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타 사토시가 본 산리즈카 내각 결정 40년

[가마타 사토시의 산리즈카 40년](1) - 농민 고이즈미 히데마사 씨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이 한참이다. 국민의 국가라는 기구가 농민의 생존권인 땅을 일방적으로 빼앗고 군사기지를 만드는 국가정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토지를 빼앗긴 농민, 지원하는 활동가들의 투쟁은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
평택의 미군기지 확장과 강제적인 토지 수용은 국가의 중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나리타 공항건설을 강행한 일본의 국가정책과 유사한 점이 많다. 산리즈카의 농민들은 농업을 지속하는 것이 공항건설의 완성을 막는다는 신념으로 40년에 걸쳐서 다양한 유기농법과 시민네트워크를 형성해 오고 있다.
내각 결정 이후 40년 후의 현재의 산리즈카를 고찰하는 일본사회운동의 르뽀라이터 카마타 사토시 씨의 경험을 통해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획은 6회에 걸쳐 연재한다. - 역자



연재를 시작하며

정부가 선을 그은 [나리타공항부지] 내에는 지금까지 민가가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며, 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정상 상태를 언론은 보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국가정책 실패의 전형적인 예임에도 불구하고.

  사진 - 나가쿠라 오쿠오(사진작가)

공권력에 의존하여 공항이 강제 건설되고, 비행기의 이착륙이 계속되고, 하늘에서부터 땅을 찢을 듯한 소음이 지축을 뒤흔들어도 예전과 전혀 변함없는 것은 농민의 살아있는 생활이다.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이 곳을 이 나라의 관료들은 주민들과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공항으로 사용한다]고 [결정](1966년7월, 내각결정)하였다. 인간의 생활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비정하고 냉혹한 결정이었다. 마치 식민지의 개척자들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가들이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방향을 잃고 허둥대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이다.


[긴급한 국가적 사업] 등을 운운하며 농민의 생활을 위협하며 내쫓으려고 했던 [신도쿄국제공항] 건설 사업은, 40년에 걸친 저항에 직면하여 지금까지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한때 대규모 전투경찰을 동원한 공항공단은 [강제수용]이라는 명분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을 빼았았지만, [국가적 폭력]을 강행한 악명 높은 [공항공단]도 지금은 국가공적기관에서 떨어져나와 [나리타 국제공항회사]라는 일개 민간기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땅에 살고있는 인간들인 농민과 완전히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민가의 코앞까지 아무렇지 않게 활주로를 건설하고,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있는 민간기업은 민사소송의 대상이다. 생활침해, 인격권의 부정, 소음범죄, 매일매일의 정신적 압박 등 공항공단은 이러한 것들을 즉시 중지하고 사죄를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회사는 2002년 월드컵 개최를 명목으로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은 활주로를 [잠정활주로]라는 미사여구를 붙여 건설을 추진하였고, 활주로의 맨 끝에 주민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운영하였다.


우리들은 [잠정활주로라고 한다면 그 기간이 종료한 후에 즉시 활주로를 제거한다라는 약속이 성립한다]라고 주장한다. 원래 [긴급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된 공항이기에 공항자체가 [잠정공항]이었다.


관료와 정치가들은 틈만 나면 [국가백년의 대계] 운운하지만, 결국 그러한 장엄한 설명도 없이 그들은 도둑고양이와 같은 비열한 수단을 사용하였다. 남쪽 확장이 저지되자 잠정활주로를 북쪽으로 더 확장하려는 이번 계획도 지금까지 공항공단이 사용한 위계적인 방식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사용하고 있다.

공항회사의 사장이 예전의 운유성 차관이었기에 이런 방식은 몸에 배었는지도 모르지만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방식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뻔뻔하게 확대하려는 움직임이다.


우리들이 산리즈카 투쟁에 관여해 온 것은 국가의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분노가 땅과 함께 존재한다면 이들 중 남아있는 최후의 한사람까지 지원하는 것이, 이 운동에 관여해 온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카마타 사토시 ; 르포라이터. 도요타공장의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폭로한 [자동차절망공장]을 시작으로 노동사회 문제의 이면을 폭로한 작품을 계속하여 출판하고 있는 사회운동가 겸 작가. [노동자], 핵폐기물의 문제를 기록한 [롯카쇼무라의 기록], 부락민 차별 문제를 다룬 [사야마사건], [이런 나라는 필요없어]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 사진 - 나가쿠라 오쿠오(사진작가)
すわりこむと ごみがよく見える
앉아서 농성을 하면 쓰레기가 잘 보인다
すわりこむことは ごみの低さに ちかづくことだ
농성을 한다는 것은 쓰레기의 위치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일본반정치시집(日本反政治詩集)](무카이다카시,1973)에 수록되어 있는 마츠우라 히데마사의 짧은 시이다. 33년전에 비폭력 저항운동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 연장선으로 그는 산리즈카에 왔고, 이후 이곳에 이주하여 아내 미요 씨와 함께 [빈농]이라고 불리는 고이즈미 요네 씨의 양자가 되었다.


그 이후, 공항에 둘러싸인 [토호부락]에서 농민으로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의 투철한 이 시에는 그의 냉철한 시선이 느껴진다. [마츠우라 히데마사]는 자신의 시를 배반하지 않고 산리즈카에서 지금까지 농성을 하고 있다.


토호, 헤타, 요코보리 마을 등 두꺼운 콘크리트의 활주로에도 부서지지 않고 지금껏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 부락에는 예전과 같은 아늑한 정취의 안정된 집들은 볼 수 없다. 비행기의 소음 때문 만은 아니다. 풍경이 전혀 달라져서 예전의 기억을 살릴 수 가 없다. 전혀 다른 풍경에 불안함마저 감돈다. 미로를 밟고 있는 것만 같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나무와 풀도 함께 기력을 잃어버린다. 고촌 특유의 밀집한 수풀, 풍요로운 들판, 파란 싹이 돋아있는 논, 울창한 대나무 숲 등은 불도우저로 파헤쳐졌고, 콘크리트의 벽과 철조망이 둘러쳐진 폭력적인 풍경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풍경의 한 가운데 가차없이 쇠파이프가 박아지고 이어진 철판의 연결망이 병풍처럼 풍경을 차단하는 곳이 있다. 누군가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한 것이지만, 철판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좁은 폭의 길을 따라 들어간 곳에 돌연 등장한 것이 토호신사였다.


예전 웅장한 산림을 형성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던 신사의 바로 옆까지 활주로와 유도로가 뻗어나와 신사는 완전히 공항에 포위되어 있다.


부락사람들의 공유재산으로 봄과 가을에 마을 축제가 열리고, 언제나 농업을 하는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절호의 놀이터였던 이 곳 신사였다. 하지만, 주변의 큰 나무들은 공항회사가 항공운행의 장애라고 주민들과의 상의도 없이 한그루도 남기지 않고 무단으로 베어버렸다. 신을 경멸하는 행위이다.

신사 입구의 토리이문과 제사단은 몸통 채 짤려 무참하게도 벌거숭이가 되어버렸다. 경내에는 직사광선이 내리쬐고, 풀들은 다 말라서 죽어버린 이상한 공간이 되었다. 천벌받을 공항회사의 악행이 그대로 천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무참한 행위를 태연하게 할 수 있을까.


신사는 활주로의 연장을 저지하기 위한 것처럼 바로 남쪽에 있지만, 그 주변에는 고이즈미 씨, 시마무라 씨, 히노케 씨, 시토 씨, 하기하라 씨, 이시이 씨의 집과 밭이 펼쳐져 있다. 이외에도 락쿄(염교)공장과 공동출하장 등이 여기저기 만들어져있고, 어떻게든 매입되지 않고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 이것이 내각결정 40년 후의 현실이다.


이처럼 무자비한 공항건설은 들은 적도 없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경우이지만, 이러한 모습은 정치가들이 주민의 의사를 무시한 일방적인 결정으로 [부지예정지]의 주민들을 분노시킨 결과이다.

농민이 지렁이가 되다


고이즈미 씨는 주변의 토미사토쵸의 새롭게 구입한 밭의 작업장에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밭 한가운데 놓여있는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아 사 온 도시락을 풀었다. 고이즈미 씨는 호박된장국을 만들어 주었는데, 막 딴 호박이어서 매우 달고 맛이 있었다. 특히 [산숙의 야채찌게]는 일품이었다. 술과 간장을 냄비에 넣고, 산숙을 넣어 약한 불로 조금씩 끓인다고 했는데 향기롭고 혀끝을 쏘는게 일품이었다.

  고이즈미 씨 / 사진 - 나가쿠라 오쿠오(사진작가)
고이즈미 씨는 북해도의 탄광촌, 아카비라시의 개척 부락 출신이다. 도쿄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산리즈카에 온 것이 23살 때이고, 71년부터 주민이 되었다.

[40년이라면 스무 살의 자식이 60살이 됩니다. 최초는 10년 정도로 공항이 완성될 예정이었지만 이것이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못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실패한 정책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50년 걸려서라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하고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40년간 이곳에 있던 사람에게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어요. 이것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어요]


예전부터 별로 말수가 없던 고이즈미 씨이다. 89년에 [백성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15년이 지나서는 [지렁이 이야기]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말미에는 [백성이 지렁이가 되었다]라고 쓰여있다. 떨어진 낙엽들을 모아서 그속에 숨어서 살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수정 개항]이라고 불리면서 잠정적으로 공항이 [개항]된 것은 78년 5월. 그 이후 우리들의 이곳 방문도 뜸해졌다. 처음에는 [나리타공항]을 거부하고 오사카 공항에서 해외에 나가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나리타에서 비행기를 탄다. 왠지 친구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말이다. 고이즈미 씨도 그 친구 중 한사람이었다.


고이즈미 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의외였던 것은 [나는 응원자이지,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와 고이즈미 씨는 청년행동대의 멤버로서 함께 만난 적이 많았기에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는데,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고이즈미 씨도 지원을 하러 온 사람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35년간이나 살면서도 아직까지 자신을 [응원자]라고 말한다. 스스럼없는 순수한 분이다.

당시 고이즈미 요네(고이즈미 히데마사의 양아버지) 씨는 강제행정집행으로 자택에서 끌어내어졌다. 도깨비처럼 휘날리는 머리카락의 모습으로 싸우는 유명한 사진이 남겨져 있다. 양자인 히데마시시도 역시 가처분으로 토지를 빼앗겼다. 이 두 사람의 토지를 강탈한 것은 산리즈카 투쟁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년행동대의 이야기를 했을 때, 오키나와의 킨만의 CTS반대투쟁에 관여한 청년에 대해서 고이즈미 씨가 말했다. 나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오키나와의 경제적 자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 청년은 반대운동 후에 귤의 한 종류인 탕깡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탕깡을 일년에 한 번씩 나도 받고 있는데 예전의 청년행동대(지금은 벌써 60살이 넘었지만) 등 30명에게 지금까지도 보내고 있다.


[탕깡을 보내고 한 번 만나서 돈을 수수하는 것 뿐이지만, 그래도 대충의 상황은 다 알아요. 여러 가지 회고를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도 몇 년 후가 되겠지요. 70정도 되었을 때] 라며 그는 웃는다.

관료의 무책임과 [싸우는 야채]

[내륙의 토지에 거대한 공항을 만들려고 했는데 토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데나 만들지 않고, 좀더 환경에 맞는 공항을 만들 때까지 이 공항을 이렇게 한다 등등 정부의 청사진이 있다면 지금의 이런 압력도 그때까지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당장 부숴라 라고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관료들은 이 하늘 어딘가에서 발 쭉뻗고 생활하고 있다. 무책임이다.


고이즈미 씨는 우리들을 밖으로 불러서 퇴비장으로 안내하였다. 작업장 앞은 잘 정돈되어있고, 반대편의 수풀까지 밭이 이어져 있었다. 넓은 밭을 조망하고 있으면 여유로운 기분에 젖어든다. 바로 앞에는 5미터, 10미터의 넓이로 땅을 높여 세운 것처럼 낙엽의 퇴비가 쌓여있다.


이외에도 지붕으로 썼던 억새풀을 발효시킨 퇴비와, 낙엽에 쌀껍집을 섞은 퇴비 등이 작은 산처럼 쌓여있다. 그 위에 덮어씌운 감자 등을 넣은 종이 봉포를 들어서 안을 털어보니 지렁이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떨어져 나온다. 검은 미세한 알들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퇴비를 손으로 부스면서 냄새를 맡아보면 어렴풋이 숲의 냄새가 술술 흘러나온다. 고이즈미 씨는 먹을 수 있어요 라면서 싱글벙글 미소를 띄운다. 오래된 국화주를 저장하고 있는 술창고처럼, 년대별 와인의 향기처럼 퇴비의 향기에 심취된 채 우리들은 고이즈미 씨의 뒤를 따라 걸었다.


73년에 양자가 되어서 토호부락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퇴비 만들기는 일시 중지상태였다. 당시 밭의 구석구석에는 호리코시 씨, 시마무라 씨, 야나카와 씨 등이 만든 퇴비가 조금씩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고이즈미 씨도 자신이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북해도의 개척부락에서 부친이 만들고 있던 퇴비는 끈적끈적해서 좀처럼 깨끗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산리즈카에서 시작한 퇴비 만들기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石井さん宅(이시이씨 주택),萩原さん宅(하기하라씨 주택),
東峰神社(토호신사),市東さん宅(시토씨 주택),
小泉さん宅(고이즈미시 주택),島村さん宅(시마무라씨 주택)
木の根ペンション(나무팬션)

산리즈카의 농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공항반대 투쟁을 지속시킨다 라는 토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생물농법회]가 결성되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야채가 [원팩]운동으로 도시에 사는 운동지원자들에게 직송되었다. 우리 집도 시작단계부터의 [회원]이다. 그 이후 가족의 건강은 산리즈카의 유기야채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20년간 유기재배를 한 후 고이즈미 씨는 97년부터 [순환농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고이즈미 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부터 8년 전 좀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농업, 수입곡물이나 수입비료에 의존하지 않는 순환형의 유기농업의 길을 추구하면서, 나의 농법을 대폭 수정하였다. 그때까지 사용하고 있던 유기질비료의 사용을 그만두고, 동시에 다이옥신 발생원의 하나가 되고 있던 농업용 비닐재료, 폴리필름 자재의 사용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시행착오의 끝에 도달한 것이 현재의 낙엽과 벼껍질로 야채를 재배하는 방식이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화학물질 과민증의 어느 사람과 만나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치었다. 그 사람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야산감자, 야성의 멧돼지고기 등으로, 즉 생산자가 결코 농약 등을 사용하지 않아도 퇴비나 유기비료 안에는 화학물질이 혼합되어 있었던 것이다](헤럴드아사히, 06년2월9일)


야채를 생산하는 흙을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고이즈미 씨의 야채는 당근, 배추, 무우, 양파 등 모두 싱싱하고 그 속에 어떤 힘이 감돌고 있는 것처럼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약 200세대와 계약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을 보고 간만에 [싸우는 야채]라는 말을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산리즈카 투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슬로건이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출처] - '노동정보' 698호. 2006년 7월 1일
[번역] - 이영채
덧붙이는 말

<노동정보>는 1977년 5월 26일에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일본공산당과 혁명마르크스(카쿠마루) 이외의 당파들이 노동운동의 정보를 알리기 위하여 [공동센타 노동정보]를 세웠고, [노동과 생활과 사회를 바꾸는 노동정보]를 발간해 왔다. 현재는 국철해고노동자투쟁의 지지자들과 이론가들, 언론조합의 기자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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