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끝내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 7일 이 전 총재는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처절하고 비장한 심정“이라며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잃어버린 10년을 반드시 끝내겠다”고 ‘대선3수’에 임하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출마설이 나온 이후 이 전 총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범여권 모든 후보를 단숨에 제쳤다. 또 그의 출현에 대권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도 흔들렸다. 이 전 총재의 출마설이 나돌자 이 후보의 지지율은 10-15% 가량 하락했다. 더군다나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 전 총재의 지지자들은 연일 그의 출마를 ‘펌프질’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조선일보>까지 공격하며, 이 전 총재의 출마를 종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쪽’ 이회창은 결국 ‘대선3수’ 도전장을 디밀었다. 그러나 그의 ‘대선3수’ 행은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제 정당, 이회창 출마에 십자포화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각 정당들은 이 전 총재를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최재천 대통합민주신당 선대위 대변인은 “이회창 씨는 아직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해명하지 않았다”며 “이미 심판을 했던 국민의 뜻을 무시하는 극단적 권력욕망은 곧 국민에 대한 모욕”이라고 이 전 총재를 맹비난했다.
민주당도 이날 논평을 통해 “시대착오적 반공구호를 앞세워 개인적 한풀이에 나선 사람을 어느 국민이 지지하겠는가”라고 물으며 “차떼기 범죄로 취득한 불법대선자금의 잔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의혹에 대해서 먼저 해명해야한다”고 비판했다.
박용진 민주노동당 선대위 대변인도 이 전 총재의 출마에 대해 “한때 대쪽판사 이미지를 자랑하던 이 전 총재가 남북평화시대의 쪽박을 깨려는 반공투사로 돌아오는 시대의 코미디”라며 “자신이 만든 당을 배신하고 근거 없는 반공주의로 무장해서 출마를 강행한 것은 정당정치도 정치도의도 사라진 한국 정치판의 ‘절망의 화룡점정”이라고 꼬집었다.
한나라당, 끝까지 ‘존경하는 총재님’ 믿었건만..
이른바 범여권과 민주노동당 뿐만이 아니다. ‘배신’을 당한 한나라당은 분노와 허탈감에 휩싸인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나라당은 전날 까지 이 전 총재를 향해 연신 “믿는다”는 메시지를 건네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7일 새벽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직접 이 전 총재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이 후보는 이날 이 전 총재의 자택을 직접 찾았으나, “존경하는 총재님, 제가 부족한 탓이라고 여겨지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출마 선언) 전에 통화라도 하고 싶습니다”라는 짧은 메모를 남긴 채 돌아서야 했다.
또 한나라당 의원 일동은 이날 오전 국회 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어 “어떠한 원칙과 명분도 없이 출마하는 것은 국민의 정권교체의 염원을 짓밟는 행위”라고 이 전 총재의 대선 불출마를 강력 촉구하기도 했다.
발등 찍히자 “대권병, 대통령병, 새치기, 뒤통수 치는 반칙” 공격모드로 전환
그러나 이 전 총재는 예고된 대로 이날 오후 탈당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출마 저지를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한나라당은 빠르게 공격 모드로 전환하고 나섰다.
강재섭 당대표는 이날 오후 긴급 소집된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전 총재를 향해 “꼭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야 국민의 여망을 받들 수 있고, 지나간 10년을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야말로 대권병이고 대통령병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강 대표는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에 대해 “이것은 새치기이다. 뒤통수를 치는 것이고 변칙을 넘어선 완전 반칙”이라며 “그런 식으로 판단하신 분이 어떻게 대법원 판결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사람을 판결할 수 있겠나”고 성토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도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며 “그 분(이 전 총재)을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몸을 바치고 피땀을 흘렸던 당원들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 밖 임무 돕는 사람 해당행위자로 규정”... ‘昌 효과’ 사전 차단
나경원 대변인은 이날 비공개회의 결과브리핑을 통해 ”이 전 총재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만큼 한나라당과 이 전 총재는 완전히 분리되었다”며 “이제부터 이 전 총재 대선 출마의 부당성을 알리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8일 오전 강재섭 대표가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이 전 총재 출마와 관련된 입장을 밝힌다. 뒤이어 한나라당 고문단은 이 전 총재를 항의 방문하고, 당협과 시.도 단위별로 이 전 총재 출마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어 나 대변인은 “당내에 있으면서 사실상 당 밖의 임무를 돕는 사람은 해당행위자로 규정하여 엄벌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이 같은 한나라당의 결정은 사실상 이 전 총재를 ‘공적’으로 규정하고 전면전에 돌입하는 한편, 이 전 총재 출마에 따른 내부 균열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이회창, “중간에 빠져나오겠다는 생각으로 전장에 임하는 장수 없다”
한나라당의 들끓는 분노에 대해 이 전 총재는 ‘보수후보 단일화’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으니 이해해달라는 분위기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과 이 후보와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잘되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향한 선의의 경쟁 관계로 가고자 한다”며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이 길(후보단일화) 밖에 없다는 상황이 올 때는 살신성인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전 총재는 “중간에 빠져나오겠다는 생각으로 전장에 임하는 장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나도 도중에서 적당히 그만 두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고 ‘대권3수’에 임하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 이명박-이회창 간 격돌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언젠가 뜻 통하는 날 반드시 올 것”
'보수격돌'의 서막이 올랐지만, 현재로서 이 전 총재는 ‘우군’이 없는 상황이다. 국민중심당이 이 전 총재에게 연대 메시지를 간헐적으로 던지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때문에 이 전 총재와 박근혜 전 대표의 연대를 점치는 관측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 전 총재도 박 전 대표의 지지를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그는 “박 전 대표가 나를 지지하고 또 동조해주면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향과 신념에 있어서는 박 전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또 그는 “어느 날엔가 서로 뜻을 통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고 있다"고 박 전 대표와의 연대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이 전 총재의 등장으로 대선판도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이로써 한나라당과 범여권 양쪽 모두 지리멸렬한 이합집산을 또 다시 반복할 전망이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더욱 싸늘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