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책9] 드레퓌스, 진실과 허위의 역사

진실을 뒤덮은 편견의 프랑스

드레퓌스-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 (니콜라스 할라즈, 황의방 번역, 한길사, 1978년, 327쪽)

1894년 10월 31일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프랑스의 육군 대위 드레퓌스가 체포된다. 프랑스는 그를 둘러싸고 이후 12년 동안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1906년 무죄가 밝혀지고 모든 것이 원 상태대로 돌아갔다. 드레퓌스 사건의 또다른 주역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고 결국 영국으로 망명해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사건의 끝을 보지도 못한 채 1902년 가을 가스중독으로 죽어갔다.

졸라는 1898년 1월13일자 끌레망스의 ‘로로르’지 1면에 ‘나는 고발한다’를 실었다.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어떤 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고지 80장 분량의 이 격문이 실린 로로르 지는 평소 발행부수의 10배가 넘는 30만부가 팔렸다. 졸라는 “광기, 어리석음, 기괴한 상상력, 비열한 경찰 근성, 종교 재판 식의 매도, 전체적인 폭압으로 뒤흔들렸고, 몇몇 장교와 장성들의 영달을 위해 국가 전체가 강철 군화에 짓밟혔으며,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국가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질식됐다”고 토로했다.

드레퓌스 대위는 진보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극우도 아닌,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프랑스 육군대위였다. 군의 위신과 법정의 잘못된 권위에 눌려 유태인 드레퓌스는 사회적으로 감금당했다. 이 사건으로 자유, 평등, 박애를 내걸었던 프랑스의 혁명이념은 말짱 거짓이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진실이 허위와 가식에 둘러싸여 프랑스 전체를 함몰시킬 뻔한 위기 속에서 프랑스 젊은이들이 보여준 인종적 편견과 파시즘적 사고와 행동은 오래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낡은 기득권 세력이야 으레 그러려니 여기면 그만이지만 드레퓌스를 “총살시키라”고 외치며 콩코드와 샹젤리제 거리로 몰려 나왔던 110년 전 프랑스 청년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진실이 허위와 가식에 둘러싸여 허위가 진실을 덮고 있긴 한국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서 이 책은 제목에 ‘드레퓌스’란 이름 뒤에 ‘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저자 할라즈는 1895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체코와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공부하고 194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여러 신문의 외국 특파원을 지냈다. 번역자 황의방은 서울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신문대학원 졸업 후 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다. 이 책은 1978년 9월 5일 한길사가 출판했다.

1978년 이 책이 번역 출간됐을 때 언론인 송건호는 “드레퓌스 사건은 오늘 우리들에게 ‘진실’만이 역사를 창조 발전시킨다는 명제를 다시 확인시킨다”고 했다. 김동길 당시 연세대 교수는 “질서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권력에 짓밟혔던가”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이후 김 교수는 권력에 짓밟히는 ‘선량한 시민’의 편에 서기보다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에게로 자신의 행보를 옮겼다.

이 책 앞 부분(76쪽)에도 이런 이율배반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나온다. “유명한 작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이며, 군국주의 보수였던 레온 도데는 드레퓌스의 불명예 퇴역 사실을 한껏 비꼬았다.” 레온 도데는 가슴이 따뜻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기엔 자유주의자였으나 문학가로 변신하면서 군국주의 보수 논객으로 돌변했다.

  드레퓌스 대위
드레퓌스 사건은 언론의 천박한 모습도 과감없이 보여준다. 큰 사건이 터질때마다 떼거리로 몰려가 생각없이 마구 휘갈리는 언론은 이 사건에서도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않고 엉터리기사를 쏟아냈다.

(85쪽)“드레퓌스의 형 마띠외는 동생을 구하려고 영국의 신문 ‘사우드 웨일즈 아거스’에 동생이 악마도(수감지)를 탈출했다는 허위기사를 싣게 했다.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은 사실확인도 않고 기사를 받았고, 파리의 모든 신문들도 그 뒤를 따랐다. 우파 ‘자유언론’은 드레퓌스를 섬에서 탈출시켜줬다는 가공의 인물 ‘헌터 선장’의 인터뷰까지 실었다. 드레퓌스는 섬에서 탈출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헌터 선장이란 인물이 있을 수도 없었다.

(139쪽)“가톨릭계 프랑스 청년(우파)들은 드레퓌스를 사형시키라고 집회까지 열었다. 유태인을 군과 공직에서 모두 추방하라고 소리쳤다. 왕정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르 피가로’ 지 앞에서 교통을 차단하고 과격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 청년들의 데모는 이 책 곳곳에서 반복된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어떻게 바라봤던가. 배부른 사람들의 논쟁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 마치 68혁명 때 사회주의자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149쪽)“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드레퓌스 사건은 부르주와들끼리 벌이는 집안 싸움이었다. 드레퓌스가 대위쯤 되니까 이렇게 언론들이 시끄럽지 노동자가 당했다면 누구 하나 눈도 꿈쩍 안 할 거라는 입장이었다.”

살아남아 복권된 드레퓌스는 전역해 아내 루시와 함께 지내다 1908년 죽은지 6년만에 영국에서 프랑스 팡테옹으로 돌아온 에밀 졸라의 시신 이장식에도 참석했다. 그 행사에서도 프랑스 청년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레고리라는 반유태계 젊은 신문기자가 드레퓌스를 저격했다. 총알은 그의 팔을 스쳤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8년 스위스에 살던 드레퓌스는 프랑스 군인으로 참전했다. 파리 북부의 베르덩 전투에서 활약한 뒤 1918년 9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드레퓌스는 1935년 7월 11일 사망했다. 드레퓌스를 모함했던 에스떼라지는 런던 빈민굴에서 1923년 비참하게 죽었다.

31년된 책이지만 솜씨 있는 번역 덕분에 지금 읽어도 맛있게 읽을 수 있다. 오히려 이후에 번역한 책들이 현학적이라서 읽기에 더 버겁다.
태그

드레퓌스 , 에밀졸라 , 로로르 , 에스떼라지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정호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