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제약회사 반발로 약가인하 조치 미뤄져

법원, 복지부의 폐암치료제 약가인하 조치 집행중지 결정 내려

법원이 다국적 제약회사의 '보험약가 인하 행정처분 취소 및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수용, 시행되기로 한 보건복지부의 약가 인하 조치를 정지하라는 결정을 내려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달 28일 서울행정법원은 다국적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가 자사 폐암치료제 '이레사'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약값 인하 조치가 부당하다며 제기한 소송에 대해 사건의 판결 선고 때까지 가격 인하 집행을 정지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복지부가 지난 달 18일 고시해 이달 1일부터 1정당 62,010원에서 55,003원으로 인하할 예정이었던 '이레사'의 가격은 종전대로 유지되게 되었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보험약가 인하 조치로 인해 제약사에 생길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하기 위해 긴급할 필요가 있고, 집행 정지로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다며 ‘아스트라제네카’ 측의 손을 들어 존 이유를 밝혔다.



미국보다 2만원 이상 비싼 ‘이레사’, "약가결정방식 문제 있다"

당초 복지부의 '이레사' 가격인하 조치는 ‘건강세상네트워크’가 낸 약가조정신청이 받아들여져 시행될 예정이었다. 지난 2003년 6월 ‘이레사’의 한국 시판이 허가된 이래 보건의료단체들은 줄곧 적정 수준의 약가책정을 요구해왔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지난 3월 이레사의 의학적 효능이 '혁신적 신약'으로 분류될만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미식품의약청(FDA)의 보고와 국내 약가가 미국의 미 연방정부입찰가격(FSS)과 미국방부·보건소·해안경비대·보훈처(BIG4) 등에 공급되는 가격보다 높게 책정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복지부 산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전문평가위원회에 가격인하 조정신청을 냈다. 현재 이레사의 국내 가격은 62,010원으로, 미국 FSS 가격 49,104원과 BIG4 가격 37,966원과 비교했을 때 각각 12,906원, 24,044원 비싸다.

이처럼 이레사의 가격이 비싼 이유에 대해 ‘건강세상네트워크’와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약) 등 보건의료단체들은 현행 약가결정방식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해왔다. 최근 건약은 ‘의약품 건강보험 선별등재방식’(포지티브 리스트) 도입을 골자로 한 복지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 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현행 약가제도와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건약은 신약 약가협상과 약가 재평가 시 약가산정기준이 실제 약가를 반영하지 못하고, 높게 책정된 선진 7개국(A7) 가격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을 약가거품 발생의 대표적 요인으로 꼽았다. 현재의 약가결정구조가 비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고, 복지부가 내놓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 역시 이 같은 한계를 답습하고 있다는 게 보건의료단체들의 주장이다.

복지부는 이 같은 안팎의 문제제기를 일정부분 받아들여 이레사의 가격을 55,003원으로 인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물론 인하된 가격 역시 FSS와 BIG4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제약회사의 반발은 거셌다. ‘아스트라제네카’ 측은 복지부가 ‘이레사’ 약가의 자진 인하를 권고하자, 곧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으로부터 ‘이레사’ 가격인하 집행정지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약가인하 조치 집행정지,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 몫”

아직 본안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법원의 이번 가격인하 집행정지 결정은 향후 약가제도 개선 논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법원의 이번 약가인하 조치 집행정지 결정으로 인해 입게 될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현재 보험에서 제외된 폐암 환자의 경우 ‘이레사’를 먹기 위해서는 한 달에 약값만 185만원을 지불해야 한다.

김준현 건강세상네트워크 팀장은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조정신청을 냈고, 합법적 틀 안에서 약가인하 조치가 내려졌는데, 제약회사가 이런 식으로 뒤집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무엇보다 아스트라제네카 측은 지금까지 누려온 시장 점유율을 낮추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이를 법원이 받아들였다”며 이번 법원 판결을 강하게 비판했다.

‘제약회사 약가결정과정 참여, 약가제도 무력화’ 주장 힘 실려

한편, ‘아스트라제네카’의 소송으로 인해 정부의 약가인하 조치가 중단된 이번 사례는, 미국이 한미FTA 협상에서 요구하고 있는 약가선정 시 제약회사 참여보장과 이의신청제도 마련 등에 반대해 온 보건의료단체들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고 있다. 그간 건약 등 보건의료단체들은 포지티브 리스트가 도입되더라도 미국 측의 약가산정 시 제약회사 참여 보장, 이의신청제도 마련, 특허연장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사실상 새로운 약가제도가 무력화될 수 있다고 우려를 제기해왔다.

지난 달 31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FTA 특위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포지티브 리스트’ 도입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미국 측은 의약품 등재여부와 약가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레사’ 약가인하 조치에 대해 ‘아스트라제네카’ 측이 소송을 제기해 정부의 약가인하 조치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듯, 마찬가지로 약가결정 과정에 다국적 제약회사가 들어오고, 공식적인 이의신청제도가 도입된다면 국내 약가정책은 무력화될 수 있다는 보건의료단체들의 주장은 더욱 더 힘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