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쪽방, 1평 안의 사람들

"갈 곳이 없는데 어떡해, 그냥 누워있어야지.."

가출, 쪽방, 빽차

방황하는 유년기의 소년들이 한번씩 겪는 흔한 경험처럼 나 역시 어린 시절 가출의 경험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쯤이었을까?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며, 맨발로 집을 뛰쳐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집을 나서니 갈 데가 없더라.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집을 뛰쳐나오기 직전 그동안 꼬불쳐 놓았던 비상금 이만 원 정도를 챙겨 나왔다는 것. 그때 나에겐 큰 돈이었던 이만 원만 믿고 난 내 생애 처음으로 가출을 전격적으로 단행하였다.

첫날 밤이 찾아왔다. 밤 동안 지낼 곳을 찾아야만 했다. 14살 짜리 중삐리를 받아주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고, 또한 숙박요금은 가출자금을 한번에 투자해야 할 정도로 내겐 큰 액수였다. 고민을 하던 중 나 보다 일찍 가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녀석의 경험담이 생각났다. 당시 녀석은 가출기간 동안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쪽방'이라는 곳에서 잠을 잤는데, 방값이 하루에 천 원 정도라 했다. 그거였다. 하루 천원이면 최대 20일. "앗싸!" 난 그 '쪽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현재도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월곡동에 있는 쪽방촌에 도착했다. 천 원을 주고 머물 곳을 찾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그 곳의 첫 인상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보였다. 사람은 살지 않고, 나와 같이 집나온 아이들이 하루 묶어 가는 곳으로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난 하루를 겨우 그곳에서 머물고 아침이 되자 바로 뛰쳐나왔다. 잠깐도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틀 째 밤, 쪽방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는 남은 돈을 모두 털어 쪽방보다는 사정이 좋은 조그만 여관에 겨우겨우 방을 잡았다. 그날 밤 난, 주인의 신고로 검문 나온 경찰에 잡혀 빽차를 타게 되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던 나의 첫 가출 시도는 그렇게 끝이 났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간 쪽방

15년 만에 쪽방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이제 나에겐 가출 소년의 절박한 심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취재를 위해서, 기자회견이 열린다기에 관찰자의 눈으로 그곳을 살펴보기 위해 다시 찾아갔다.

영등포 쪽방 지역에 위치한 철길 옆 공터에서 기자회견이 열리고, 난 수첩에 열심히 발언 내용을 적는다. 영등포 역을 오고가는 국철 소리에 연사들의 발언을 알아듣기란 쉽지 않다. 어떤 이가 옆에 와서 말을 건넨다. 연사들의 발언을 적기도 바쁜 난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의 눈빛을 보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제발 내 얘기 한번 만 들어달라..."고 한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그와 함께 그가 살고있는 쪽방으로 향했다. 그의 쪽방은 영등포역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영광여인숙'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 아래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곧바로 쪽방들이 양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실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 한 개의 평수는 대략 1평. 키가 별로 크지 않은 나도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고, 만약 눕는다면 간신히 허리를 펼 정도인 방들이 10개 정도 있었다. 각 쪽방에는 대부분 70세 이상의 독거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쪽방은 행상을 하며 파는 물건들과 살림살이들로 두 명이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든 공간이었다. 그의 쪽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쪽다리로 한달 벌어 30만원

윤영태 할아버지의 한평 짜리 쪽방. 이곳이 헐리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갈곳이 없다.
올해 66세인 윤영태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없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윤 할아버지는 피난 도중 왼쪽다리를 잃었다.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마치 고정이라도 된 듯 끼어있는 목발에 의존한 채로 그는 행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루 수입은 만 원 내외. 한 달을 꼬박 일해 30만원 정도를 벌어 방세 18만원을 내고 남은 돈 12만원. 그 돈으로 그는 한달을 생활한다. 사정이 이렇지만, 그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유는 자신의 호적에 올라가 있는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있고, 소식이 끊긴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훌륭한 대한민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에누리 없다. "지들도 얼마나 먹고살기가 힘들겠어요. 요즘 같은 때 어디 사람 살기가 쉬워요?"라며 오히려 자녀들을 걱정한다.

12년 동안 주민세를 냈지만, 주민은 아닌 이들

윤 할아버지는 당장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 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영등포 쪽방촌은 작년 이미 부분적으로 철거가 진행되었고, 곧 그가 살고 있는 곳도 철거가 시작 될 예정이다. 영등포 쪽방촌에 거주하고 있는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윤 할아버지는 이 곳이 철거되면 갈 곳도 없으며, 이주할 돈도 없다. 게다가 윤 할아버지는 영등포구에서 제시한 이주대책(1년 이상 거주자 중 주민등록이 등재된 사람에 한해 이주비 420만 원 또는 임대아파트 입주권)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제가 살고 있는 쪽방은 주소가 여인숙으로 되어 있어요. 주인이 여인숙으로 등록을 했거든요. 여인숙으로 되어있어서 보상을 받을 수 없데요. 영등포구청 보상과에 찾아가서 몇 번을 따졌어요. 나중에는 거기서 행패도 부려보고 했는데 여인숙이어서 안 된다는 똑같은 얘기만 해요"

윤 할아버지가 거주하고 있는 쪽방의 주소는 여인숙 주소와 동일하다. 행정적으로 여인숙의 객실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 쪽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영등포구 거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12년을 여기서 사는 동안 꼬박꼬박 주민세를 받아 갔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여인숙이라서 보상이 안된데요. 거주 주민이 아니라는 얘기죠. 그럼 그동안 주민세는 왜 받은 거예요? 주민세는 왜 걷어갔냐고 따지면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딴 데 가서 얘기하래요"

비단 윤 할아버지 뿐 만 아니라 한 지붕아래 살고 있는 9명의 다른 쪽방 거주자들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영등포구는 이들을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여인숙 투숙객으로 취급하며 이들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쪽방은 최빈곤 생활자들의 단·장기적인 주거공간으로서 역할을 한다. 이들이 살고 있는 쪽방이라는 곳은 여인숙, 고시원 등 다양한 모습으로 현실에 존재한다. 단지 주인이 간판을 여인숙으로 내걸었을 뿐이지 실제로 이들에게는 하루하루 잠자고 쉴 수 있는 주거공간인 것이다. 관리 지자체는 최빈곤 생활자들의 특수한 주거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엉뚱한 행정적 기준으로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보상의 대상을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얘기하면 뭐해? 그래봤자 받지도 못할 걸..."

윤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다른 거주자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가족이 없거나, 이미 해체된 70세 이상의 독거 노인들이다.

올해로 41년 동안 영등포 주변에서 교통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 임진국(89세) 할아버지는 언론에 몇 번씩이나 등장한 유명인(?)이다. 물론, 언론을 통해 그는 쪽방에서 사는 독거 노인이 아닌 '교통할아버지'로 보도된다. 임 할아버지 자신도 '교통할아버지'로 알려지는 것에 대해 즐거워하신다. 쪽방 철거와 관련된 얘기를 나누려 하자 "기자 들한테 얘기하면 뭐해? 그래봤자 받지도 못할 걸"이라고 푸념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인 임 할아버지는 35만원 정도의 정부지원금이 한달 수입의 전부다. 이것으로 월세를 비롯한 모든 생계비를 충당한다.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임 할아버지 역시 쪽방이 철거될 시 아무런 대책 없이 거리로 내몰릴 상황에 처해있다.

'영광여인숙', 아니 '영광쪽방'에서 4명의 거주자들과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89세, 86세, 70세, 66세의 늙고 병든 사람들. 맨 처음 내게 이야기를 건넨 윤 할아버지 이외에는 대부분 말을 많이 하려하지 않는다. 울분을 토로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않는다.

이들은 "철거가 시작 될 예정인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라고 물으면 그저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한숨 섞인 힘없는 목소리로 "갈 곳이 없는데 어떡해. 그냥 여기 누워있어야지"라며 그저 웃는다. 이들의 거주공간을 파괴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거대한 물리적 폭력 앞에 이들은 한없이 울고 싶겠지만, 현실의 모순을 이들의 개인적인 게으름과 무능력으로 은폐시키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폭력은 이들에게 슬픈 웃음을 지어보이라 한다.

지난 총선 때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위해 너도나도 TV에 나와 눈물을 흘리더라. 탄핵 때 국민들은 대통령을 위해 너도나도 눈물을 흘리더라. 이 나라는 울어야 할 사람이 웃고, 웃어야 할 사람들이 우는 코믹한 사회인가 보다.

난 15년 만에 쪽방을 찾았다. 15년 전 내가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많다. 하지만, 사회는 '살지 않는다'며 그들의 존재를 은폐하고, '살 수 없다'며 그들의 삶의 공간을 무시하고 있다. 은폐와 무시 속에 그들은 오늘도 삶의 터전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지만 슬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취재를 마치고 영등포역으로 가는 길까지 윤 할아버지는 따라 나와 배웅을 해주셨다. "갑작스럽게 철거가 시작되면, 연락해도 되냐?"며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하신다. 명함을 드렸지만,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은 더욱 무겁게만 느껴졌다.

"쪽방은 최빈곤층 최후의 주거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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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 , 쪽방 , 독거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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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환의 비자금이면

    철거할려고 하기 전에 거주지(지금 살고 있는 곳정도의 비용부담이나, 더 나은 혜택)를 마련해줘야 할 것이다. 철거한 다음 들어선 건물에도 예전보다 더 깨끗해진 환경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하던지.
    전두환의 추징금이면, 이 정돈 껌값일텐데..
    이런 이웃에게 철퇴를 내리는 사회에서, 정의는 없다. 부패척결은 정치성 발언일뿐 어떤 공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 kkk

    참 불평등한 세상이다. 누구는 돈많아 재산이 수천억, 누구는 쪽방살이, 참 부익부빈익빈 심각하도다. 그렇다고 공산주의는 좋냐하면 결국 북한같이 같이 못사는 세상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체제가 가장 좋을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근간을 두지만 서로 나눠주는 체제가 가장 좋을 것이다. 대통령만 되면 다 자기것 챙기느라 눈까는 인간들, 그러나 결국 민족에 희망이 생길 것이다. 민족의 부익부빈익빈 문제를 나눔의 철학으로 극복하고 국민들을 통합시키는 대통령을 국민들이 원하고 소원하는바 결국 그런 자가 현재 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