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화합선언' 민주노총 안에 너 있다

[기자의눈] 민주노총 도덕성 위기 때 보수노동계 목소리 강해져

많은 언론이 지난달 18일 경주의 한 콘도에서 열린 현대중공업노동조합 수련회를 주목했다. 오종쇄 현중노조 위원장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올해 임금협상을 조기에 마치겠다”고 말했다. 교섭권을 회사에 위임하는 ‘무교섭’방침이었다.

대의원 수련회를 마친 현중노조는 지난달 23일 현대중공업 사내 체육관에서 조합원 8천여 명이 모여 ‘2009년 임금요구 기조설명회’를 열었다. 같은 날 서울 여의도 노사정위원회에선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이수영 경총 회장, 이영희 노동부장관 등이 참석해 ‘노사민정 합의문’을 발표했다.

대다수 언론은 서울 도심에서 열린 ‘노사정 화합선언’보다 제조업이 밀집한 울산의 ‘노사 화합선언’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현대중공업노조 '2009년 임금요구 기조설명회' 모습 [출처: 울산노동뉴스]

"교섭권 위임, 갑작스런 행보"

현중 노조의 일부 조합원들은 오종쇄 위원장의 ‘2009년 임금요구 기조설명회’장에서 교섭권 위임에 반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의원과 조합원 손에 밖으로 쫓겨났다. 쫓겨난 조합원 중 한 명인 A씨는 오종쇄 위원장의 갑작스런 행보에 의문을 제기했다.

“노조는 2월초 소식지에서 회사가 작년에 2조 원 이상의 흑자를 냈다고 했어요. 3월에 회사 창립기념일이 있고 그 전에 주주총회가 열려요. 이런 맥락으로 봤을 때 노조가 흑자 얘기를 꺼낸 건 추가성과금을 타내겠다는 의지로 보는 게 일반적이거든요. 근데 보름도 안 지나 위원장이 대의원수련회에서 교섭권 위임카드를 꺼낸 거예요. 대의원수련회 전에 권용목 전 위원장(뉴라이트신노동연합 상임대표) 장례위원으로 오종쇄 위원장이 일했어요. 그 자리에 정계, 재계 인사들이 많이 왔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전까지 아무 이야기도 없다가 나온 갑작스런 발표라...”

오종쇄 위원장은 지난달 13일 심장마비로 별세한 권용목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상임대표 장례에서 호상을 맡았다. 장례위원장은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이 맡았고 고문으론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 서경석 목사, 박홍 신부 등이 함께했다. 정몽준, 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빈소를 찾았다. 발인은 오종쇄 위원장의 파격 발언 하루 전인 지난달 17일이었다.

故 권용목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상임대표는 “변화된 노동환경에서 80년대식 노동운동은 안 된다”며 민주노총을 강하게 비판하며 2006년 뉴라이트신노동연합을 창립했고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대표를 맡기도 했다. 뉴라이트신노동연합을 창립하기 전 그는 87년 노동자투쟁의 도화선이 된 현대엔진(이후 현대중공업으로 합병)노동조합 초대 위원장과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맡았다.

정연수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 현중노조 지지

지난달 23일 현중노조 소식지에는 “새로운 노동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한 발 앞서가는 현중노조에 큰 박수를 보낸다”는 정연수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위원장의 지지선언이 실렸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지난달 9일 도시철도노조, SH공사노조 등 서울시 산하 5개 공기업과 함께 ‘노사정 화합선언문’을 발표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작년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총파업을 벌였지만 합의안이 조합원 총회에서 부결돼 김영후 위원장을 비롯한 15대 지도부가 총사퇴했고 얼마전 16대 위원장으로 정연수씨를 뽑았다.

  2008년 11월 서울지하철노조 파업 당시 /참세상 자료사진

정연수 씨는 14대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 됐다. 정 위원장은 14대 노조위원장이었던 2007년 대선 투표일 3일 전인 12월 16일 오종쇄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 故 권용목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상임대표 등과 함께 당시 이명박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정연수 위원장은 전 배일도 전 위원장(전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비슷한 노선으로 노조를 운영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배일도 전 위원장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노조위원장을 맡았고 2000년 서울지하철노조 최초의 무파업선언을 했다. 배씨는 故 권용목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상임대표와 마찬가지로 서울지하철노조 초대 위원장이었고, 전해투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전노협 시절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었다. 배씨는 노조위원장 임기를 마친 다음해인 2004년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2006년 한나라당 노동위원회 출범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어지는 '노사화합', 비정규직의 눈물 얼마나 닦을 지

언론은 올해 현중노조와 서울지하철노조처럼 '노사화합선언'을 한 노사를 일제히 큰 기사로 보도하고 있다.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소속의 영진약품노동조합도 단체협상을 유보하는 '노사화합선언'을 지난달 26일 발표했다. SK노동조합 STX팬오션 해상노조 등도 영진약품노조와 비슷한 '노사화합선언'을 3일 발표했다. 이들 중에는 새롭게 '노사화합선언'에 참여한 노사가 있는가하면 몇 년째 이어진 곳도 있다.

이들 노사가 '노사화합선언'을 하면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건 일자리 지키기다. 경제위기에 노동조합이 임금 및 후생복지 등을 양보해 회사를 살리고 일자리를 지켜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단체협상을 유보한 영진약품 노사는 지난 2004년 80여 명이 명예퇴직을 합의한 바 있다. 이 회사는 2008년 흑자로 돌아섰지만 명예퇴직자가 회사에 복귀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종쇄 위원장은 지난 2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80년대의 파업은 노동자가 박봉과 장시간노동에 억압적 분위기에 시달렸기 때문에 국민이 불편을 감내해 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대중은 없고 이념만 남아있다"고 투쟁중심의 민주노총을 비판했다. 그리고 "더디 가더라도 비정규직의 근로환경 개선에 정규직이 나서야한다"고 했다. 노동계도 정치권도 모두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뉴라이트신노동연합도 비슷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중공업노조와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중심에는 정규직노조 전, 현직 명망가가 있다. 물론 정규직만으로 구성돼 있다고 비정규직의 근로환경 개선을 등한시 한다고 잘라 말할 수 없다.

  홈에버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투쟁 500일을 맞아 찍은 손도장 /참세상 자료사진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나서야 투쟁을 통해서건 화합을 통해서건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반영할 수 있다. 강성노조, 귀족노조로 낙인찍힌 현대차의 경우 비정규직노조가 생기면서 다소나마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이 향상됐다. 1년 넘게 투쟁해 복직한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이랜드일반노동조합에서 홈플러스테스코노동조합으로 변경), '비정규직이 손을 놓지 않는 한 함께 하겠다'며 정규직 지도부의 대량해고를 감수하면서 비정규직 복직을 이뤄낸 뉴코아노조의 모습을 '노사화합선언'을 쏟아내는 이들이 얼마나 참고할 지도 미지수다.

민주노총 위기때, 보수 노동계 힘 얻어

금속노조는 지난달 27일 긴급 선전물을 통해 "안전화 하나 바꿀 힘이 없는 노조에 민주노조운동을 팔아먹은 떡값은 지불되지만 그 대가는 '노예의 삶'이다. 경제위기가 지속되면 힘없는 노조가 고용을 지켜낼 리가 만무하다"고 현중노조를 비판했다. 민주노총의 논리도 마찬가지다.

비판에 앞서 민주노총이 얼마나 힘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지난 토요일 3만 명이 모인 노동자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지만 민주노총은 '성폭력 사건'으로 내홍을 겪은 뒤 비상대책위 체제로 운영중이다.

  2월 28일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모습 /참세상 자료사진

뉴라이트신노동연합은 민주노총이 2005년 한해를 기아차 채용비리, 현대차 채용비리,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사건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다음 해인 2006년에 출범했다. 현대차 신노동연합회가 출범하고 현대차노조의 파업을 공개 비판했던 2006년 말과 2007년 초도 현대차노조 기념품 비리, 이헌구 전 현대차노조 위원장 금품수수 사건이 터진 직후였다. 민주노총이 도덕성으로 흔들릴 때마다 보수 노동계는 큰 힘을 얻었다.

지난달 23일 같은 날 나온 '노사민정 합의문'보다 현중노조의 교섭권 위임이 더 주목받는 건 '선언'이 아닌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이 현중노조를 비판하고, 그 비판이 대중적 설득력을 얻기 위해선 행동이 필요하다.

경제위기는 다가왔고 한 곳에는 '노사화합'을 한 곳에서는 '노조로 뭉치자'고 한다. 누가 더 많은 설득력과 지지를 얻을지는 '행동'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