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조서비스, 노동자·장애인 권리 보장 함께 가야

[노무현정부의 '사회서비스 확충정책'의 허와 실](3)

공공서비스 민영화가 안겨다 준 재앙, ‘콤슨 사태’

최근 일본 최대의 노인요양 업체인 콤슨(comsn)사의 비리사건으로 일본사회는 큰 충격에 빠져있다. 상근인력을 확보하지도 않은 채 허위로 회사를 운영하며 수 억 엔의 지원금을 횡령해왔던 콤슨 사는 지난달 5일 결국 폐쇄 명령을 받고 개업 48년 만에 문을 닫았고, 이로 인해 개호 서비스(일본의 노인요양제도)를 받지 못하는 '개호 난민'이 다량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일본 복지제도의 근간이 휘청거리고 있다. 전국의 사업소에서 노인요양 서비스를 제공해오던 헬퍼(간병인)들이 하루아침에 갈 곳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콤슨 사태는 공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어야 하는 요양제도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민영화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한 재앙으로, 사회서비스 확충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한국사회에도 일종의 경고를 보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작년 9월,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을 발표하면서 간병.보육 등과 같은 사회서비스를 확충하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올해부터 ‘바우처’ 사업 방식으로 노인돌보미, 산모신생아 도우미,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우처 방식의 사업은 사회서비스 확충은커녕 사회공공성을 후퇴시킨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구성원의 요구와 투쟁을 통해 쟁취한 제도마저 그 취지를 퇴색케 한다는 점에서 더욱 큰 문제점을 지닌다.

‘콤슨 사태’, 먼 나라 일일까?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를 통해 살펴본 ‘사회서비스 확충정책’의 허와 실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장애인들의 희망과 의지로 일구어낸 투쟁의 성과물이다. 수년간 끈질기게 한국사회에 울려 퍼졌던 “장애인도 이동하고 싶다! 장애인도 살고 싶다!”는 요구와, 지난해 전국적으로 수십 일간 진행한 노숙농성은 결국 각 지자체로부터 중증장애인의 권리보장과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은 홀로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있어 활동보조는 하나의 당연한 권리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려내었다. 또한 이러한 권리는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의 선심과 희생에 기대어서 결코 찾아질 수 없다는 점, 즉 국가 및 지자체가 책임지는 공공적인 방식으로만 쟁취될 수 있다는 진실을 드러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현재 시행되고 있는 활동보조서비스 제도는 ‘바우처(voucher, 이용권)’라 불리우는 쿠폰(coupon)을 매개로 장애인들과 민간서비스업체가 거래를 맺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바우처는 제공시간판정에 따라 지급되게 되는데, 이 쿠폰을 많이 얻기 위해 장애인들은 스스로의 장애를 과장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사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정부는 바우처를 제공하는 것, 즉 1시간당 7천 원의 서비스 비용을 사업기관에 전달하는 것 외에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되어 안정적인 제도 시행을 위해 필수적인 시설 및 인력 확충의 문제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업체의 경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서비스기관의 규모는 키우고, 이윤창출을 최대화하기 위해 인력 및 서비스는 최소화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비스 제공노동자에 대한 착취, 각종 비리 발생 등과 같은 문제는 필연적인 것이다.

활동보조서비스, 장애인과 노동자가 함께 만들어가야

따라서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 제도의 취지를 살리고, 한국판 콤슨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사회서비스확충제도의 첫 단추를 제대로 다시 끼워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아래 제도가 공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의 편익과 권리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지난 달 본조직을 출범시키기도 한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에서는 제대로 된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를 위해 지속적인 요구와 투쟁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또한 이러한 투쟁은 비단 장애당사자 뿐만 아니라 여타의 사회운동주체들과의 공동투쟁이 되어야 함을 호소하고 있다. 일례로 활동보조서비스제도의 올바른 시행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보조인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활동보조서비스제도는 활동보조인이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정부는 시간당 서비스 단가로 제공되는 7천 원에서 사업기관이 최대 25%를 자신의 수익으로 가져갈 수 있고 그 외의 시설운영비, 활동보조인교육비, 연월차 등의 휴가와 야간과 공휴일 및 연장근로에 대한 할증, 산재, 퇴직금, 이동거리의 고려 등 모든 문제를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을 통해 사회양극화와 빈곤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선전만 해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집단적으로 폭로하고 기본적인 노동권을 쟁취해나가기 위한 투쟁은 아직은 활동보조인들에게는 ‘과제’로만 남겨져있다. 활동보조인 등과 같은 사회서비스 분야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운동진영의 대응은 아직 미흡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보조인의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장애인의 이용자로서의 권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활동보조인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장애인 이용자가 마음 편히 필요한 활동보조를 제공받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대로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가 장애인의 요구와 달리 파행적으로 운영된다면, 활동보조인의 노동권 또한 제약되게 된다. 따라서 제대로 된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 쟁취를 위한 투쟁은 비단 장애 당사자들의 몫으로만 남겨질 것이 아니라 보다 넓게 확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회서비스 제도는 정부의 기만적이고 시혜적인 대책이 아닌, 노동자 민중의 권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노동의 권리는 박살나고, 서비스 질은 하락한다”

[인터뷰]이원교 성북자활센터 소장, 양영희 중랑자활센터 소장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비장애인들에게 있어 활동보조서비스는 생소한 감이 있다. 활동보조서비스가 왜 필요한지, 장애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달라

이원교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정부의 장애인복지 담당자들 그리고 비장애인들은, 왜 23명의 장애인이 23일 동안 하나의 복지서비스를 위해 목숨을 걸어가며 단식투쟁을 했는지에 대해 이해 못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은 아직까지 활동보조서비스를 ‘자원봉사’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활동보조서비스는 그간의 자원봉사와는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예컨대 자원봉사자는 장애인을 돕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주체는 장애인이 아니라 봉사자가 되고, 봉사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말에 장애인이 외출을 하고 싶어도 봉사자가 시간이 안 되면 외출할 수 없다. 장애인이 봉사자의 시간에 맞춰야 한다. 주객이 전도된 그런 봉사의 개념이 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이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인식이다. 아직까지 장애인을 동정과 시혜로 접근해야 할, 보호와 치료로 이끌어줘야 하는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복지 시스템에서는 장애인 당사자의 욕구와 그 사람의 주체적인 인식은 전혀 수용되지 못한다. 반면, 활동보조서비스 개념은 이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가 되어서 내 시간에 맞춰서 비장애인의 보조를 받는 시스템이다. 정부가 복지예산을 집행하면서, 장애인의 삶을 보조하는 사람들에게 수당을 지급해주는 전혀 새로운 복지 시스템이다.

  이원교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이정원 기자

양영희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활동보조서비스는 의사소통, 일상생활 보조 등 다양하다. 이렇게 되면 자원봉사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자원봉사 등과 어떻게 분리될 것인가를 짚어야 한다. 활동보조는 단순하게 일상생활 보조가 아니라 자기결정과 욕구에 중심을 둬야 한다. 내가 못 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한 것이 활동보조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회참여와 활동에 목적을 둬야 한다. 물론 활동보조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장애인의 생존권이다. 그것과 더불어 장애인의 사회적 활동을 넓혀갈 수 있는 서비스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들의 사회활동이나, 다른 활동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다양한 사회활동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활동보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활동보조서비스를 받고 있는 시간은

이: 처음에 20시간 판정을 받았고, 이의 신청을 해서 현재는 월 40시간을 받고 있다.

양: 활동보조서비스는 5월에 신청을 했는데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0시간이었다. 다시 6월에 이의신청을 해서 월 40시간 판정을 받았다. 5월 당시에 판정표가 굉장히 엄격해서, 전신마비 장애인이거나, 장애가 이중삼중 있어야 60시간을 받을 수 있었다. 나처럼 혼자 밥 먹거나 할 수 있으면, 아예 받지를 못했다. 내가 일을 하고 있다거나, 독립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주변의 대부분의 중증장애인들이 20시간 또는 40시간 밖에 받지를 못한다.

  양영희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이정원 기자

40시간으로 충분한가? 현재 받고 있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되고 있다고 보는가. 문제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인지

이: 올해 초 복지부와 장애인 당사자들은 활동보조서비스는 복지서비스가 아니라 장애인 생존의 권리라는 점 그리고 활동보조서비스 이용시간을 최대 80시간으로 하자는 것에 합의했다. 물론 우리는 이용자가 원하는 만큼의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복지부가 물러서지 않아 우리가 양보를 통해 80시간으로 합의했다. 여기에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이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복지부는 이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일단 판정시간표와 관련된 문제점이 있다. 현재 활동보조서비스 시간판정은, 동사무소 직원이 장애인을 찾아가 살펴보고 제공되는 시간을 매긴다. 최소 20시간에서 최대 80시간. 20-40-60-80시간 등으로 총 네 개의 등급으로 나눠져 있다. 한달에 20시간이면, 하루에 1시간30분 정도다. 이 시간이면 활동보조인이 장애인의 집에 와서 세수시키고, 밥 한 끼 먹으면 그만이다. 1급 지체장애인이 최대로 받는 시간은 60시간이다. 최대 80시간으로 되어있지만, 80시간을 받는 장애인을 찾기 어렵다. 80시간을 받기 위해서는 사지마비에 정신지체장애 등 중복장애인의 경우에는 가능하다. 경추장애인의 경우에는 혼자서 밥도 먹지 못하고, 얼굴이 가려워도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들에게 최대 60시간 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이 시간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하는 것은 활동보조인 조차 인정한다.

양: (제공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활동보조서비스는 자립생활에 기반한 서비스의 일종이다. 그러면, 그 자립생활에 대한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40시간 가지고는 가사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빨래, 청소 이런 것들을 전혀 할 수 없다. 신변처리 정도가 가능하지, 음식을 만들거나 목욕 이런 것들은 할 수 없다. 따라서 40시간은 나에게 ‘자립생활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살아라’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하루로 치면 1시간 약간 넘는데, 활동보조인이 집에 와서 밥만 해주고 가면 끝이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인에게 선택권이 없다.

활동보조는 일상생활에 마이너스되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때문에 자부담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장애인은 못하는 것을 활동보조를 통해 하는 것이다. 내가 밥 먹기 위해 숟가락 드는데 돈 지불하지는 않는다, 화장실 가는데 돈 지불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일상적인 생활들을 보조하는 서비스를 받는 것은 선택권이 아니라,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부담은 없어져야 한다. 지금 4만 원을 내는데, 이게 두 달 만 밀리면 8만 원이다. 장애인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자기 손안에 들어오는 돈은 없다. 현재 자부담은 장애인들에게 기본적인 서비스도 소비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활동보조서비스가 장애인 권리로서 일상생활 영위할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하는데, 그게 내가 그것을 아무리 쓰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못 쓴다. 금액도 문제가 되지만, 원론적으로는 자부담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 물론, 기본적인 양 외에 내가 여행을 간다거나, 내가 기본적인 권리로서 받는 양 외에 더 추가되는 것에 대해서는 일정정도 자부담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만큼은 자부담이 없어져야 한다.

현재의 활동보조서비스 하에서는 서비스를 받는 장애인당사자의 문제도 있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문제점도 많이 지적되고 있다

이: 내가 활동보조서비스를 20시간 받을 당시, 활동보조인이 1시간30분 활동보조를 하기 위해 집에 온다. 그 시간에 활동보조인은 나를 씻기고 옷 갈아입히는 게 전부다. 그 노동자가 하루에 1시간30분 활동보조하기 위해 왔다갔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2-3시간이다. 그런데 이들이 받는 시간급여가 5천600원에서 6천 원 정도다. 하루에 1만 원 벌기 위해서 왔다갔다 3-4시간을 써야 하는데 누가 활동보조를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시간의 문제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들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입장에서도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보건복지부의 경제적인 논리, 효율성의 논리로 인해 장애인 이용자의 생존권과 활동보조인의 노동권과 인권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는 얘기다.

활동보조인의 노동권이 담보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장애인들이 받는 활동보조서비스 질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 아닌가

  이정원 기자
이: 그렇다. 장애인 당사자가 활동보조서비스를 60시간 받는다고 할 때, 이를 활동보조하는 노동자의 한달 수입은 35만 원도 안 된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35만원 받고 누가 이일을 하겠는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한달에 60시간 활동보조를 하루에 두 건 이상 해야지 그나마 최저임금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 돈을 더 벌려고 하면, 하루에 3건은 해야 된다. 이렇게 되면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도 훌쩍 넘어선다. 결국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가 이 일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최악의 중노동을 해야 된다는 얘기다. 여기서 바로 활동보조인의 노동의 권리는 (좀 과격하게 표현해서) 완전히 박살난다는 것이고, 이는 서비스 질 하락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양: 활동보조인이 똑같이 80시간을 하더라도, 한 사람에 대해 80시간을 하는 것과 두 사람에 대해 40시간 씩 80시간 하는 것은 노동 강도가 다르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 80시간을 하는 것이 힘이 덜 든다고 한다. 또 한사람에게 익숙해지면, 그 사람에 대해 파악이 되니까, 장애정도가 문제가 아니다. 이용 장애인에게 어떻게 해주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정도에 따라 힘든 게 아니라, 얼마만큼 그 사람에게 적응이 되냐가 문제가 된다. 때문에 활동보조서비스가 안정화되려면, 최대 80시간이 아니라, 최소 80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도 안정적인 보조를 받을 수 있고, 활동보조노동자도 그것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는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활동보조 노동자에게 생활임금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이용자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 모두에게 안정적인 시간으로서 최소 80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를 필두로 참여정부는 그간 노동연계복지,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 등 시장과 복지를 연계시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왔다. 그런 측면에서 활동보조서비스 그리고 장애인 복지영역의 경우는 어떠하다고 보는가

이: 이미 복지정책의 기본이 공공서비스에서 민영화로 넘어와 있다. 한국사회에서 사회복지는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수익사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활동보조서비스 역시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차원에서 바우처 제도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타난 가장 큰 문제점은 이용자의 자부담이다. 내 경우도 한달에 자부담으로 4만원을 낸다. 비장애인들 입장에서야 한달에 4만 원이 별 거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하고 있는데, 4만 원 내기가 쉽겠나?

우리의 요구는 활동보조서비스는 단순한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중증장애인이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애인의 인권의 문제다. 복지부 역시 장애인 당사자들과의 합의를 통해 활동보조서비스를 장애인들의 권리로 인정했다. 그러나 복지부는 절대 자부담만은 양보 못 한다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의 공공서비스와 사회복지 정책은 굉장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즉 시장에서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에는 더 이상 재정을 들이지 않겠다는 것이 근본 발상이다. 이런 상태로 복지제도가 소위 말하는 세계화와 거대자본에 눌려서 후퇴하게 된다면, 장애인 당사자들이 주체적으로 겨우 만들어 놓은 활동보조서비스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안심할 수 없다.

  이정원 기자
양: 권리로 인정했다면, 그것을 시장경제에 맡기는 것이 타당한가? 시장경제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있고, 투자가 있고, 그래서 가격이 책정된다. 계속 강조하지만, 활동보조는 장애인에게 있어 생존의 권리다. 시장의 맡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중개기관이 어떤 의미인가라는 고민이 있다. 센터, 복지관, 자활후견기관 등이 활동보조서비스 중개기관이 아니라 파견업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파견업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모든 책임은 국가에게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모든 책임이 중개기관에 있다는 것이다. 즉 중개기관은 파견만 하고, 그것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한다. 지금은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이용자 신청을 받는데, 활동보조 신청도 구청에서 받아야 한다. 활동보조 모집, 파견, 임금 등의 업무가 모두 중개기관의 몫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일어나도 국가가 어떤 책임도지지 않는다.

활동보조서비스 관련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이: 제발 부탁이니 엄살 좀 떨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복지부는 항상 지금 서비스를 확대하면 이후에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든다는 핑계를 된다. 그런데 한국의 장애인들은 시설에 갇히고, 가족의 반대에 부딪쳐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온다.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이 안 된 상태에서 예산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이용자들은 한정된다. 복지부가 말하는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하다는 때가 과연 실제로 올지도 의문이다. 더 이상 정부가 장애대중을 속이고, 경제적 논리로 장애인의 요구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양: 시간 좀 많이 달라. 시간과 자부담이 가장 절실하다.

그간 장애인 당사자들의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기 위한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성과와 한계를 짚는다면

이: 몇 년 간의 활동보조투쟁을 통해 일정부분 성과도 있었다. 바로 활동보조서비스의 제도화와 권리로서의 인정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부딪치는 것이 이 사회에는 아직까지 장애인들에 대해 ‘너와 나는 다르다’는 식의 선입견이 깔려있다. 노동시장은 아직도 장애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내가 직접 한강다리를 기어서 건넜고, 23일 단식을 했고, 삭발도 했다. 사실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안 해본 게 없다.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이 장애인당사자들의 요구를 처절하게 알려냈다는 것에 대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

부족했던 지점은 센터가 활동보조서비스의 중계기관이 되면서, 활동가들이 사업에 매몰되고 있다는 것이다. 센터가 활동보조 중계 사업 등에 치우치면서, 현장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개인적인 고민이 있다.

양: 그간의 투쟁의 성과로 사회적으로 활동보조가 장애인의 생존의 권리로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 점은 분명한 성과다. 한편, 그간의 투쟁으로 활동보조서비스에 대한 기본적인 큰 틀은 마련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적 고민들이 부족했던 거 아닌 가 싶다. 활동보조서비스에 대한 이슈화는 시켰지만, 그것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활동들이 부족한 점이 있었다. 즉 중증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시간이 얼마 만큼이고, 그 분들에게 어떤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지 등등. 정책적 대안에 대해 놓치고 간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끝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중심으로 장애인 운동의 방향 또는 과제와 관련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이: 자립생활센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립생활센터를 운영하는 적극적 목표는, 센터는 곧 중증장애인들이 투쟁을 할 수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전교조는 학교, 노동자는 공장이 현장이라면, 중증장애인들이 투쟁하는 현장은 어딘가? 그것은 집도 아니고, 시설도 아니다. 지금까지 그 투쟁의 현장이 없었기 때문에 중증장애인의 투쟁의 요구가 촉발될 수 없었다. 중증장애인들의 요구와 이를 투쟁을 통해 표출시키기 위해서는 현장이 필요하고, 그것이 센터다. 자립생활은 운동이지, 이념이 아니다.

또 활동보조서비스는 중증장애인의 생존권을 얘기하지만, 장애인만이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것 아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활동보조인의 노동권 문제도 센터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장애인들의 요구를 센터가 수용한다면,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활동보조 노동자들의 고민과 문제제기는 어디서 수용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든다. 이 고민을 센터가 함께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가 인권적 차원에서 제대로 시행된다면, 활동보조인과 이용 장애인이 함께 발맞춰 가는 하나의 장이 필요하고,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 지금의 장애인 복지는 재활이나 시설이 아닌, 자립생활을 위한 사회적 기반조성이 되어야 한다. 활동보조서비스가 가장 밑바탕으로 정비가 되어야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이게 잘되면 나중에 주거, 소득보장 문제 등도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 궁극적 목표는 장애인도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 활동보조서비스의 안착이 그 첫걸음이다.
덧붙이는 말

문설희 님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교육부장으로, 사회서비스공대위 교선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태그

장애인 , 활동보조 , 사회서비스 , 이원교 , 양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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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권 기자, 문설희(철폐연대)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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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은지

    전 이 기사에 정말로 감동받았습니다
    장애인과, 노동자를 차별했던 시대가 있었던거 같은데, 지금처럼 인권을 존중해준다니 정말 기쁜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인데 요즘 학교에서 인권배우는데, 이런 기사를 읽다니 정말 영광이네요.

  • 장윤숙

    사회복지사를 꿈꾸고 활동 보조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일을 하면서 회의가 듭니다 장애우는 사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 너희가 돈을 받는게 장애를 가진 나덕분아닌가?중개 기관인 복지사도 장애우 편에서 서는 걸 보고 활동보조인의 갈 곳은 어디인가 ..우리도 세금을 내는 시민이고,장애우는 항상 약하고 피해를 본다고 하는데 그런분도 있지만 비장애인이 저도 장애가 없기에 이런면에서 동정은 받지못합니다.
    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의 사장이라는 생각이 맞습니까?하고 물으니 복지사는 당연히 "예"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전 이해 할수가 없습니다 수평이 아니고 상하 즉 직장의 사장이고 직원이라요.
    복지사가되어 이 일을 하는 중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 회의를 가지고 중간에 그만 둔다는 말이 실감이 갑니다..
    권리만 내세우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회는 진정한 복지 국가가 될수 없으며, 서로 양보가없고 나의 아픔만 내세워도 분노만 크질 것입니다
    활동도우미가 60시간의 교육을 받듯이 이용자 또한 그에 준한 교육을 받아야 하고 복지사도 중재자로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가슴으로 안길 원하며~~~이 글을 씁니다

  • 활동보조인

    복지사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위에글, 수정 부탁드립니다.
    장애우라는 말은 쓰시면 안됩니다.인권침해 입니다.
    장애인이라고 수정해주세요~!

  • 사회복지

    활동보조인 노동권차원에서 스트라이크하면 장애인이 볼모가 됩니다. 장애인을 위한 제도가 장애인을 볼모로 정상인의 노동권익만 추구하는 제도가 될 것 같은 염려가 앞섭니다. 또한 표현능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에게 서비스가 제대로 되는지는 누가 체크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