운동의 진출에도 불구, 정치적 대립 구도는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노동자 민중운동의 초보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조직화는 여전히 지체됐고, 민중운동의 정치적 조직화의 시점, 형식, 내용을 둘러싼 대립이 민중당 창당을 직후 한 시기에 구체화된다.

우선, 정치적 조직화를 둘러싼 재야의 시도를 구분해 보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전민련, 국민연합, 전국연합으로 이어지는 ‘전선체 운동’, 다음으로, 보수야당에 집단적으로 입당, 야당내 ‘진보블럭’을 형성하려는 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중당 이후 현재까지 실험중인 민독정 운동이다. 이 3가지 실험은, 선거 국면 및 정권교체기 그리고 민중운동의 조직적 재편기에 어김없이 반복됐다.

각 시기별로 논쟁과 분화의 내용과 수준은 달랐지만, 근본적으로 따진다면, 민중운동의 연합세력으로서 보수야당에 대한 판단과 이 과정에서 민중운동이 합법영역에서 독자적인 정당이란 형식을 취하느냐의 문제였다.

이 와중에서 ‘합법정당 건설론’이 민중운동, 좁게는 전민련 내부에서 제기되고, 합법정당을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진영과, 합법정당 시기상조론 및 전민련 강화론(‘민주연합론’)이 대립, 재야의 조직적 분열을 낳게 된다.


2. 민중당 창당 전야 전민련내 합법정당 논쟁

이러한 분열의 단초는 1989년 영등포 을구 재선거였다. 88년 여소야대 정국 이후 광주민중항쟁 문제 및 5공 청산을 둘러싼 정치사회 내부 갈등은 89년에 들어서 ‘공안정국’이 형성되자 약화된다.

이러한 정세 변화는 이들 투쟁에서 중요 역할을 담당하던 전민련의 약화, 조직적 통합력 취약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민련이라는 통일전선체로는 안정적인 정치투쟁의 조직화가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전민련이 가지는 정치적 대안 부재를 웅변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89년 8월 영등포 을구 재선거는 전민련으로 하여금 합법정치영역에 대한 개입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을 요구했다. 전민련 내부에는 선거참여론 및 불참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단 이우재(이후 민중당 대표)를 대표로 하는 선거대책소위가 결성, 고영구 변호사를 ‘범민주후보’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비록 공화당보다는 많지만 7.1%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대한 전민련 내부 평가도 상이했는데, 먼저 선대위는 합법정당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 합법정당의 부분적 가능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전민련 정책기획실은 선거 과정 및 결과에서 보여지듯이 후보전술은 실패이자 민족민주운동이 강한 정치세력임을 대중에게 확신시키는 데 한계를 지녔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 성패에 대한 평가를 차치하고, 이제 전민련 내부에 합법정당론은 거부할 수 없는 논제이자 화두로 등장하게 됐다. 이는 9월에 들어 전민련 내부에 합법정치전술에 대한 상이한 이견으로 표출된다.

합법정당 시기상조론자들이 민주연합론에 기초한 다수파임은 분명하나, 합법정당 건설론자(대표적으로 이우재, 장기표, 조춘구, 박계동, 정문화 등)는 재야운동의 침체원인을 무엇보다 정치적 대체세력의 부재라고 판단, 합법정당을 통한 대체세력-대안을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전민련 내부에서 그들의 안이 부결되자 전민련을 탈퇴하고, 독자적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그 조직적 형태가 11월 발족한 진보적 대중정당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었다. 여기에 90년 3월 다시 정당활동의 보장을 승인받고자 하는 문건인, ‘민족민주운동의 정당사업에 관한 전민련의 입장’이 제출됐으나, 다시 부결되기에 이른다.

잇달아 역시 정당활동의 지지를 주장하던 이부영, 이재오, 여익구 등이 전민련을 탈퇴하고, 곧이어 이른바 재야의 ‘원로’인 백기완, 박형규, 계훈제, 이소선 등이 전민련 고문직을 사퇴하고 민중정당 결성을 촉구하자 정당건설론은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3. 민연추와 통추회의 그리고 민중당의 건설

이러한 분위기 아래에서 이부영 등 전민련 이탈 인사들과 이우재, 장기표 등 진보정당 준비모임 등 세력은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논의를 지속시켜 왔고, 90년 4월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이하 민연추)를 결성한다. 민연추는 4백47명의 추진위원과 10대 강령을 발표하며 출범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김문수, 유인렬 등은 ‘민중정당건설 전국노동자추진위원회’를 결성, 민중당 건설의 한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까지 민중정당 결성은 필연이며, 당시 민족민주운동의 진로에 대한 여러 좌담 속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하지만, 90년 초반 3당 합당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이 배제되자 다시 ‘야권통합’ 논의가 수면위로 등장한다. 이는 민연추 내부에 보수야당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심각한 내부 논쟁을 초래하는 불씨가 되고 만다.

민연추 내부에는 전면적인 야권통합을 주장하는 측과 ‘선 주체형성 후연합’을 주장하는 측간의 대립이 격화, 결국 야권통합파(이부영, 박계동, 고영구, 제정구 등)는 민연추 내부에서 자신들의 입장이 관철되기 어렵게 되자, 5월에 14명이 일괄 사퇴서를 제출한다.

이처럼 전민련 내부에 합법정당론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모였던 민연추는 다시 분열하고, 그 가운데에는 ‘야당-자유부르주아지’와의 관계가 핵심적인 문제였다. 이는 당시 정세인식에서 출발, 독자정치세력화의 방침과도 연관되는 문제였다.

한편 야권통합론을 주장하며 민연추를 탈퇴한 인사들은 ‘범민주 수권정당 결성을 위한 통합추진회의’(이하 통추회의)를 결성하지만, 과연 이들 통추회의가 야권통합의 매개자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물론 통추회의는 야권통합을 통한 민주연합당의 실현을 최종 목표로 했지만, 평민당의 경우 야권통합은 거대여당 민자당과 야당인 평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양당체제’를 대중에게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평민당은 한편으로는 통추회의를 들러리로 대규모 장외집회를 통해 야권통합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쟁점을 계기로 대여관계에 집중하는 이중성을 보였던 것이다.

실제 3당 합당 직후 정당체제는 호남과 비호남의 지역주의적 균열구조로 재편성됐으며, 이런 상황에서 야권통합의 효과는 87년 당시보다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어떤 면에서 민연추를 이탈한 야권통합론자, 더 정확하게는 민중정당시기상조론자 및 비판적 지지론자들은 야권통합 주장은 보수야당에 진입하기 위한 ‘명분축적용’ 이상이 아니었다. 이는 실제 야권통합 결과에서도 보여지는데, 통추회의는 야권통합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선호하는 야당에 따라 분리, 각각 민주당과 평민당으로 흡수되었다.

결국 88년 평민련의 재야입당 실험에서, 90년 통추회의에 이르기까지 비판적 지지론과 민중정당 시기상조론자들은, 결과적으로 개별적으로 보수정당에 입당하게된 셈이며, 실천적으로 비판적인 지지론이 재야 민주대연합론의 보수야당에 대한 ‘짝사랑’에 불과한, 시대착오적인 실천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의 실천과 달리, 비록 그 세에 있어서는 재야의 일부였지만 독자정당 추진론자들은 90년 6월 21일 드디어 민중당(가칭) 창당 발기인 대회를 1천21명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가져, 이우재와 김상기를 창준위 위원장에, 그외 장기표, 이재오, 정태윤 등의 간부인선을 하며 90년대 최초의 독자정당 실험에 닻을 올렸다. 하지만, 그 실험은 이제 출발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 105호] 9.30 ~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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