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반대, 위선을 거부하는 투쟁

[가마타 사토시의 산리즈카 40년](2) - 야나가와 히데오 씨에게 듣는다

오랫만에 산리즈카를 방문한 것은 '내각결정'후 4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농민과 주민이 직면하고 있는 '잠정공항'의 실태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방문 직후인 7월 상순, '공항공단', 아니 '공항회사'가 '잠정B활주로'의 남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북쪽으로 퇴각(방향전환)하는 '시설변경허가신청'을 국도교통성에 제출한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40년 전에 세운 사업계획이 아직까지 완성되지 못한 것은, 말하자면 시효가 끝났다고 할 수 있는데 <아사히신문>(6월26일)조차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항회사는)2009년 말의 운영개시에 맞추기 위해서는 더 이상 신청을 지연시켜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도교통성은 올 가을에는 허가할 것으로 보인다"

당국은 자기마음대로 '운용개시'의 일정을 결정해, 게다가 "지연시켜서는 안된다"라고까지 말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긴급한 국가사업'이라고 협박이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이전 호에도 쓴 것처럼 공항건설도 단순한 '민간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의 생활과 회사의 사업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의 관계가 아니고 완전히 동등한 관계에 서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히 신문의 기자는 "국도교통성은 올 가을에는 허가할 예정이다"라고까지 쓰고 있다. 아직 신청도 하지 않은 단계인데, 왜 먼저 앞서서 '허가할 예정이다'라고까지 자기판단을 넣어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이 선점을 장악하겠다는 것인가.

감독청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공단회사의 눈치를 보는 '허수아비행정국'이라면 그것은 유착임에 틀림없고, 천인공노할 스캔들이기도 하다. 신문이 관청이나 공단회사의 주관적인 요구를 그대로 불어대는 나팔에 불과하다면, 이것 또한 어용신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이런 행정부, 기업, 언론간의 삼위일체의 타협이야말로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는 '나리타 공항'건설의 핵심적인 부정이다. 게다가, 6월28일, 치바지방재판소는 '공항계획부지'내에 있는 공유지의 매각을 결정하는 판결을 하였다. 이것은 재판소도 역시 어용기관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찌 이런 것들을 보고 이 나라가 법치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킨죠 미노루 씨의 조각이 관제탑을 감시하고 있는 요코보리 철탑 밑에서

나는 아직까지 싸우고 있다

야나가와 히데오(58) 씨의 아버지는 초기반대동맹의 부위원장이었다. 또한, 작은 체구에도 명랑하고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어머니 하츠에 씨는 '야나가와의 엄니'라고 불리었던 매우 유명한 분이셨다. 4형제 중 장남인 히데오 씨는 '야나'라고 불리며 청년행동대의 중심멤버였고, 체포경력도 가장 많다. 야나가와 씨의 방 안의 벽에는 시바야마쵸의 '슈쿠'부락을 개척하였다,라는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아버지 시게루 씨는 52세로, 제1차 강제행정집행 전에 돌아가셨다고한다. 이런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침내 '신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의 실력투쟁(폭력투쟁)은 청년행동대와 지원그룹만에 의해 주도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다. 아버지 세대들이 먼저 남녀불문하고 몸을 던져 싸웠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있었다. 강제행정집행이 있었을때, 필자는 당시 공해지역, 롯까쇼마을(핵폐기물지역) 등을 돌아다니고 있었기때문에 산리즈카에는 없었다. 필자가 온 이후부터도 체포자는 상당수 있었다. 남녀노소 구별없이 대나무죽창을 들고 기동대에 돌진하였고, 일본의 사회운동중에서 그렇게 많은 체포자를 낳은 싸움은 거의 드물다.

우리들은 토무라 잇사쿠 씨를 시작으로 아키바 데츠, 이시이 다케시, 이와자와 요시이, 아카와 켄 씨 등 낯익은 이들의 죽음을 하나둘씩 손으로 꼽았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라, 동맹원이외에도 청년행동대나 지원자중에서 자살한 사람, 기동대와의 격한 충돌 속에서 살해당한 히가시야마 카오루, 큐슈에 돌아가 사망한 마에다 토시히코, 간암으로 타계한 다카기 진자부로, 후쿠다 카츠히코씨 등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당일 필자와 함께 방문한 하야시 코지, 나카사토 히데아키 씨 등도 지원자로서 현지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등이 자신의 삶의 존재의 의미를 걸면서 이 산리즈카 투쟁에 참가해 왔다. 이 투쟁은 50년대의 반기지투쟁, 60년대의 미츠이미이케 투쟁과 함께 일본의 중요한 저항운동의 하나인데,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카마타 사토시(르뽀라이터)

야나가와 씨에게 있어 산리즈카투쟁은 무엇인가 라며 정면으로 물어보았다.

"참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투쟁중이라고 할까요(웃음). 보통사람들은 빨리 끝내버려라, 평온하게 살아가자, 다들 개인이라면 개인이고, 반대동맹이라는 조직도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지 않은가,라고들 말해요"

반대동맹의 한 파벌이었던 '아츠타'파는 해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움직임은 거의 없다. 모두가 개인화되었다고 해도, 산리즈카와 시바야마쵸에 남아서, 반대동맹의 경험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아직껏 살고있는 사람들도 몇몇은 남아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앞만 보고가는 경우가 있어요. 자신이 한번 결정하면 뒤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지기싫어하는 집안이라서 그런지, 아직까지 그런 고집을 버리지 못했어요. 거기다가 과거의 것을 후회하기는 더욱 싫구요"라며 빙그레 웃는다. 그의 말은 어디 정착할 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의 특유의 반어법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민첩한 소년의 이미지였던 야나가와씨는, 지금은 거의 백발이 되어있다(젊었을때부터, 새치가 많았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과거의 것들을, 현재에 적용하려면 확실히 과거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어요"

작년여름, 28년전 '나리타공항'의 관제탑을 점거하고 개항을 저지한 죄로 각각 10년(최고는 12년)의 옥중생활을 보낸 피고16인(다른 한 명은 자살함)에게, 국가는 일인당 300만엔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해 왔다. 시효직전이었고, 또한 요즘같은 무금리시대에 5퍼센트의 금리(총액의 절반이상)까지 포함하여 가산한 금액이었다. 이것에 대해서 전국적인 모금활동을 시작하였고, 결국 전액을 모아서 청산할 수 있었다. 이런 전국적인 지지들이 지금까지 산리즈카 투쟁이 높은 열의속에 지탱되고 있는 원동력이다.

최전선에서 싸운 사람이 버림을 받는다면, 운동진영의 도덕성을 문제시해야 하며, 게다가 그들의 뒤를 이어 싸우는 사람들은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같은 지원자는 자신의 결의에 의해서 지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극소수가 되더라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야나가와씨처럼, 그곳에 살고 있는 당사자가 역으로 지원자들을 지원하기도 한다.

산리즈카투쟁은 지원하는 사람도 투쟁하는 사람도 자기결정에 기반하여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대기업 처럼 입사와 함께 이미 존재하는 노조에 가입하여 신분이 보장되는 조직적인 운동(지금은 이런 보장도 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과는 달랐다.

나리타공항 건설이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은 건설을 계획한 정부와 그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이 전혀 대등한 관계로 인식되지 않았고, 권력을 가진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용지결정'이라는 형태로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기동대를 투입한 폭력에 의해서 그 첫발을 내딛었다는 것이다. 죽은자 만이 아니라 부상자도 셀 수 없이 많다.

더 이상의 확대는 용서할 수 없다

당국과 공항공단이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한 '개항일'은, 관제탑점거라는 반대파의 공격으로 2개월간 연기되었다. 그후, 정부는 운수장관과 정부차관을 파견하여, 공개장소에서의 사죄, "수용법은 철회하고, 2기공사는 대등한 입장에서 협의한 후 시작하겠다"라고 확약을 하였다.

이후 93년9월부터 약1년간, 12번에 걸쳐서 운수성, 공항공단, 반대동맹(아츠타파), 학자 등에 의한 '원탁회의'가 열렸다. 이 원탁회의는 정부의 사죄를 전제로 해서 산리즈카 지역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66년에 공항건설계획이 발표되고 난 후 25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정부와 농민이 '대등한 입장'에서 협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항문제'의 본질적 내용을 토론하자라는 야나가와씨 등의 제안에 의해 시작된 '원탁회의'는, 반대투쟁을 전면에 내건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부에서 '배반행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야나가와 씨 등은 실력투쟁을 능가하는 적극적인 정치교섭으로 나섰던 것이다. 제1회의 회의에서 반대동맹측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1) "잘못을 저지른 측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않고, 피해를 입은 측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것은 사회통념상 용서할 수 없다"
2) "(운수성.공단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공항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은 당사자 책임의 문제이다"
3) "원탁회의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는 원래의 BC활주로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4) "(원탁회의) 참가자는 학습에 의해 인식을 높이고, 공통의 가치관인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지역재건의 로드맵을 명확하게 하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주되게는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해결의 방식'이었다. 정부측이 '사죄'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등을 야나가와 씨 등이 당국에 추궁하였는데, 공항공단측은 협의를 하면서, 뒤로는 지금까지의 연장선으로서 '확장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야나가와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공항은 고도경제성장이 낳은 대규모개발의 대표 선수격이었기 때문에, 이것의 역사적인 총괄을 확실하게 하자라고 제안하였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나리타문제의 진정한 해결이다 라며 노선확대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원탁회의에 제출된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확실히 농업은 자연을 관리하려고하는 기술의 체계이다. 자연계에서 밭이나 논을 구획화하여, 벼와 보리만을 기르고, 다른 작물을 잡초로서 배제하고, 작물의 성장을 비료나 물의 도입으로 조정하려고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공업처럼 자연을 파괴하여 성립하는 산업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산림이나 강, 동물이나 식물과 함께 자연속의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허한 인식을 할때, 처음으로 훌륭한 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공항이 여러가지 생명체나 풍경을 일방적으로 부수어가는 모습에 깊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2기 공사만이 아니라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호텔공사 등에 의해서 산림이 깎이고, 지하수의 흐름이 변동되어 동물들이 생식지를 잃고 매일 매일 쫓겨나고 있다"

공항건설은 농업과 농가를 부순것만이 아니고, 지역의 물흐름의 체계를 바꾸었고, 자연과 동물의 유기적 관계를 끊어버렸다. 따라서 더 이상의 확대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런데, 원탁회의에 참가한 경제학자들은 공항문제를 농업문제로는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야나카와 씨는 비판한다. 그들은 정부가 몇 억엔인가를 내고, 어딘가에 몇 백평을 준비하여 새로운 컴뮤니티를 만들어 주는 생각뿐이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더해서 둘로 나누려는 방법이예요. 타협하려는 것이지요. 그러한 방법으로 공항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우리들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대규모개발의 반성점에 서야하고, 공항은 거대한 규모가 아니라 작은 규모여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큰 규모의 공항을 만든다는 아직도 그런 판에 박힌 생각을 정부는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야나가와 씨 등은 더 이상은 이 지역에 부하를 걸지 않는게 해결책이다라는 것이다. 양자는 완전히 대등한 관계에 있다는 인식을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공항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확대는 하지않는다, 이것이 잘못을 사죄하는 내용이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주장이다.

희생을 또다시 주민에게만 강요하는 해결책은 너무나도 일방적이지 않은가 라는 주장은 '공생'과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원탁회의에 제출한 문서의 3)에 적혀있는 "원래의 BC활주로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주장은 4천미터의 A활주로는 인정하지만, BC2개의 활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심적인 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그 '동등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야나가와 히데오

야나가와 씨는 이렇게 말한다.

"논리로서는 우리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만, 현실은 다르다고 언제나 말한다. 하물며 동맹내부에도 나라님이 사과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이쪽의 실례다 라는 반응조차도 존재한다"

정부가 공항의 위치결정이 일방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죄를 하고, 이후 농업이나 농업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원조하겠다라고 말하면, 그것에 동요하는 움직임도 내부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청산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라는 게 야나가와 씨의 주장이다.

"우리들은 '세상바꾸기'라고 말하며 운동을 했기때문에, 앞으로의 것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등의 토론이 없는 상황에서 동맹내부에서부터 의견의 차이가 대두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3.26까지 내란상태가 이어졌다. 그것도 그때까지 뿐이었고, 이후에는 완전히 비무장 상태가 되어버렸다"

반대운동은 3.26관제탑점거투쟁에서 진력이 다해 버렸다. 그 이후를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는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그런 평가를 들으면 이쪽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우리들은 소위 학자, 문화인을 중심으로 응원단(공항폐쇄 요구선언의 모임)을 만들었는데, 운동의 폭을 넓힐려고는 하였지만, 운동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들은 산리즈카투쟁속에서 지지자의 폭은 넓혔고, 각지의 주민운동이나 시민운동과의 연결을 만들었다. 운동의 형태도 '공항폐쇄론'의 책이나 팜플렛을 만들고, 집회를 열기도 하였지만, 당시 반대운동의 틀을 넘지는 못했다. 투쟁의 선전에는 기여하였지만, 실제로 '공항폐쇄론'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우자와 히로부미 씨를 집회에 부른적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헤타부락의 상공을 날고 있는 이 제트기는 잠정 B활주로에 착륙한다

야나가와 씨가 말하는 것처럼, 3.26관제탑점거까지의 고양을 만들어 내는 데는 우리들도 함께 하였지만, 이후 정부와의 교섭은 야나카와씨 등이 담당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우자와씨, 수미야 미키오씨 등이 조금 관여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선언모임'은 원탁회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새로운 국면을 열기위한 싸움에도 어떤 기여를 하지 못했다. 단지 반대운동의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응원단'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투쟁을 자기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지금 생각하면, 투쟁중에도 '원탁회의'를 여는 대담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후 이러한 방법은 '요시노강 하구보존투쟁(역자 : 도쿠시마현에서 댐공사에 반대하며 에도시대의 하구시설을 보호하려는 운동)'을 둘러싼 운동에 적용되고 있다.

야나가와 씨가 살고있는 마을에서 공항은 더이상 확대할 필요가 없다 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No라고 명확히 말하는 사람이 없기때문에, 전부 Yes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것은 반대운동이 표면화되지 못하고 전멸해버린 아오모리현의 롯까쇼무라(핵폐기물 재가동지역)의 현 상황과 동일하다.

공항을 확대하고, 비행기를 대형화하고, 화물과 인간을 대량으로 그곳에 싣는다. 소수의 희생자는 고려되지 않는 즉, 진정한 사회라고 할 수 없는 사회 - 공항반대투쟁은 원래 이러한 위선사회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그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때 야나가와씨의 부인인 야스꼬 씨가 밭에서 돌아왔다. 그녀와는 '피스보트'에 함께 탄적이 있다. 그때 이후의 재회였다. (다음호에 계속)

기사제공 - 노동정보 699호(2006년7월15일)
번역 - 이영채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르포라이터 가마타 사토시 씨가 산리즈카 투쟁의 주역 야나가와 히데오 씨를 인터뷰해 격주간 <노동정보>에 게재한 글로, 이영채 님이 번역해서 보내주셨습니다.

<노동정보>는 1977년 5월 26일에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일본공산당과 혁명마르크스(카쿠마루) 이외의 당파들이 노동운동의 정보를 알리기 위하여 [공동센타 노동정보]를 세웠고, [노동과 생활과 사회를 바꾸는 노동정보]를 발간해 왔다. 현재는 국철해고노동자투쟁의 지지자들과 이론가들, 언론조합의 기자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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