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연봉 보험설계사! 억(?)소리

[인터뷰] 이승숙, ‘그 시절 보험아줌마는 없다’

억대연봉의 캐리우먼, 그 화려함에 도전해보세요.

‘보험아줌마’가 넘치는 시절이 있었다. 점심시간 공장에서 밥을 먹고 잠시 쉴라하면 숱한 ‘보험아줌마’들이 라이터를 비롯한 판촉물을 들고 찾아와 단잠을 깨우곤 했다. 때론 토종비결을 가져오고, 오늘의 운세를 가져와 인연의 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피곤한 사람은 아예 인사를 해도 거들도 보지 않고, 심지어 ‘보험 들면 재수 없다’, ‘필요 없다는데 왜 이리 귀찮게 구냐’, 아예 보는 앞에서 보험 상품 광고지를 쫙쫙 찢어버리고 무안을 주어 쫓아내기도 했다.

보험 들면 재수 없어

상냥하게, 마치 보험에 관심 있는 듯 이야기하는 사람도, 들듯 말듯 기를 뺏고, 가슴을 조아리게 만든 뒤, 그저 시간만 때우고 돌아서는 경우가 태반이다.

몇 년 사이, ‘보험 아줌마’는 보기 힘들어졌다. 보험설계사를 비롯하여 온갖 고상한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이제 전문 직업으로 인정되고 있구나, 하며 좋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아줌마가 아닌 직업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게 마땅하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 좋은 것 뒷면에 아픔과 어두움이 어려 있다. 결혼을 하고, 생계의 문제로 여성이 찾을 수 있는 직업은 마땅치가 않다. 한 때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이 보험회사였다. 마땅한 직업이 없을 때 한번쯤은 거쳐 간 곳이 보험회사가 아닐까. 특히 결혼을 하고, 여성이면.

문득 예전처럼 ‘보험아줌마’가 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험회사의 그 높은 빌딩을 만들어주었던, 보험회사의 ‘개미군단’ ‘아줌마부대’는 어디로 갔을까?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이는 ‘억대 연봉’의 ‘아줌마 신화’들로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보험 아줌마, 어디 있나요

내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사람도 숱하게 있다. 전화를 돌렸다. 대부분이 이제는 보험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억대 연봉’을 포기한 걸까? 돈 욕심이 없어서 일까? 게을렀기 때문일까?

주변에서 아주 평균치에 가까운 ‘보험 아줌마’와 인터뷰를 했다. 빚만 지고 망했다는 사람도 있고, 한 몫 챙긴 사람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작게는 몇 달이나 일이년을 넘기고 그만 둔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사람들은 ‘평균치’에서 뺐다.

그럭저럭 평균보다 좀 넘게 수입을 올렸던 사람이다. 경력도 6년. 이 사람 정도면 어느 정도 내부 구조도 알고, 애환과 기쁨도 느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순간, 이 사람이라면 믿고 보험 하나 들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흔 다섯, 이승숙. 언뜻 보면 전혀 고생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목소리도 또릿또릿 하고, 말도 조리 있게 한다. 얼굴은 맑고, 편안하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다. 눈은 이제 열여덟 소녀처럼 밝고, 자그마한 입은 야무지게 생겼다.

서울 원효로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얼굴도 익히기 전에 돌아가셨다. 70년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그랬듯,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은 꿈으로만 남고, 초등학교만을 마쳤다.

야무진 사람을 찾았다

집은 여러 번 철거가 되었고, 무허가 판잣집과 천막집 생활을 해야 했다. 홀어머니는 노점상, 행상 등 억척스럽게 장사를 하였고, 건설현장 미장일도 하셨다. 그는 열다섯 나이에 어린 여성이 가장 취직하기 쉬웠던 봉제공장에 취직하여 시다 생활을 하였다. 청계천과 창신동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77년 여름에 청계천에 와서, 시다 생활 2년 만에 미싱사가 되고, 2000년까지 제품공장, 그리고 의류노동자들과 떨어져 살지 않았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된 청계피복노조에서 서울지역의료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조합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미싱 일을 그만 둔 이유는 팔꿈치가 골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싱을 하려면 팔꿈치를 재봉틀에 대고 제품을 밀어야 박음질을 할 수 있는데,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염증이 생겼다. 이때가 2001년이다.

“팔이 많이 아파 치료를 하러 다닐 때였거든요. 병원을 가는 길에 우연히 보험 하는 언니를 만났어요. 참, 내가 92년에 결혼해서, 94년에 아이를 낳고 쉴 때 잠깐, 아주 쪼금, 보험 일을 했거든요. 그 때 만났던 언니에요.”

또 다른 인생의 만남

보험은 다단계하고는 다르지만, 당시에는 새로 일할 사람을 만드는 것도 보험설계사의 업무 중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구호도 있었다. ‘잘 키운 신입 하나 억대 연봉 안 부럽다.’

보험 일을 시작하면, 우선 자신 먼저 보험을 들게 되고, 친인척과 지인들을 보험에 가입하게 한다. 지금은 금융자산 컨설팅 업무로 사업방향이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인맥을 통한 고객 확보는 보험회사 영업의 90%를 차지 할 정도였다.

새로 한 사람이 들어오면, 그 자체가 보험회사는 고객 확보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새로 들어온 사람 가운데 열에 여덟은 일 년 이내에 그만두고 나간다. 직원의 확충 이상으로 고객 확보의 성과를 보험회사는 거둔다.

“언니가 보험설계사 시험만 한번 쳐 달라는 거예요. 제가 보험회사 구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시험만 봐달라고 부탁, 부탁하는데 모른 척 할 수 없는 거죠. 제가 아파 일도 못할 때고 그러니….”

보험설계사 시험만 봐 달라

증원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확보하는 일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던 때라고 한다. ‘증원만이 살 길이다’라는 구호를 아침에 출근하면 조회 시간에 외치고, 영업을 나갈 정도였다.

“시험에 딱 합격을 한 거예요. 그랬더니 제발 일은 하지 않더라도 교육만 받아달라고 통 사정을 해요. 그렇게 교육을 받다보니, 다른 기술은 없고 미싱은 하기 힘들고 하니 보험 일을 시작 한 거죠.”

교육을 받으면, 영업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어떻게 억대 연봉이 되는가를 성공사례만을 내세워 가르쳐준다. 이승숙 씨는 ‘쪼금’이라도 경험이 있었기에 환상을 갖지 않았지만, 교육을 받으며 꿈에 부푼 사람도 있었다.

“어찌하면 억대 연봉이 된다 하며 비전을 이야기 하죠. 하지만 실패 확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어요. 계약이 성사되어 몇 년씩 쌓이면 엄청난 규모가 되는 거죠. 하지만 계약이 깨졌을 때는 지금까지 받은 수당을 한꺼번에 고스란히 게워내야 한다는 말은 잘 들리지가 않죠.”

억대연봉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계약을 성사시키면, 수당을 적게는 8개월 많게는 24개월에 걸쳐 나눠준다. 하지만 중도에 계약이 해지되면 한 번에 수당을 회사에 반납해야 한다. 그리고 수당을 나눠받다 보니, 중도에 일을 그만 둘 때는 당연히 받아야할 남은 수당마저도 받지 못하는 구조다.

보험설계사에게 ‘유지’는 생명과 같다. 예전에는 계약을 하고, 8개월까지만 해지가 되지 않으면 수당을 챙길 수 있었는데, 갈수록 늘어나 이제는 15개월까지 유지를 해야 한다.

‘유지’를 위해 고객이 납부하지 못하는 달은 자신이 대신 납부하여 보험이 해지되지 않도록 하기도 한다. 여기서 골병이 든다.

“미리 대납을 하고, 고객이 뒤에 준다든지 하면 다행이죠. 그런데 해약을 할 경우 대납한 돈은커녕, 지금까지 받은 수당까지 뱉어내야 하니 죽는 거죠.”

회사는 조기에 해지가 되면 보험사 손해가 막심하다고 한다. “말도 안 돼요. 2년 이내에 해지하면 고객은 십 원짜리 하나 돌려받지 못하죠, 보험설계사는 받은 돈 돌려주죠. 손해는 계약자와 보험설계사지 회사는 손해 보는 것이 없는 거죠.”

보험사 손해? 말도 안 돼

‘유지’가 중요한 것은 다른 수당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경력이 쌓이면 3개월마다 직급을 갱신한다. 월급을 받는 사람은 경력이 쌓여 수당이나 급여가 오르면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깎이는 경우가 없지만, ‘유지’가 되지 않을 경우 계약 수당은 물론 모든 수당과 영업비가 깎이게 된다. 대납을 하면서도 해지가 되지 않도록 발버둥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달은 해약이 밀려들어 십 원짜리 한 푼 가져가지 못한 달도 있어요. 한 달 꼬박 일하고 35만원 받은 달도 있고. 아예 적자나 빚만 느는 경우도 간혹 있어요.”

직급이 오르면 수당이 많아지는 대신 목표 실적 량도 늘어난다. 그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아주 곤란한 경우에 빠진다.

“이게 고리 고리 연결되어 있어요. 나만 돈이 줄면 되는데, 영업소나 팀 전체의 영업비도 삭감 되요, 내가 ‘유지’를 못해 수당이 빠지면, 사무실 내근 직원에 팀장까지 다 영향을 미치죠.”

한 달 수입 0원

그 손해가 혼자가 아닌 전체에 미치게 구조를 만들어 놓다보니, 실적을 위해 가짜 계약을 하기도 한다. “가라로 계약을 해야지, 그것이 안 되면 정신적 스트레스를 엄청 받아요. 매달 말일만 되면 입맛이 없고, 가슴이 괜히 쿵당 거리고, 말로 할 수 없어요.”

동료나 팀장에게 무언의 압력이 들어온다. 나가라, 그만두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팀별로 경쟁 체계이고, 팀 안의 개인 간의 경쟁 체계다. 그 경쟁에서 스스로 도태되어 나갈 수밖에 없다. 있는 동안 쌓아둔 실적은 회사만 챙기고.

“10명 중 살아남은 2명만이 보험회사를 키운 게 아니에요. 중도에 나간 8명이 자신과 가족, 친척을 팔아 회사를 키운 거죠. 아줌마 부대의 힘이죠. 그런데 정신적 고통을 받고 나가는 거예요.”

적게 벌 생각을 하고, 대납과 가짜 계약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욕심이 화를 부른 것 아니냐, 고 물어봤다,

내 주머니 털어 버텨라

“제가 시작할 때 두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대납과 가라 계약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3년은 그렇게 했어요. 최근 2-3년에 그 원칙이 깨졌어요. 당장 오늘 그만 두지 않는 한 어느 정도는 유지되어야 생활을 하잖아요. 생활비라도 만들기 위해, 잘 되겠지 하는 유혹에 수입이 없으니 넘어가더라고요.”

대부분의 보험설계사는 정말 열심히 살고, 허황된 꿈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환경은 갈수록 변해간다. 보험사는 고액 고객에 집중하는 형태로 영업 전략을 바꾸고, 기존에 서민들의 암보험 같은 보험의 수당은 줄이고 있다. 10건을 해도 예전보다 수입이 줄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고액 고객이 얼마나 되겠는가. 외국계 보험사가 들이닥치고, 대기업 보험사만이 살아남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보험아줌마’를 그냥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다.

보험회사는 수당만 줄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10시였던 출근 시간은 9시로 당겨지고, 자유롭던 퇴근도, 5시에는 영업소로 들어와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실적은 무한대로 늘려야 살아남으니,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한 건’을 위해 속도 밸도 다 내놓아야 한다.

‘한 건'을 위해 속도 밸도

출퇴근 시간에 복장 규제, 실적 관리. 직원한테 당연히 기업이 요구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들은 무늬만 노동자이지, 실제는 사장님이다. 4대보험도 되지 않고, 소득신고를 하는 개인사업자. 노동자 의식은 개인 경쟁의 주입식 교육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갈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이 있기도 하지만 경쟁 구조로 이루어지는 보험 영업의 성격은 동료를 마냥 동료로만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일을 하는 보험설계사가 막상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는 어둡기만 한다.

“본의 아니게 보험을 해약하는 사람 있잖아요. 정말 어려워서 보험을 깨는 사람. 너무 안타까워요. 혜택도 받지 못하고, 집어넣은 돈마저 제대로 못 받고….”

이승숙 씨가 가장 기쁜 일은 자신이 설계해 준 보험이 계약자에게 어려울 때 힘이 되었을 때라고 한다. 슬픈 일은 자신이 설계해 주었는데 막상 어려울 때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다.

기쁜 일 슬픈 일

“새로운 상품을 나오면, 기존에 애써 설계해 준 보험을 새 상품으로 바꾸게 만들어야 해요. 정말 이런 일은 욕을 얻어먹어도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보험회사의 끝없는 이익 추구 앞에 보험설계사들은 몸도 정신도 멍이 들어가고 있다. 이승숙 씨는 큰 멍들지 않고 실속 있게 일을 한 보험설계사의 전형이다. 기혼 여성의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나름대로 수입을 올렸다.

“노력에 대한 대가를 떠나 실속 있게 했어요. 처음 시작해 한 3년은 한 달에 150만 원 이상은 가져갔으니. 어디 여성이 그 돈을 벌기가 싶지 않잖아요.”

하지만 갈수록 영업 환경의 변화로 수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6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 두어야 했다.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속내

“이젠 인터넷, 텔레마킹이 우리가 하던 일을 맡고 있어요. 대학을 나온 전문 영업으로 사업방향이 바뀌고요. 여기서 그만 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지금 제가 더 공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하잖아요.”

이승숙 씨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격증이 도입된 초창기에 변액보험사 자격을 땄다. 영업 실적도 중간 이상은 되었다. 그가 그만 둔다고 했을 때, SM이라는 중간 관리자 자리를 제안 했다. 영업보다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이다. 물론 이 자리도 시대의 변화에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제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잖아요. 학력이 걸린 거죠.” 능력 위에 학력이 이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70년대 시다 인생을 시작한 이승숙 씨가 이만큼이라도 버티고, 생활비를 벌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일일 줄 모른다. 편견의 사회에서.

미싱 일보다 몸이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열다섯에 청계천에서 일하며 싸웠던 정신이 그를 최소한 ‘실패한 보험설계사’로는 만들지 않은 것이다.

최소한 실패하지 않은 설계사

“계약을 하면 당연히 1회 차는 보험설계사가 내는 걸로 말해요. ‘처음은 내주는 거죠’ 그래요. 저는 거부했어요. 계약이 깨지더라도. 이런 것 때문에 보험설계사가 오래 버티지 못하여 그만 두고, 골병이 든다고 말하며 돌아섰어요.”

이제야 그의 작은 입이 옹골차고 야무지게 보인 까닭을 알 것 같다.

이정숙 씨가 창신시장을 헤매며 고객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정장을 입어야 하고, 다리고 퉁퉁 붓도록 걷는 일이지만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고,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나, 두툼한 코트 안으로 파고드는 한겨울이나, 비가 오면 우산에 판촉물 가방을 들고, 하루도 쉼 없이 걸었을, 그의 길과 신발과 인생을 그려본다.

그의 신랑은 시다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항거한 뒤 만들어진 청계피복노조를 지키며 아직도 서울지역의류노동조합에서 일을 하고 있다. 생활비는커녕 활동비에도 미치지 못한 상근비를 받으며. 딸 보미는 엄마처럼 맑은 눈을 가지고 잘 커가고 있다.

하루도 쉼 없이 걸은 이승숙

이곳에 고스란히 이승숙 씨의 삶 전체를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6년간의 보험설계사의 긍지와 기쁨, 고통을 고스란히 담지 못한 게 미안하다. 혹 오늘도 열심히 성실히 사는 보험설계사들에게 힘은커녕 누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내 가슴에만 그 아름다운 삶의 천만분의 일만 간직한다. 이승숙 씨의 ‘소설을 쓰면 열권도 넘을’ 소중한 이야기를 담아둔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길가의 돌멩이 하나라도 함부로 차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험 아줌마 아니, 보험설계사를 만나면 내 부모처럼, 내 누이처럼, 그리고 한 시대의 역사를 쓴 당당한 노동자이고 직업인으로 맞이했으면 좋겠다.

7년 전, 햇살 좋은 공장 담벼락에서 받은 판촉물을 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내버린 사람이 이승숙 씨의 이야기를 들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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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명승

    홈페이지에 띄울 관련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보험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일인지 아는지라
    눈물 날 뻔 했습니다.

    보험아주머님, 아니 이 나라 보험업을 여기까지 일구는데 크게 일조하신
    대 선배님들께 삼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승숙 선배님

    비록 보험업계는 떠나셨지만 그 애정이 철철 넘칩니다.
    화이팅 하시고, 건강하십니다.

    감사합니다.

  • 이민구

    이승숙씨는 나름대로 정도영업을 하신듯 합니다만,
    선배세대의 무차별 무분별한 영업행태로 인해 우리 후배세대의
    전문컨설턴트들이 가끔 개차반으로 취급되는 경우를 보아온
    저로선 그리 유쾌한 내용은 아니군요..
    우리나라 보험업을 '일구었다'는 표현이 상당히 거슬립니다.
    상당히 퇴보시킨 상태를 겨우 수습해 나가느라 진땀빼고 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