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저항 혹은 칭송했던 베토벤

[새책] 음악과 권력

음악과 권력 (베로니카 베치, 노승림 옮김, 2009.8, 591쪽)

이 책은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였던 모차르트부터 윤이상까지 음악과 권력이 얼마나 밀접했는지 보여 준다.

흔히 베토벤은 황제 나폴레옹에게 대항할 만큼 자신의 음악적 순수성을 지킨 지조있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 한 차례도 녹음 안 된 베토벤의 칸타타 <영광의 순간>(작품번호 136)은 1814년 ‘회의는 춤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빈 회의 때 연주하려고 작곡했다.

나폴레옹 대신 메테르니히를 칭송한 베토벤

메테르니히의 초청으로 빈에 모인 유럽 정상들은 연일 술과 음악회, 왈츠로 흥청거렸다. 결국 빈 회의는 프랑스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메테르니히의 독재를 승인해줬다. <영광의 순간>은 같은 1814년 11월 29일 빈 레도텐잘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유럽 정상들이 모인 가운데 연주됐다. 결국 베토벤도 메테르니히의 독재에 함께 춤춘 꼴이다.

타협하지 않고 불굴의 예술혼을 추구한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도 <영광의 순간>과 <요제프 2세를 위한 장례음악> <레오폴트 2세를 위한 대관식 칸타타> <게르마니아> 등을 작곡해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톡톡히 했다. 베토벤은 이 곡을 후세가 잊어 주기를 원했다. 베토벤이 <영광의 순간>을 작곡한 것이 메테르니히의 환심을 사고자 함이었지만 메테르니히는 오히려 음악가들을 탄압했다.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는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맞아 <대영제국 행진곡> <세인트 조지의 깃발>을 작곡했다. 이후 <인도의 왕관>(1912년), <영국의 정신>(1915년), <제국 행진곡>(1924년) 등도 작곡했다. <동물 사육제>의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는 왕당파를 누른 공화파의 승리를 찬양한 작품이다. 생상은 파리 코뮌으로 시작한 프랑스 공화파 지지자였다. 동시에 생상은 산업진흥과 식민지 확대를 열렬히 지지했다.

주세페 베르디는 자기가 존경하는 정치가 카불의 요청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푸치니는 로마 시장 프로스페로 콜로나의 압력으로 <로마 찬가>(1919년)을 작곡했다. 무솔리니는 이 곡을 이탈리아 전역에 가르치도록 명령했다. 푸치니는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독일인들의 질서의식을 존경했다. 푸치니는 세상을 죽기 두 달 전 상원의원에 추대됐다.

히틀러 침략전의 전위부대였던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필은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침략 대상국가에 군대보다 먼저 베를린 필을 보냈다. 프르트벵글러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구하고 나면, 그 다음 날 여지없이 나치 부대의 군화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를린 필은 나치가 보내는 침략의 전령사로 악명이 높았다.

이 책의 원제는 <음악가와 권력>이다. 저자 때문에 독일어권 출신 작곡가들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다. 저자 베로니카 베치(Veronika Beci)는 지금 독일 뮌스터에 산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까지 총 18장에 걸쳐 흥미 진지한 클래식 음악해설서인 동시에 역사책을 선보인다. 저자는 그림자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정확한 논리와 역사적 증거로 세세히 밝힌다. 저자는 여성이며 또한 독일인이다. 저자는 음악의 지원 주체가 귀족에서 재벌로 바뀐 것을 빼면 그 풍경이 지금도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번역자 노승림은 이대 독문과를 나와 서울대 공연예술학 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하고 1997-2004년까지 <객석>의 음악 담당 기자였다. 성남문화재단 홍보실 과장과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을 거쳐 같은 재단에서 음악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09년 10월부터 영국 워릭대에서 문화정책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신간서적을 자주 사지 않는다. 돈도 돈이지만 한겨레나 시사IN 등 소위 진보매체로부터 무수히 보이스 피싱을 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사IN은 신간코너에 “이 지면은 출판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펴냈으나 출판 시장에서 인기를 끌지 못한 책을 소개하는 난입니다”라는 사기까지 친다.

시사IN의 지난달 24일자 신간코너인 73면엔 KBS-TV에서 수없이 봐온 정재승 씨의 사진과 함께 고은의 <만인보>, <제인 구달 평전>, 김수행의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 김예슬의 <김예슬 선언> 등이 있다. 이들의 책이 결코 인기를 끌지 못할 책인가. 외면 당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진보적인 동시에 적당히 타협적인, 동시에 철저하게 상업적 계산이 들어간 출판권력 - 물론 어린이 책을 만드는 1류 권력은 아니라도 - 의 입맛에 맞는 책 소개일 뿐이다.

이런 책 소개의 홍수 속에서 책을 고르는 비법은 철저히 도서관에서 사전에 읽은 뒤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만 골라 사는 것이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2만5천원이란 결코 만만찮은 돈을 투자했지만 아깝지 않은 책 <음악과 권력>을 원저자의 순서대로 1장부터 18장까지 아래에 요약한다.


1장 태초에 음악과 정치가 있었다

1989년 장벽이 무너지고 통독되자 국가(國歌)를 둘러싸고 음악 논쟁이 불었다. 결국 1991년 서독 국가였던 <독일인의 노래> 3절을 통일 독일의 국가로 채택했다. 정치가들은 독일 통일의 주역이 누구였는지 음악에 분명히 담기를 원했다. 서독은 자신들이 얼마나 막강한 경제력과 월등한 정치 체제를 보유하고 있는지, 사회주의 때 불렸던 노래를 받아들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도 민족우월주의 젖은 독일국가

영국 르네상스인 엘리자베스 1세 때 활동한 작곡가 존 불(1562-1628)도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존 불은 초기 헤어포드 교회 오르간 주자였다. 엘리자베스 1세 때 귀족의 이목을 끌어 여왕 직속 궁정악단 오르간 주자가 됐다. 여왕의 영광을 위해 오르간 연주 뿐 아니라 밀정 노릇도 했다. 여왕이 죽자 존 불은 불안해 네덜란드로 도망쳐 1628년에 죽었다.

하이든은 179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왕이던 프란츠 1세 생일 때 <황제 찬가>를 작곡했다. 이 곡이 1918년까지 독일 국가였다.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린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하자 오스트리아는 이 곡에 가사만 바꿔 1946년까지 국가로 불렀다.

독일은 1848년 3월 혁명 때 팔러스레벤이 이 곡에 민족주의 가사를 붙여 <독일인의 노래>를 만들었다. 1945년 5월7일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이 노래는 <독일, 가장 뛰어난 독일이여>라는 제목으로 불렸다. 1952년 서독 정부는 팔러스레벤의 노래 중 민족우월의식이 너무 심한 1, 2절을 빼고 3절만 국가로 채택했다.


2장 음악과 권력,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선 : 폰 빙엔, 쉬츠, J.슈트라우스

기원전 3천년경 수메르시대에 종교의식에 음악을 사용한 사례가 최초다. 이집트 신왕조 시대 벽화엔 거대한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이 있다.

음악과 도덕, 정치

음악은 그리스 사회에서 법률 다음으로 중요했다. 아직도 그리스 초등학교는 읽기와 쓰기보다 노래와 악기연주를 먼저 가르친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음악에는 ‘도리아 선법’을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이란 책에서 음악을 이상적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육이라고 강조하면서 ‘도리아 선법’을 언급했다. ‘도리아 선법’은 침착하고 냉정해 활기찬 감정을 만든다고 정의했다. 프리지아 선법은 격렬하고 흥분된 감정을 유발하고, 리디아 선법은 나약한 감정을 유발하고, 막솔리디아 선법은 슬프고 억제된 감정을 유발한다고 썼다.

호머가 기원전 8세기에 쓴 <오디세이>에는 파이아키아 왕국의 알키누스 왕이 자신의 손님인 오디세이우스의 명예를 위해 현란한 음악축제를 열어준다. 고대 군주는 작곡은 물론 연주에 참여하는 위대한 전통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음악을 배웠다. 아테네의 진보 정치가 솔론은 노래로 귀족 위주의 사회구조를 질타하고 시민의 평등과 노예제 폐지를 추구했다.

로마제국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서구적 전통을 받아들였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를 여행하며 음악의 중심지를 찬미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에서 마치니는 1835년에 쓴 <음악철학>에서 “음악은 개별 영혼들에 영향을 끼치고 군중을 동원한다”고 적었다.

비판과 종속 : 세 가지 시대의 세 가지 사례

빈 출신의 젊은 음악가였던 슈트라우스는 혁명가를 작곡해 1848년 혁명에 능동적으로 협력했다. 당시 슈트라우스는 자주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혁명을 진압하자 빈의 경찰은 슈트라우스를 경솔하고 부도덕하며 사치스러운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슈트라우스는 갑자기 노선을 바꾸었다. 18세기 중엽 슈트라우스는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의 명예를 위해 <니콜라이-카드리유>를 작곡했다.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작품을 국가의 요구에 맞춰 가차 없이 재단했다. 1853년 국왕 암살미수 사건을 보고 <구원 행진곡>을 작곡하고 국왕 찬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인용했다. 슈트라우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동맹 직후 재빠르게 <친목 행진곡>을 작곡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1866년 전쟁 중 적대국이 되자 다시 아름다운 조국애를 담은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발표하고 자기 집을 야전병원으로 제공했다.

작곡가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마자르 왕국과 공조도 발 빠르게 받아들였다. 선두주자는 역시 요한 슈트라우스였다. 그는 <집시 남작>을 작곡했다. 브람스는 헝가리 춤곡과 헝가리 민요로 변주곡을 작곡했다. 요제프 요아힘은 헝가리풍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표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헝가리 랩소디>와 오라토리오 <고귀한 엘리자베트>, 헝가리 대관식 미사까지도 작곡했다.


3장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궁정음악 : 라소, 몬테베르디, 륄리, 바흐

중세 초 프랑크왕국은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프랑스 북쪽과 벨기에 국경선까지 영토를 영주들에게 분배했다. 천년왕국 서로마제국의 첫 번째 지배자였던 샤를마뉴는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한 자세로 군림했다. 이 시대 음악은 종교음악이었고 주된 장르는 그레고리 성가였다. 샤를마뉴는 음악을 마치 그림처럼 곁에 두고자 했다.

신성제국의 궁정예술

12세기 중엽 이래 독일에선 민네장(Minnesang)이라는 음악 장르가 발전했다. 민네장은 기사들의 사랑을 주제로 당시 독일 궁정에서 즐겨 불렀다. 민네장의 주역인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에서 노래와 화술을 배운 싱어 송 라이터였다. 발터는 최호의 후견인 프리드리히 2세가 1198년에 빈에서 죽자 독일 국왕 필립 폰 슈바벤과 인연을 맺었다. 필립 왕은 집권 내내 전쟁으로 점철했다. 사자왕 리처드의 아들이자 벨페 가문의 장자 오토 4세와 왕권을 놓고 대립했다. 필립 왕은 1208년 암살당했다.

발터는 다시 벨페 왕가의 시종이 됐다. 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는 펠리페 2세, 프랑스 아우구스트,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의 지원을 받았다. 1214년 부빈 전투에서 패한 오토 4세가 왕권을 포기하자 발터는 이번엔 번 슈타우펜의 편에 섰다. 이렇게 국왕과 민네장 작곡가 사이의 공생은 10여 년간 계속됐다. 1230년에 죽은 발터는 뷔르츠부르크 대성당 내 루잠 정원에 묻혔다. 시와 음악은 전제주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부르고뉴 공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르네상스 시대 군주와 음악가는 상호 의존하는 종속관계의 극단적 사례다. 르네상스 시대 음악의 중심지는 곧 정치적 요충지였다. 용맹왕 필립의 통치시절과 선왕 필립이 통치하던 첫해 부르고뉴 공국은 가장 먼저 프랑스 음악가들을 포섭했다. 부르고뉴 공국을 위해 일했던 가장 유명한 음악 거장은 1400년 즈음 캉브레에서 태어난 기욤 뒤파이다.

부르고뉴 공국에선 종교음악이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했다. 국왕이 선호한 건 음악과 연극 여흥을 겸한 우화적 프로그램이었다. ‘꿩의 향연’은 1454년 2월17일 릴르 성에서 열린 축제로 부르고뉴의 선왕 필립이 터키와 전쟁(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 마련했다.

르네상스 직전 궁정의 자기 과시와 정치 선전, 부르고뉴 궁정악단의 음악가로 출발한 르네상스 궁정음악가들이 많았다. 궁정악장들이 실제론 이중 생활했다. 작곡은 부업이고 본업은 비서, 서기, 사제, 외교관이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음악가는 떠돌이였다.

태양왕과 막마의 듀엣

20세기 독재자조차 자신의 궁정 음악가를 불러들여 지극히 개인 입장에서 새 작품을 작곡하도록 종용했다.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를 접견실로 불렀고 히틀러는 대본을 엄선하고 소심하게 총보를 검토한 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말 없는 여인>의 초연을 지시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익히 알려진 바대로 열광적이면서 탁월했다. 왕은 작곡가들에게 신작 오페라에 발레를 삽입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발레는 상당수 프랑스 오페라에 들어갔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태양왕이 궁정문학과 음악을 직접 감독했다. 위대한 작가이자 시인이며 극장장이었던 몰리에르는 <타르튀프>로 국왕의 현명한 통치가 위선자와 사기꾼으로부터 우매한 백성을 어떻게 구해 내는지 거리낌 없이 보여 주었다. 절대왕정은 오직 국왕의 은총으로만 성공이 좌우되었던 터라, 군주와 관계와 관직을 둘러싼 음모는 한층 살벌했다.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는 프리드리히 2세의 음악적 기호에 부응했다. 바흐가 1742년 작곡한 소나타 <프로이센>은 국왕을 찬양했다. 바흐는 마냥 궁정작곡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7년 전쟁 중 바흐는 1759년 베를린을 약탈하러 온 시민군에 일시적이나마 적극 가담했다. 바흐는 왕국을 위해 작곡하기를 그만두고 시민을 위한 독창곡에 분명한 관심을 기울였다.

기욤과 엘레오노르 아키텐

프랑스의 아키텐 가문은 음악과 포도주, 세계사에서 파란만장한 집안이다. 현재 보르도지역인 아키텐은 공작령으로 국왕의 세력이 못 미칠 만큼 위세 당당했다. 공작 기욤 9세는 당시 프랑스 왕보다 더 강했다. 기욤 9세의 손녀 엘레오노르 아키텐은 중세 문예 진흥의 원동력을 만들었다. 그러나 운명은 영불 전쟁으로까지 번진 그녀의 불행한 결혼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다.

15살의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10세(=루이 6세)의 유언으로 1137년 17살의 프랑스 황태자 루이와 결혼했다. 남편 루이 7세는 곧바로 프랑스 왕이 됐다. 10년 뒤 1147년 2차 십자군에 나선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는 현지에서 불화 끝에 1152년 이혼했다. 엘레오노르의 아들 앙리는 2년 뒤 영국의 헨리 2세로 즉위해 플랑타쥬네 왕조(1154-1485)를 일으켰다. 영국 왕비가 된 엘레오노르는 그녀의 영토에서 생산한 양질의 포도주를 영국에 보급했다. 이번에도 젊은 남편의 바람 탓에 불행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향한 반역을 부추겼다.


4장 군주에 대한 충성과 시민의 계급의식 : 모차르트, 하이든, 글루크

18세기 초 궁정은 신의 은총을 받은 전제주의를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튼튼한 성곽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전제정권의 붕괴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는 “노예를 바라지는 않는”고 적을 만큼 진보적이었다. 볼테르 신봉자였던 예카테리나는 통치 중 자신의 숭고한 개혁 이상을 상당히 자주 무시했다. 러시아와 나란히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노예신분으로 예속시켰다.

스웨덴에는 연극을 즐기던 문예애호가 구스타프 3세 국왕이 있었다. 서민에게 사랑받는 개혁가였던 구스타프 3세는 1792년 귀족의 음모로 살해됐다. 이 사건은 베르디의 명작 <가면무도회>의 소재가 됐다.

모차르트 : 황제의 도시에서 프리랜서로 사는 법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신동 시절 유럽의 여러 궁정에서 명예를 누렸지만 고향 잘츠부르크의 협소한 무대로 귀환한 다음엔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주교를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 하인의 신분을 한탄했다. 1781년 5월엔 모차르트에게 더욱 정도가 심한 횡포를 가했다. 결국 1782년 모차르트는 대주교에게 해고당했다. 얼마 후 이 자유롭고 희망에 가득 찬 거장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했다. 궁정신하로 출발했던 바로크 시대 음악가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독립적 예술가로 이행하는 본보기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는 빈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차르트는 연주 기회를 기대했고 이를 통해 유명해지고 제자들을 받아 가르치면서 자유로이 작곡할 만큼 경제력이 필요했다. 모차르트는 빈에서의 이상적 데뷔 기회를 놓쳤다. 요제프 2세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다만 마리아 빌헬미네 폰 툰 백작부인의 시선을 끄는 데 그쳤다. 그녀는 모차르트가 다른 귀족들의 살롱에 진출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치는 모차르트의 윤리적 견해와 일치했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귀족들의 특권을 철회했다. 요제프 2세의 누이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세이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죄 많은 어머니> 등 프랑스에서 상연인 금지된 정치극을 트리아농 별장에서 상연했고 심지어 <세비야의 이발사>에선 몸소 로지나 역까지 연기했다.

요제프 2세는 귀족계급을 힐난한 <피가로의 결혼>의 상연을 허용했다. 1786년 5월1일 마침내 초연이 허락됐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실내악 작곡가로 명성이 굳어져 급료가 형편없었는데 만성적 금전 부족에서 해방돼 오페라 작곡가로 거듭나길 원했다. 1787년 <돈 조반니>도 발표했다. <돈 조반니>에서 모차르트는 귀족들의 악습과 무지를 비판했다. 그러나 <돈 조반니>에는 시민계급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귀족에 대한 풍자를 경감시킨 것은 국왕에 대한 배려였다. 빈 시절 모차르트는 과연 서민의 편에 있던 음악가였을까. 글루크나 하이든, 모차르트만큼 경계가 불분명한 음악가는 없다. 모차르트는 대중가요처럼 개혁을 꿈꾸는 시민계급의 이상을 연주했지만 동시에 지체 높은 자들의 수요에도 부응했다. 모차르트는 마지막 작품 <마술피리>에 와서야 비로소 시민사회의 이상향에 가장 근접했다.

보마르세의 전작 <세비야의 이발사>에 이어진 이야기로 이발사였던 피가로는 알마비바 백작과 백작부인 로지나의 결혼을 맺어준 공로로 백작 저택에 들어와 하인이 됐다. 백작 부부는 남편의 바람기로 불편했다.
피가로는 백작부인의 시녀 수잔나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잔나에게 눈독 들인 백작은 초야권을 요구했다.

하이든 : 런던으로 가는 길

군주 에스테르하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요제프 하이든은 1732년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1749년 빈 슈테판 대성당에서 성가대원이었다. 몰락한 고용주는 책임감이 충만한 사람이어서 하이든을 다른 궁정에 소개해 주었다. 에스테르하치가 아이젠슈타트(당시 헝가리령, 지금은 오스트리아)의 고향 저택에서 휴가를 보낼 때면 악장 하이든은 고용인 제복을 입고 출석해야 했다. 1766년 하이든은 니콜라우스 영주 치하에서 제1궁정악장으로 임명됐다. 하이든은 시민의식이 꽃피는 것을 목격했다. 1785년 하이든은 ‘진정한 단결’을 위해 프리메이슨 연맹에 가입했다. 유토피아 단체인 프리메이슨은 비밀의식으로 실제 세계와 단절을 추구하면서 민주적 삶의 이상을 살고자 했다.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치는 일찍 은퇴해 음악과 사냥, 마리오네트 연극 같은 도락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80세를 한참 넘긴 하이든이 느끼는 갑갑함은 도를 더했다. 에스테르하치의 아들 파울 안톤은 아버지처럼 음악에 신들린 사람이 아니였기에 하이든을 궁정의 속으로부터 기꺼이 해방시켜 줬다. 에스테르하치 영주의 사망 이후 아유를 얻은 하이든은 런던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며 더욱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하이든은 영국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809년 여러 주일에 걸친 집중 포격 끝에 빈을 굴복시켰다.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집으로 명예 친위대를 보냈다. 77살의 노장 하이든은 매일 황제 찬가를 연주하다가 죽었다.

글루크 : 자유사상가의 소박한 품위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20년 전 영주의 고용살이에서 빈의 궁정으로 옮겼다. 1772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황태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기 음악선생 글루크를 데리고 파리로 갔다. 진보사상을 가진 작곡가 글루크는 젊은 황태자 부부에게 보다 민중에 친근하고 참신하며 공명정대한 세상을 기대했다. 미래의 국왕은 당시까지만 해도 백과사전파와 볼테르를 가까이했다. 글루크와 하이든, 모차르트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프리메이슨은 모든 인류를 형제로 이해했으며 교회의 영향에서 벗어난 형태의 동정과 인류애에서 우러나온 기독교적 가치를 세계관의 핵심으로 삼고 예찬했다. 종교적 관용을 두드러지게 의도한 방침으로 그들은 유대인에게 회원 입회 자격을 부여했다.

루소는 지극히 정치적인 논쟁인 ‘부퐁 논쟁’을 음악적 담론의 중심에 두었다. ‘부퐁 논쟁’은 1752년 파리 음악계에서 벌어졌는데 프랑스 오페라 지지자와 이탈리아 오페라 지지자로 갈려 음악관과 미학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에서 일어났다. 루소 등 계몽사상가와 지식인은 이탈리아 음악을 옹호했다. 고전적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추종자들은 이탈리아의 ‘부파’라는 희극 오페라 옹호자들과 대적했다. 귀족과 보수주의자 vs 시민과 자유주의자의 대결이기도 했다.


5장 잊혀진 자코뱅주의자 : 라이하르트

모두 혁명을 눈앞에 목격하고서도 절대왕정의 한계 앞에 체념할 때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는 처음부터 갈등하지 않았다. 1752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라이하르트는 작곡가 겸 작가로 활동한 순간부터 음악으로 계몽주의 이상실현을 다짐했다. 라이하르트는 칸트의 책에 감동했다. 그는 검열을 두려워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철학을 공부한 라이하르트는 아담 힐러에게 작곡교육을 받았다. 그뒤 프란츠 벤다의 후원으로 프로이센 국왕의 궁정악단에 고용돼 1775년부터 1786년 죽을 때까지 프로이센에 머물렀다.

베를린 궁정에서 라이하르트는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를 만났다. 바흐의 음악은 라이하르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라이하르트가 1781년 <음악예술지>를 창간하자 궁정에선 이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이 잡지는 음악 미학적 질문을 제시하며 그보다 더 많은 反전제주의적 비판을 다뤘다.

프리드리히 2세에 이어 왕좌를 물려받은 프리드리히 벨헬름 2세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군주였다. 이렇게 되자 라이하르트는 궁정내 입지가 난처해졌다. 라이하르트가 프랑스 혁명에 호의적임은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라이하르트는 베를린에서 점차 불청객으로 낙인찍혔다. 1792년 라이하르트가 쓴 <여행기록... 프랑스에 정통한 소식>에는 빌헬름 황제가 자신의 궁정악장의 친혁명적 성향 때문에 불신했다고 나온다. 결국 라이하르트는 궁정에서 쫓겨났다.
라이하르트는 궁정에서 해고된 뒤 ‘프랑크라이히’라는 공화당 신문을 발행했다. 공포정치 앞에서 혁명이 위험에 처하자 라이하르트는 다른 많은 독일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버렸다. 라이하르트는 음악 살롱을 연 아내 율리아네를 격려했다. 궁정에서 상처 입은 라이하르트는 살롱에서 비로소 자신의 청중을 만나 재정적 정신적으로 관계를 형성했다. 나폴레옹 통치 아래 혁명은 잔잔해지고 계몽주의자와 공화주의자는 낭만주의자가 됐다. 라이하르트도 1800년 무렵 낭만주의로 전향했다.

라이하르트는 국가에 대해 철저히 일관되고 과격한 입장을 표했던 최초의 음악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딸 루이제는 낭만주의 피아노 개척자로 슈베르트만큼 뛰어났다. 1960년대와 70년대 라이하르트는 사회주의 국가된 동독 조국에서 아주 잠시 다시 부활했다.


6장 공포오페라 : 살리에리, 그레트리, 케루비니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되고 1년 뒤 파리 오페라계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쓴 5막짜리 오페라 <타라르>가 무대에 올랐다. 용감한 군인 사령관 타라르 얘기로 민중과 군인들이 그를 흠모하는 가운데 이를 질투한 폭군 아타르가 복수심에 불타 타라르의 부인을 유괴한다. 마침내 아타르의 독재를 견디지 못한 민중이 반란을 일으키고 폭군은 자살하고 민중은 타라르를 새 군주로 맞이한다. <타라르> 대본은 저항작가 보마르세의 원작에 근거했다.

살리에리는 아직도 과소평가 받고 있다. 그는 우울하고 극단적 주제를 추구했다. 1784년 초연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오페라 <다나오스의 딸들>도 그랬다. 그의 음악 미학엔 루소의 영향이 녹아 있었다. 파리 초연 공연을 보러 온 청중 가운데는 마리 앙투아네트도 있었다.

혁명적 관악 공연

1789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세는 급변했다. 왕족들은 파리 튈르리 궁전에 감금당한 이후 왕비는 그레트리가 작곡한 오페라를 보려고 코미디 이탈리아 극장을 방문했다. 객석에선 야유가 터졌다. 극장 객석에선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폭력이 오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뜻하지 않게 혁명의 중심 표적이 됐다. 그녀는 프랑스인이 아닌 합스부르크 가문의 자손이었다. 왕비는 왜 귀족을 제치고 출세지향적 부르주아들이 더 고위직을 차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대의 징후를 파악하고 개혁을 관철했던 오빠 요제프 폰 합스부르크와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출신과 가문의 특권을 고집했다.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자 프랑스는 영국을 추월할 기회로 여겨 이를 지지했다. 루이 16세는 소심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남자였고 어리석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1789년 7월14일 유린됐다. 폭동 진압차 프랑스 전역에서 군대를 동원했다. 농민들은 영주의 성을 겁탈하고 노예문서를 불태웠다. 왕족들은 한적한 피난처였던 베르사유에서 파리 튈르리 궁으로 이송돼 감금됐다.

바이올린 신동 루돌프 크로이처는 16년간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호 아래 궁정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간신들의 모함을 피해 크로이처 또한 오페라 작곡가로 자신의 영역을 옮겼다. 혁명을 거치면서 그의 관직과 품위는 더욱 올랐다.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이여

<라 마르세예즈>의 원제목은 <라인 강의 군인들을 위한 군가>다. 마르세예즈라는 이름은 작가 겸 작곡가 클로드 조셉 루제 드 리슬이라고 알려졌지만 분명치 않다. 원제목대로 이 노래는 원래 군가였지 혁명가가 아니었다. 루제 드 리슬은 평원파였고 왕을 섬기는 충신이자 보수당원이어서 자코뱅 당원들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국민의 감정을 단결시키는 기적을 낳았고 1795년 국가로 제정됐다. 1793년 초 루이 16세는 참수형 당했다.

왕비에게는 반역과 국가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혐의에 친아들인 황태자와 근친상간 죄와 동성연애 등 비정상적인 사랑 행위에 대한 죄목이 추가됐다.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죽었다. 이어 혁명정부는 내부에서 자기 분열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독재 권력을 시도했다. 당통 일파를 숙청했다. 앙시앵 레짐 시절 ‘귀족 취향’의 오페라는 기피 대상이었지만 오케스트라는 시민계급의 우선적 사랑을 받았다.

1796년 젊은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군부의 지지 아래 집정내각을 선포했다. <라 마르세예즈>는 금지곡이 됐다.


7장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베토벤에게 영광을 : 베토벤

로맹 롤랑은 베토벤을 모델로 한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썼다. 유달리 베토벤만이 존경을 받았으며 이런 존경은 19세기 내내 절정에 달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까지 이어졌다. 베토벤 명성의 절정은 1813년 작 <웰링턴의 승리 또는 빅토리아 전투> 작품번호 91번에서 비롯됐다.

베토벤은 합스부르크 왕국에 소속된 작곡가로 나폴레옹의 지지자였고 당연히 보나파르트의 제안을 승낙했다.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등극하자 베토벤은 분노에 휩싸여 소리를 질렀다. 베토벤은 테이블로 다가가선 악보 표지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내던졌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교향곡의 제목은 바뀌어 <에로이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베토벤은 1806년 <에로이카>를 로프코비치 공작에게 헌정해 발표했다.

베토벤의 생애

왕실에 대한 기대와 환멸, 보호와 경멸 사이에서 베토벤의 총체적 삶은 이리저리 동요했다. 베토벤은 1770년 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선제후 궁정의 테너가수였다. 1781년 베토벤은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게서 대단히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1784년 150굴덴의 봉급을 받는 궁정 오르간 주자로 들어갔다. 1787년 베토벤은 빈 유학을 허락받았다. 모차르트에게서 배우기 위해서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토벤은 이후 대학에 들어가 철학강의를 들었고 자코뱅주의 혁명에 우호적이었다. 선제후 궁정에서 베토벤의 입지는 불안정해졌다. 퀼른-본 지역은 혁명의 폭풍이 삼켜 버린 프랑스와 그 폭풍에서 위협받는 독일 국경지역, 그리고 독일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1792년 여행도중 퀼른에 머물던 하이든은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놀라서 젊은 동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베토벤이 빈에서 하이든의 가르침을 받는 사이 집안은 총체적으로 어려웠다. 아버지는 죽고 동생들은 친구들에게 맡겨졌고 라인 강이 프랑스령이 돼 선제후는 피난을 떠났다. 베토벤은 이후 빈에 계속 남았다.

베토벤은 마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빈에서 베토벤은 성공해 바쁘게 살아갔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 베토벤을 가장 오랫동안 괴롭혔던 질병은 매독으로 인한 성병이었다. 이 때문에 청각 장애나 운동성 장애가 생겼다. 나폴레옹이 정치적으로 돌변해 독재가가 되자 베토벤은 이중으로 당황했다. 영주 리히노프스키는 베토벤에게 프랑스 장교가 합석한 가운데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토벤은 이를 거절했다. 1805년 베토벤은 폭권과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베토벤은 패배한 오스트리아 군대가 빈에서 오펜으로 출발하는 것을 기리며 <고별>이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해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했다. 나폴레옹을 향한 반감은 절정에 달했다. 1810년 빈이 침략당한 이듬해 불안으로 가득 찬 베토벤은 건강을 더 악화시켰다. 베토벤에게는 오로지 나폴레옹과 프랑스를 모욕하고 확정된 국경이 제공하는 한정된 안정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희망하는 일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베토벤은 전쟁을 저주했고 정치적 긴장 완화와 안식을 희망했다.


8장 목가적인 비더마이어 시대 : 슈베르트, 멘델스존, 질허, 로르칭

비더마이어는 처음엔 ‘소시민적 생활양식’이란 뜻이었으나 19세기 초중반을 지나면서 비정치적 시대와 당시의 문학이란 개념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반동에 대한 환멸과 함께 소시민적 자족감이 뒷받침된 비정치적 퇴영적 풍조를 말한다.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나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처럼 슈베르트의 일부 ‘리트(가곡)’ 작품에는 언제나 음악적으로 깨어진 단면이 들어있다. 독일어 <리트>는 원래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문학 부분에서는 노래할 수 있는 독일어의 시 전반을 가리키기도 하고, 음악 분야에서는 독창곡에 국한하지 않고 합창곡이나 선율성이 강한 피아노곡에도 리트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론 독창용 ‘가곡’을 가리킨다. 예부터 <리트란 시와 음악의 결혼이다>라고 말해온 것처럼 시에다 단순히 선율만 붙여서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피아노 반주에 의해 시의 내용에 따라 보다 더 깊은 정감을 줌으로써 시와 음악이 협동작업을 하는 독특한 예술분야인 것이다.

슈베르트에게 가사를 제공하던 유명작가 빌헬름 뮐러는 진보주의자였다. 뮐러는 그리스 애호가로 그리스 독립전쟁에 투신하고 <그리스의 노래>를 지은 인물이다. 슈베르트가 리트(가곡)를 작곡하면서 끌어들인 반항 작가는 뮐러뿐이 아니었다. 실러와 괴테, 하이네, 클로프슈토크, 그릴파르처에 이르기까지 시대 고발에 적극적인 문인이라면 슈베르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820년대는 정체기였다. 프랑스는 1815년 6월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해 부르봉 왕정으로 회귀했다. 왕정이라지만 수위는 낮았다. 메테르니히가 통치하던 1830년 초 오스트리아는 소문의 진원지 역할을 하던 카페조차 침묵을 지켰다. 사람들은 편안한 보금자리인 가족과 집으로 들어갔다. 1820년대 전후 큰 변화는 부인들의 모자였다. 돌출한 챙으로 얼굴 전체를 싸고 턱 밑으로 큰 리본을 묶는 두건 모양의 여성용 모자가 유행했다. 더 이상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원치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슈베르트는 바로 이런 분위기에 둘러싸였다.

아카데미 합창단과 음악 살롱

질허는 특정한 시국에 바로 민첩하게 반응했다. 하이네의 시로 작곡한 노래를 특히 편애했다. 하이네의 <로렐라이>가 질허의 작품이다. 그리스 독립전쟁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어 지원금 마련에도 열중했다. 멘델스존은 결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1848년 : 정서적 풍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적 요구로 만들어진 오페라 <레지나>는 최초로 동맹파업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1848년 오스트리아는 물론 프로이센에서도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작곡가이자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던 베를린 출신의 작곡가 알베르트 로르칭(1801-1851)이 만들었다. 1801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로르칭은 자신의 부모가 그랬듯 처음엔 배우로 활동했다. 로르칭은 1828년 2월 1일 독일 뮌스터에서 <알리 파샤 폰 야니나>라는 음악극을 초연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한다. 로르칭은 1837년 <차르와 목수>를 성공시키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작곡가로 주목받았다. 이 오페라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군주의 모습을 구현했다. 극중 러시아 황제 차르는 평범한 부두 노동자로 고용돼 배를 만든다. 로르칭은 민중에게 친근한 군주를 이상적 통치자로 봤다.

로르칭은 1844년 9월 오페라 <운디네>를 만들어 귀족을 힐난한다. 로르칭의 희극 오페라 <사냥꾼>은 작곡가로서 그의 입지를 널리 알렸다. 이 때문에 그는 라이프치히 궁정악장으로 고용됐다. 여기서 로르칭은 로베르트 블룸이라는 작가와 사궜다. 블룸은 민주당원으로 1849년 시위에서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간 대가로 훗날 계엄령 하의 빈에서 총살당했다. 진보적인 신념의 로르칭은 블룸의 작품을 음악으로 구현했다. 로르칭은 노래와 합창을 통해 1849년 미완의 혁명에 적극 협력했다.

로르칭이 작곡한 오페라 <레지나>에서 한 노동자는 시위 중에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노예 신분과 독재에 종말을,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강력히 주장한다. 말로써 안 된다면 무력을 쓸 것”이라고. 혁명의 종말과 더불어 로르칭은 빈털터리가 되었고 앙가주망은 여전히 정치적 혐의를 찾고자 작은 극장들을 샅샅이 뒤졌다. 11명의 자녀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 정신없었던 로르칭은 가난에 허덕이다가 1851년에 죽은 뒤 가족들에게 빚더미를 물려주었다. 슈만, 로르칭, 멘델스존은 모두 메테르니히 정권을 무너뜨린 1848년 3월 독일 시민혁명(3월 혁명) 이전의 작곡가였다.


9장 해방과 체념 사이에서 : 킨켈, 요아힘, 말러

로베르트 슈만이 1849년 독일혁명에 무관심한 동안 리하르트 바그너는 미하일 바쿠닌과 함께 드레스덴 봉기의 배후로 지목받아 자신의 진보성향 때문에 망명을 떠나 스위스로 탈출했다. 혁명의 실패로 바그너는 고난에 직면했다. 바그너처럼 조국을 깊이 염려하던 음악가가 혁명주의자에서 국가의 충복으로 전향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목을 끌만한 사건이었다. 바그너 만큼이나 독일이라는 국가에 대해 확신을 가졌던 슈만도 같이 전향의 길을 걸었다.

바그너와 슈만

슈만은 진보주의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민족주의적 경향을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라인> 교향곡이라 불리는 교향곡 3번과 같은 후기 작품들은 단지 조국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이라든가 뒤셀도르프에서 새로이 인기를 끌겠다는 계산뿐 아니라 조국통일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담았다.

자크 프로멘탈 알레비라든가 마이어베어처럼 진보주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 낸 작곡가도 있었다. 알레비의 5막짜리 1852년작 오페라 <방랑하는 유대인>은 유대인이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는 내용으로 반유대주의가 꿈틀거리던 1850년 전후 프랑스에서 청중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요한나 킨켈 : 살롱과 망명을 넘나든 여성 작곡가

진보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상을 늘 고수하던 음악가 중에는 작곡가 겸 피아노 교수였던 요한나 킨켈도 있었다. 그녀는 남편인 혁명주의 정치가 고트프리트 킨켈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남편 킨켈은 잡혀가 베를린 근처 슈판다우 성으로 호송됐다. 요한나는 1852년 미국으로 망명해 노예제와 인디언 추방운동에 반대투쟁했던 젊은 민주운동가 카를 슈르츠와 모리츠 비거스와 남편 킨켈을 슈판다우에서 빼냈다.

부부는 1851년 런던에서 재회했다. 1810년 7월10일 요한나 모켈(결혼 전 이름)은 본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나폴레옹이 라인 강을 통치하던 시기였다. 요한나는 1832년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출판 및 악보상인 마티우스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아내를 심하게 때렸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음악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멘델스존의 집에서 사람들과 교제했다. 1839년 요한나는 이혼소송을 마무리하려고 본으로 돌아왔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오래전부터 그녀가 가장 총애하는 인기 작가였다. 하이네가 매우 자주 독일 정치를 비판하다가 1831년 파리로 쫓겨 날 때까지 그녀는 하이네의 정신을 따랐다. 1835년 ‘청년 독일파’가 집필한 모든 저작은 금지됐다. 요한나는 하이네의 시로 노래를 작곡했다. 그녀 자신은 확고부동한 진보주의자였다.

그녀가 킨켈과 함께 나눈 정치적 동질감은 곧 사랑으로 이어졌다. 킨켈은 본에 있는 여학교의 선생이었고 프로테스탄트였다. 킨켈의 학교는 그가 이혼 경력 있는 가톨릭 여자와 결혼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1843년 결혼식을 올렸다. 고트프리트 킨켈은 급진적 진보신문인 ‘노이에 보너 차이퉁’을 발행했다. 아내 요한나가 창간부터 함께 했다. 요한나는 불쌍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수업료 절반만 받고, 부자의 딸에게는 전액을 받았다. 그러자 부자들이 수업료 납부를 거부했다. 킨켈은 영국으로 도주할 당시 요한나의 제자들로부터 도움 받았다.
여성 작가 말비다 폰 메이젠부크는 요한나 킬켈에 관해 <이상주의자의 회고록>을 썼다. 요한나는 1851년 9월25일 “우리 집은 일자리를 위해 찾아드는 망명객들의 중개업소가 되다시피 했다”고 썼다. 베를린에 본부를 둔 멘델스존 협회의 영국 지부 역할을 자처한 요한나 킨켈은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한층 가벼운 독일 음악을 선호했다. 킨켈 가족의 집은 곧 독일 음악 양성소가 됐다.

그녀는 1852년 <피아노 수업에 관해 친구에게 보내는 8통의 편지>를 출판했는데 소녀 교육과 피아노 교습을 매개로 한 여성 해방 논쟁을 매우 비판적으로 다뤘다. 1854년 요한나는 협심증으로 말미암은 발작이 심해졌다. 그녀는 살림과 가족 부양, 어머니로서의 의무로 인해 갑갑하고 괴로웠다. 요한나는 1858년 죽었다.

여성 작곡가 : 음악과 해방 사이의 여성

클라라 비크는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했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브람스의 친구였던 요제프 요아힘의 부인 아말리에 요아힘은 성악가였다. 여성 예술가들은 시간상의 제약 때문에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처럼 규모가 큰 작품보다는 리트나 피아노 소품, 작은 앙상블을 위한 실내악에서 더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대 여성 작곡가는 언제나 이방인이었고 언제나 망명 중이었다. 1848년 독일혁명은 여성음악가들에게 해방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유명한 여성인 에밀린 판크허스트는 할러웨이에 있는 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그녀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大교향곡 <형무소>를 작곡했다. 그녀가 처음 여권 운동에 열광하던 즈음 작곡한 <여성의 행진>은 영국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찬가였다. 영국의 여성 작곡가 에델 스미스는 누구나 인정하는 영국의 여성 참정권론자이자 전투적 여권론자로, 여성 선거권을 위해 뛰었다. 그녀는 이 때문에 체포되기도 했다. 에델 스미스는 페미니스트로서 당시 정권과는 달리 인종차별에 반대했다.


10장 다비드 동맹 : 슈만

슈만의 음악에는 사람을 조용하니 안도하게 하는 힘이 있다.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은 비정치적이다. 슈만의 작품은 1856년 그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알려졌다. 슈만은 정신병을 앓다가 굶어 죽었다. 슈만의 정신적 붕괴는 매독에서 온 뇌 손상이었다. 아내였던 피아니스트 클라라는 슈만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나서 슈만의 작품들을 철저하게 직접 관리했다. 그녀를 통해 세상은 작곡가 슈만을 알았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1840년대 이후 낡은 권력 구조는 해체 양상을 보였다. 진보주의는 여전히 혁명을 일으킬 정치적 원동력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공적인 삶에서 벗어나 사적인 영역으로 물러났다. 슈만은 수년간 장인될 분과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뒤에야 클라라를 아내로 얻었다. 슈만은 하이네, 뤼케르트, 아이헨도르프의 작품으로 음악을 작곡했다.

아버지 아우구스트 슈만은 츠비카우에서 출판사를 경영했다. 바이런은 1788년 영국의 영주로 태어나 당 세기 후반에 야성적이고 음울한 드라마와 산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바이런도 그리스 독립전쟁에 관여했다. 바이런은 이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채 1824년 자유를 맹세하는 몇 편의 시를 지어 놓고 현장에서 죽었다. 주세페 베르디 같은 작곡가가 당시 바이런의 작품에 입각한 번안물을 오페라로 만들면서 상당히 까다로운 검열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어린 슈만은 바이런과 스코트의 작품을 자연스럽게 읽었다. 슈만은 당대 진보주의 경향을 지녔다. 1829년과 1830년 슈만에게 결정적인 해다. 슈만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서 유대인 교수 안톤 프리드리히 유스투스 티보의 음악 서클에 우연히 들어갔다. 슈만은 음악이 가진 숭고하고 윤리적이고 민족적인 의의에서 스승 티보의 의견에 공감했다.

다비드 동맹

보수주의자 티보에게서 벗어나 슈만은 1830년 라이프치히에서 진보적이고 완고한 피아노 실기 선생인 프리드리히 비크와 만났다. 아버지 아우구스트 슈만이 1826년 죽은 뒤 비크는 슈만에게 예술적 대부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1830년 젊은 슈만은 음악에 몸 바치기로 했다.

비크는 슈만을 편파적인 진보적 서민계급의 진영으로 이끌었다. ‘다비드 동맹’이란 클럽에서 비크가 ‘마이스터 라로’라는 이름으로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슈만은 오래지 않아 마음이 맞는 역사상 실존 인물들을 이 다비드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파리에서 살던 음악가 프레데릭 쇼팽과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있었고, 죽은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끌고 왔다. 펠릭스 멘델스존도 끌어들였다.

슈만은 자신의 지존이자 열광의 대상인 스승 라로(=티보)와 공모해 자신의 동맹을 독특한 이름을 유지한 채 독일대학생학우회로 가지고 들어갔다.

로베르트 슈만의 리트 <두 사람의 척탄병>은 달빛이라든가 사랑, 상실을 노래한 공허한 정서적 음악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아 작곡한 음악이다. 슈만은 1838년 클라라 비크에게 고백했다. 슈만의 의도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더 확실히 드러난다. 슈만은 <조국>이라는 말이 맨 처음 나올 때 소리의 강도를 메조 포르테로 지시하고 나아가 포르테까지 올린다. 슈만의 기악곡만큼 작가의 의도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음악도 없다. 슈만은 피아노 소품 <다비드 동맹 춤곡> 작품번호 6번으로 그의 비밀결사대가 가진 이상에 예술적 공간을 부여했다.

1841년 슈만은 ‘피아노가 너무 비좁게’ 느껴졌다. 그는 교향악 장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희망에 충만한 삶을 누리던 작곡가의 삶에 1844년 1월 시련이 왔다. 슈만이 경제적으로 허덕이게 되자 아내 클라라는 재정을 위해 러시아로 연주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슈만은 감기에 걸려 귀국해 버렸다. 1850년 초 슈만은 뒤셀도르프 시의 음악감독이 돼 재정을 해결했다. 1844년 슈만의 세계관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이네가 프로이센에 의해 지명수배를 받은 것이다. 슈만은 더 이상 하이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반낭만주의’로 전향했다.

슈만은 충만한 전성기로부터 한참 멀어져갔다. 극단적 서정성에 점령당했다. 동화를 원작으로 한 <장미의 순례> 작품번호 112번처럼 얼마 되지 않은 극음악이라든가 1852년 작곡한 미사곡과 레퀴엠 등 종교음악으로 방향을 극단적으로 바꾸었다. 이즈음 은둔 중인 슈만에게 제자이나 친구가 된 요하네스 브람스와 첫 만남이 있었다. 슈만은 1856년 7월 29일 죽었다.


11장 유대인 작곡가와 그들의 적 : 마이어베어, 알레비, 바그너, 말러

파리와 베를린에서 특히 인기를 누린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쟈코모 마이어베어는 1847년 빈 여행 때 ‘보호관세’를 내야 했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도 순회공연 때 같은 경험했다. 십자군 전쟁은 유대인에 대한 무서운 증오가 절정에 이른 대표 사례다. 십자군 전쟁으로 유대인은 학살당하고 약탈당했다. 유대인과 관련 허무맹랑한 소문은 끝이 없었다. 마르틴 루터도 “유대인 안내원과 유대인 거리는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유대교 사원 시나고그는 불 태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적대적 환경 속의 유대 작곡가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1779년 희곡 ‘현자 나탄’에서, 프로이센의 재상 크리스티안 돔은 ‘유대인의 시민으로서의 처우개선에 대하여’라는 안내서에서 이들을 국민으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말했다. 레싱과 돔은 둘 다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의 할아버지인 모제스 멘델스존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1729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모제스 멘델스존은 5살 때 고등학교에 다닐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몰래 독일어를 배웠다.
유대인이 운영하는 살롱은 유대인 음악가에게 중요했다. 음악 살롱들은 넓은 인맥을 공유하고 순회공연 중인 음악가를 지원했다. 순회공연하는 유대인 음악가들은 맹렬한 반유대주의자들의 비난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쟈코모 마이어베어와 유대인 음악 살롱

19세기 초 선제후의 왕실 유대인 후손인 아말리아 베어가 운영하는 베를린의 ‘서클’은 비중 높은 음악살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로이센에서 우편운송업을 했다. 딸을 설탕공장 사장인 아콥 헤르츠 베어와 결혼시켰고 그녀는 그 집에서 음악살롱을 열었다. 그녀는 ‘존엄한 부인’으로 불렸고 대단히 영일하고 매혹적이었다. 미성년이던 아말리아의 아들 마이어 베어가 콘서트에서 두각을 낼 때 왕실 일가 모두가 연주를 보러 찾아왔다. 아들은 유대계 이름에서 지우고 쟈코모 마이어베어라고 바꾼 뒤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경력을 쌓았다.

유대인 음악살롱 사이의 결속은 보통 이상이었다. 쟈코모 마이어베어가 민나 모우손과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민나는 아말리아 베어의 뜻을 이어 자신의 살롱을 열었다. 쟈코모와 민나의 딸 코르넬리에 리히테르도 어머니가 남긴 살롱을 세기말까지 이어갔다.

유대인 살롱 및 음악가의 등장은 그들이 해방을 위해 노력한다는 중요한 증거였다. 유대인들은 프랑스 혁명에 딱히 큰 희망을 품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에 기대를 걸었다.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유대인 심복들은 프로이센에 충성했다. 애국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반유대주의를 선동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전투를 기념하려고 연 바르트부르크 축제에서 사람들은 보수주의 서적과 유대인 작가들의 책을 불태웠다. 1815년 조직된 예나대학생학우회는 유대인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유대인을 십자가에 매달아라”고 부르짖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슈만은 “일그러지고 뒤틀린 마이어베어는 가식적인 동화작가”라는 평론을 남겼다. 슈만은 유대인에 대한 전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알레비의 <유대인 여자>

자크 프로망탈 알레비의 5막짜리 오페라 <유대인 여자>는 1835년 2월 23일 파리에서 초연했다. 페스트 발병의 원인으로 지목된 유대인들이 고통당하는 가운데 이 오페라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느라 고통받은 여주인공 라헬을 찬양한다. 라헬은 형장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 여자는 죽은 뒤 추기경의 사생아였음이 밝혀진다. 외젠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완성한 알레비의 오페라는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신실한 믿음을 세우고 있다.

극중에 등장하는 모든 기독교 핵심인물들이 부정적 성격을 가진 점도 이 오페라의 새로운 측면이다. 동시대 청중은 <유대인 여자>에 열광했다. 1799년 파리에서 태어난 알레비는 10살에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신동 소리를 들었다. 1854년 유대인이던 알레비는 음악가 최초로 아카데미 정회원이 됐다.

마이어베어의 <위그노 교도>

마이어베어는 알레비의 유대인 여자가 나온 1년 뒤인 1836년 종교극 <위그노 교도>를 무대에 올렸다. 1572년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가톨릭 연합이 위그노 교도들을 잡아 학살한 사건을 다뤘다. 마이어베어는 젊은 무명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중엔 리하르트 바그너와 하인리히 하이네도 있었으면 하이네는 그의 도움으로 파리 공동묘지에 자신의 자리를 얻었다. 마이어베어는 프로리센 황제 직속의 고위 관직에 오른 첫 번째 유대인이다. <위그노 교도>가 1841년 늦게나마 프로이센에서 초연할 수 있었던 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덕분이었다. 마이어베어는 무대 위로 종교 갈등을 다시 한 번 불러들였다. 재세례파 교도이자 혁명주의자였던 얀 판 레이덴의 이야기를 소재로 <예언자>를 만들었다. 마이어베어는 <예언자>를 1839년 혁명의 와중에 완성해 초연했다. 1848년 프랑크푸르트 성 바울 교회에서 열린 독일 국민입법의회는 종교나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을 준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혁명운동의 수명은 짧아도 너무 짧게 끝나 버렸다. 프랑스 혁명은 진압되고 독일은 보수적이고 국수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파벌이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1850년대와 6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1853년에 나온 고비노의 책 <인종 불평등론>이 널리 읽혔다. 고비노는 1816년에 태어나 1882년에 죽은 프랑스의 작가이나 외교관으로 나치의 민족주의 이론에 영향을 준 <인종 불평등론>과 소설 <플레이아데스>를 썼다.

마이어베어는 후기 오페라 <아프리카의 여인>에서 더 이상 신앙을 언급하지 않는 대신 인종 간의 갈등을 다뤘다. 아프리카 여인 셀리카는 정복자인 바스코 다 가마를 사랑한다. 셀리카는 자신의 민족을 공격한 그를 보호하지만 바스코가 포르투갈의 시골처녀 이네스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포기한다. 마이어베어는 <아프리카의 여인> 초연 1년 전인 1864년 파리에서 죽었다.

진보에서 극우로 변해가는 바그너

혁명과 더불어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던 분위기는 그에 대한 반발과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로 급선회했다. 마이어베어의 음악을 숭배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리하르트 바그너는 창작 초기만 해도 마이어베어에 이상하리만큼 열광해 <예언자>를 상연한 밤을 ‘신탁의 밤’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음악에서의 유대교>라는 논문을 내면서부터 비열하게 반유대주의로 돌아섰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독일 출신의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젊은 작곡가 겸 신예 음악감독이었다. 바그너는 발트 해의 리가라는 국가에서 활동했다. 리가에서 바그너는 아내이자 배우였던 민나 플라너와 함께 빚쟁이들에게 쫓겨 여권도 못 챙기고 도망쳐 나왔다. 바그너는 1839년 가을 마이어베어가 있는 파리에 왔다. 바그너는 숭배에 마지않던 ‘거장’에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고 마이어베어의 보호 아래 있었다.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소개장을 갖고 수도 파이로 향했다. 바그너는 오페라 <리엔치>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두 편을 파리에서 완성했지만 파리에서 초연하지 못했다. 실망한 바그너는 1842년 독일로 돌아와 드레스덴에서 국왕의 부름을 받고 작센의 궁정악장으로 임명됐다.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에 대한 실망과 비난, 프랑스 전체에 대한 피상적 증오로 가득찼다. 바그너는 곧 반유대주의, 반프랑스주의, 반여성주의 세계관으로 변질했다.

바그너는 금융업자 로트쉴트 가문에게 빚을 지고 힘들어 했다. 로트쉴트 가문은 유럽 굴지의 은행가 왕국을 건설한 유대인 가문으로 18세기 이후 250년 동안 유럽의 숨은 지배자로 활약했다. 고리대금으로 출발해 훗날 독일어권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해 자금조달과 관리에 깊이 개입했다. 1840년 이후 파리에선 로트쉴트의 가장 젊은 후계자가 가문의 금융기업을 이끌었다. 그는 프랑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채권자였다. 만성적인 자금난에 시달렸던 바그너는 이 사실이 아니꼬워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뭉쳐갔다.

혁명은 바그너의 모든 정치적 희망을 수포로 돌렸다. 바그너는 혁명 때 드레스덴 바리케이드 사건에 휘말리면서 반란의 주동자로 수배돼 쫓기다 도망치듯 망명했다. 당시 바그너의 유대인과 프랑스에 대한 증오는 병적인 수준이었다. 바그너는 유대인 타도를 맹세하기에 이르렀다. 바그너는 <음악에서의 유대교>을 써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유대인에 대한 모든 비난과 유대인 증오와 관련된 모든 문학적 이미지를 인용했다. 유대인들이 혁명의 와중에 시민권과 선거권을 확보한 사실을 두고도 거세게 비난했다.

1860년대 중반 외교적 위기가 찾아오면서 유대인 문제는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바그너는 이미 코지마 폰 뵐로와 살림을 차렸다. 코지마는 아버지 프란츠 리스트와 그의 경건한 여인 카롤리네 폰 사인-비크겐슈타인의 교육 덕분에 편협한 반유대주의로 성장했다. 그녀는 바그너를 유혹했다. 그녀의 1870년 5월28일자 일기장엔 유대인이 “페스트나 다름없는 놈들”이란 악담이 들어 있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에게 “유대인 종족은 원수로 태어났으며 특히 독일인들은 그들로 인해 몰락해 왔다”고 주장했다. 1871년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서 극장을 세웠다. 1883년 바그너나 베네치아에 숨을 거두자 코지마는 상속인으로 바이로이트의 운영을 이어받았다.

구스타프 말러

바그너의 미망인 코지마가 명성이 자자한 동방유대인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에게 바이로이트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보헤미아 출신인 말러는 포도주 상인이던 바루흐 말러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언론은 이 유대인 작곡가의 인격을 당시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모독했다. 구스타프 말러는 요한나 리히터라는 여성 성악가에게 열중했다. 말러는 프라하 국립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유대주의는 끊이지 않았다.

1889년 양친이 모두 죽은 뒤 말러는 어린 4명의 동생 생계를 떠맡았다. 그러나 말러는 부다페스트 극장에서 해고돼 함부르크로 무대를 옮겼다. 함부르크의 스타 지휘자이던 한스 폰 뷜로는 최고의 지휘자에 필적할 만하다며 말러를 격찬했다. 말러가 신작들로 성과를 올리던 바로 이때 유대인에 대한 반목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거세졌다. 이때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받았다. 1897년 2월23일 말러는 결국 개종해 세례를 받았다. 가톨릭 신자가 된 구스타프 말러는 1898년 10월 빈 궁정오페라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빈의 반유대주의 움직임은 강력했다. 1897년 이래 시장을 맡은 카를 루에게르는 기독교 사회주의자였다. 이 사람은 명백한 극우파였다.

1905년 영국 데카당트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유대인’을 주제로 쓴 원작으로 만든 오페라 <살로메>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빈 궁정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려고 할 때도 상황은 여전히 파란만장했다. 헤롯 왕의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헤롯의 의붓딸 살로메가 치마를 흔들며 춤춘 대가로 은쟁반 위에 담긴 예언자 요한의 목을 요구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예술에 능통한 베르타 추커칸틀은 사롱을 좌우할 수 있었고 말러는 궁정과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었다. 빈에서 말러가 적대감에 둘러싸였던 시절 확고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중재 덕분이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말러는 알마 쉰틀러를 만나 1902년 결혼했다.

젊은 작가 오토 바이닝거가 1903년 베토벤이 임종한 빈의 휴바르츠슈파니어하우스에서 권총 자살했다. 오토 바이닝거는 1880년에 태어나 1903년 23살에 죽은 오스트리아 철학자로 유일한 책 <성과 성격>(1903년)에서 후대 반유대주의과 인종차별주의, 반페미니즘 선전가들에게 지침을 주었다. 그러나 오토 바이닝거는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의 자기 증오’는 이후 여러 유대인 지식인들에게도 나타났다. 특히 서방 유대인은 동방 유대인을 더 차별했다. 자기 증오는 19세기 말 모든 유대인이 일반적으로 지닌 문제는 아니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네 번째 국외 여행에서 귀국한 뒤 1911년 5월18일 죽었다.


12장 위풍당당 행진곡 : 베버, 그리그, 엘가

독일 민족형성의 역사에서 중대한 이정표는 다름 아닌 ‘30년 전쟁’이었다. 치명적인 전쟁의 공포를 체험한 독일인들은 새로운 애국주의를 이끌어냈다. 내로라하는 독일 작곡가들은 바로 함부르크의 거위 시장에 들어선 오페라극장에서 독일어로 만든 오페라를 발표했다. 독일어로 썼지만 오페라의 드라마적 구상은 이탈리아의 전형을 따랐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독일 궁정에선 일상 언어로는 프랑스어를, 음악 언어는 이탈리아어를 선호했다.

민족주의의 뿌리,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1812년 왕비와 황태자가 자기 공연을 관람하는 기회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자리에 모인 진짜 신사 숙녀들을 만족시키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베버는 1813년 프라하 오페라극장 감독으로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채용됐다. 베버는 1816년 작센 왕국으로부터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제안 받았다.

베버는 1826년 연주 여행 중 런던에서 죽었다. 통일을 재촉하던 유럽의 모든 국가가 그러했듯이 독일에서도 음악으로 만든 기념 작품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수백 년 동안 ‘식민지’로 고통받은 노르웨이에선 그들의 오랜 뿌리를 고대 스칼데의 작품에서 찾았다. 스칼데는 고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음영시인으로 악기 반주 없이 노래를 불렀다.

에드바르드 그리그와 리카르드 노르드라크는 그들의 음악에 스며든 독일과 덴마크의 영향을 부정하며 민족 특유의 음색을 만들었다. 그리그는 민요 멜로디로 실험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그리그는 노르웨이 역사를 자신의 오페라 소재로 사용했다. 그리그는 헨릭 입센이 쓴 초기 역사극으로 <십자군 시구르>와 <올라프 트뤼크파존 왕>을 만들었다. 그리그는 역시 입센의 글을 원작으로 한 대표작 <페르 귄트>로 국제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페르 귄트>는 노르웨이판 파우스트였다.

러시아에선 미하엘 글린카를 민족주의 음악의 시조로 내세웠다. 차르 시대 러시아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를 위시한 서유럽풍 작곡가들과 알렉산더 보로딘, 밀리 발라키레프, 세자르 규이, 니콜라이 림스키 콜샤코프,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등 5인조가 뭉쳐 강력한 민족주의 음악을 한 판 펼쳤다. 무소르그스키는 <민둥산의 하룻밤>을 만들었다.

19세기가 흘러가는 동안 상당수 민족주의는 쇼비니즘으로 변질했다. 애국주의 음악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행진곡을 국왕에게 보내 마음에 들면 출세 길이 열리는 시절이었다. 미국은 1860년대 민족주의 음악이 필요했다. 행진곡 작곡가 존 필립 수자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애국적 노래로 주목 받았다.

장엄 서곡과 승리의 노래

차이코프스키는 열세 올리다가 마침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러시아군의 전투 과정을 묘사했다. 그는 먼저 저 유명한 러시아 국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를 인용했다. 이 선율은 <라 마르세예즈>와 대립했다. 베토벤은 이 <라 마르세예즈> 선율을 <말보로> 행진곡과 <브리타니아여, 통치하라>에 대항하는 단결된 전투력의 상징으로 제시한 바 있다.

‘군주적 인간’이 무엇인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음악사에서 지그 프리트를 만날 수 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장 중 마지막 두 편에 나오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젊은 영웅으로 유명하지만, 로베르트 슈만의 <게노베바>에 나오는 지그 프리트는 긍정적인 군주이자 영웅이다. 19세기가 추구하던 위대한 유토피아형 인간이었다.

바그너는 1849년 드레스덴의 바리케이트 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바그너는 독일인이 선택받은 종족이란 확신을 지녔다. 바그너는 “파리가 다 타버려 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희망과 영광의 나라

영국 르네상스 음악의 거장은 존 던스터블이었다. 존은 베드포드 대공의 궁전에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이자 음악가로 고용됐다. 프랑스를 상대로 한 ‘백년전쟁’이 벌어졌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왕관을 쓴 작곡가였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전속 악단인 왕실 성가대를 확대했다. 이는 교황청과 결별을 의미했다. 헨리 8세가 앤 볼린과 두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 엘리자베스는 월리엄 버드, 존 다울랜드, 토머스 몰리 같은 우수한 영국 작곡가를 주변에 불러들였다. 버드는 신앙이 두터운 가톨릭 신자였지만 왕실의 은총을 입었고 다울랜드는 작곡가 겸 류트 연주자로 한때 가톨릭에 속했지만 결국 여왕의 직속 경찰관리가 돼 첩자 신분으로 구교 출신의 반역자들을 색출하는 일을 도맡았다. 몰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비밀정보원으로 대륙에 잠입해 영국 가톨릭 망명자들을 찾아가 첩자 노릇을 했다.

18세기 초 하노버 가문이 영국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 음악이 영국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조지 2세는 헨델을 왕립 음악원 예술감독으로 불러들였다. 헨델은 성공이 보장된 이탈리아 양식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영국 작가 존 게이와 독일 작곡가 요한 크리스토프 페푸쉬는 1728년 <거지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탈리아 오페라를 선호하는 귀족들의 인격을 런던의 거지, 사기꾼, 창녀들이 사는 사창가로 이식한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오페라를 조롱하며 헨델의 생계를 어렵게 했다. 그러나 곧 헨델은 영국 민중이 가진 민족의식와 종교의식을 인정하고 영국의 음악 전통에 의거해 대표작 <메시아>를 만들었다. 하이든, 베버, 멘델스존은 1800년대 즈음 영국 음악계의 절정과 함께했다. 클라라 슈만은 1856년 초 순회여행 중 접한 영국 음악에 대해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신음을 토했다.

1827년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 폰 작센 코부르크 공과 결혼했다. 여왕은 남편을 위해 독일 음악으로 전향했다. 영국은 멘델스존에게 열광했다. 젊은 음악가는 독일 유학을 다녀온 것만 증명하면 출세 길이 열렸다.

가장 영국적인 작곡가로 알려진 설리번은 왕립 사관학교 음악선생이던 아버지 밑에서 1842년에 태어났다. 미국의 영화 중 저물어가는 19세기를 배경이나 예배중인 경우라면 예외 없이 아서 설리번의 종교 음악 <전진하라, 주의 군사들아>가 나온다. 1836년 처음 등장한 ‘노동조합’은 이후 노동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1842년 최초의 파업이 일어났다. 아일랜드에선 1845년 대기근 탓에 사회적 갈등이 첨예화했다.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한 뒤 1801년 대영제국은 덴마크 함대까지 격파해 해상권을 잡았다. 제국의 전성기에는 전 세계의 20% 땅덩이를 영국이 통치했다. 작가들은 끝없이 팽창하는 제국주의에 일찌감치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영국인의 우월함을 논증한 토머스 칼라일은 피치못할 경우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열등 국가에 문명을 깨우치라고 했다. 엘가는 <희망과 영광의 땅>이라는 행진곡으로 독일에 널리 알려졌다. 이 작품은 <위풍당당 행진곡>의 일부분이다.


13장 승리의 팡파르 : 베를리오즈, 오펜바흐, 레거, 쇤베르크

애국주의는 1914년 전과 특히 1차 대전 동안 군사를 확장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한 번의 불화를 경험했다.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음악가의 의구심은 황제에 대해 헤이즐타인이 가지고 있던 반감과 같이 최초로 음악가적 저항문화로 자랐다. 헤이즐타인은 퍼터 워록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영국 작곡가 겸 평론가다. 피터 워록은 1894년에 태어나 1930년에 죽었는데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예술가로 활약했고 문학작품도 다수 남겼다. 36살에 미스터리하게 죽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음악가는 조국의 봉사자로서 인식되었다. 그들은 나라의 통치에 대해 거의 비판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국가에 반대한 음악가들은 서서히 퇴출당해 사라졌다. 그들 중 청중 대다수에게 위대한 아름으로 각인된 경우는 극히 소수다. 그 소수 가운데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있다. <환상 교향곡> <레퀴엠> 등을 만든 베를리오즈는 불유쾌한 작곡가였고 천재적이고 가능성이 넘쳤으며 기괴하리만큼 완벽했다. 베를리오즈는 배타적인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내며 청중으로부터 꾸준히 악평을 들었다. 진실한 음악은 충격을 주고 선동적이며 흥분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베를리오즈는 언제나 강조했다. 베를리오즈가 살던 시대는 1830년대 혁명기였다.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는 보수 정책에 분노한 파리 시민은 진보적 언론의 격려에 힘입어 들고 일어났다. 시가지에는 바리케이드 전이 벌어졌고 왕은 도피했다. 이 봉기로 오를레앙 대공은 '시민의 왕' 자격으로 왕위에 올라 루이 필립 1세가 됐다. <환상 교향곡>의 감동적 울림은 이 시대에 꼭 맞아떨어졌다.

베를리오즈는 초기 작품부터 혁명적이었다. <사르나다팔러스> 칸타타는 삶에 탐욕스러운 왕의 자멸을 다룬다. 사르나다팔러스는 아시리아 최후의 왕으로 전설 속 인물로 방탕함의 대명사였다. 프랑스 예술 아카데미는 1830년 칸타타 대본을 공모했다. 베를리오즈는 이 응모에 마지막 악장을 제출하지 않고서도 1등을 먹었다. 마지막 악장은 궁전이 붕괴되는 장면, 즉 왕위의 전복을 상징한 장면이었다. 7년 뒤 베를리오즈는 국가로부터 작품 위촉을 받았다. 1836-37년 프랑스 정부는 다시 진보 내각이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베를리오즈가 정부 의뢰로 만든 <레퀴엠>은 1830년 혁명의 희생을 기념했다. 1837년 초 미사곡이 완성되기 바로 직전 내각 해산과 함께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섰다.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둘러싸고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는 가운데 베를리오즈는 거의 말려들 뻔했다. 파리 음악원장 루이지 케루비니는 베를리오즈와 계속 갈등했다. 게루비니는 나폴레옹 시대를 기반으로 토스카나 대공의 후원을 받은 조지 3세의 궁정작곡가였다. 반면 베를리오즈는 혁명주의자로 여겨졌다. 베를리오즈는 선동적이 천박한 잡문작가였고 음악원의 도서관 사서였고 항상 돈이 궁해 일탈한 작품들을 작곡했다. 베를리오즈의 마지막 작품은 <트로이 사람들>로 신들의 대화로 운명의 장난에 빠진 인간을 담았다. 나폴레옹 3세는 2부의 상연만을 허락했다. 1863년 11월 <트로이 사람들>은 이렇게 반 토막으로 무대에 올랐다.

오펜바흐

자크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프레우스>는 손 곱히는 오페레타다. 오페레타는 대화와 노래 충 등으로 구성된 '작은 오페라'로 모차르트가 최초로 사용했다. 오펜바흐는 1819년 퀼른의 그리스 시장 근처 유대인 거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정치의 영향력을 통찰했다. 1833년 반유대주의로 점철된 시기 파리로 탈출해 음악을 공부했다. 1848년 봉기한 쾰른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고무시키는 애국노래를 작곡했다.

<지옥의 오르페우스>에서 주피터는 언제나 폭정의 카드를 꺼내 드는 신으로 에우리디체에게 정욕을 품고 있다. 그는 심지어 퉁퉁한 쉬파리로 둔갑해 그녀에게 접근하는데 이 모습이 언제나 극장 여배우들을 향한 욕정에 굶주려 있던 나폴레옹 3세를 빗댄 풍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작품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공연한 <게롤슈타인 공작부인>은 유럽의 모든 강대국을 희롱했다.

숭고한 세계전쟁

브람스가 1871년 승리를 기념하며 작곡한 <승리의 노래>는 제국시대를 위한 더할 나위 없는 레퍼토리였다. 라인 강의 주인공인 로렐라이에 관한 음악은 1879년부터 1900년 사이에 알려진 오페라만 무려 열 편이나 된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누가 뭐래도 하이네의 시에 음악을 붙인 프리드리히 지리허의 노래다.

1914년 1차대전과 함께 애국주의 노래가 쏟아졌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1914년 "러일 전쟁 이래 나는 조국을 수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눈을 떴다"고 열광했다. 박스 레거는 1912년 이미 남성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마의 승리의 노래>를 발표했다. 게르만족의 영웅주의에 대한 헌사였다.

1차 대전은 자신만의 타발리아(=팡파르), 자신만의 전쟁 음악을 피리요로 했다. 반할은 넬슨 제독의 잊을 수 없는 승리를 묘사한 <트라팔가 해전>을 작곡했다. 전쟁 오페라가 처음 제작됐다. 주세페 베르디는 자신의 26편의 오페라 가운데 무려 16편을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 1916년 막스 레거도 전쟁 음악을 작곡했다.

1914년 파울 힌데미트는 “어디서나 프랑스가 타격을 입은 것을 기뻐한다”고 말했다. 모리스 라벨은 왼팔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에게 헌정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뿐만 아니라 <라 발스> <볼레로> <치간느>에서도 전쟁과 인종차별이 야기한 야만성과 우둔함을 공개 비난했다.


14장 나치 십자가 아래서 : 요한 스튜라우스, 힌데미트, 피츠너

1933-1945년 사이 청년 히틀러와 독일 소녀동맹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소속감의 중심 토대를 형성했다. 대학생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조피 숄과 한스 숄의 누이 잉게 숄은 자기의 책 <백장미>에서 “어디서나 들려오는 이름이었던 히틀러라는 소리에 청년들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히틀러는 권력을 통해 ‘음악을 덧붙인 그림’을 이용하면서 국민의 영혼에 영향력을 끼쳤다. 행진과 축제는 배경음악을 반드시 필요로 했다.

위대한 독일의 소리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던 리펜슈탈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다큐 <올림피아>를 찍었다.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다큐멘터리적 가치가 있는 올림픽 영화를 촬영했고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뮌헨 출신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감명 깊은 찬가를 작곡했다. 레니 리펜슈탈은 1902년에 태어나 2003년에 죽었다. 리펜슈탈은 독일의 배우, 감독, 영화제작자로 특히 다큐에서 혁신적인 촬영기술을 시도했다. 나치 시절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영화활동이 금지되자 이후 사진가로 활동했다. 나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찍은 다큐 선전용 필름 <의지의 승리>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촬영한 타큐 필름 <올림피아>가 있다. <올림피아>는 강인한 신체묘사와 게르만 민족의 인종주의적 우월함을 결합했다. 손기정의 우승 장면도 이 필름에 있다.

영화음악 작곡가 빌리 좀머펠트는 천박한 대중음악을 작곡하라고 요청받았다. 그는 1934년 이미 체제 눈 밖에 나 악장 직위를 뺏겼다. 제국이 말할 때까지 가명으로 몸을 숨기고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히틀러 치하에서 이들의 새로운 음악은 ‘북부 게르만’ 민요와 유사하게 전음계와 단순한 선율을 특징으로 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올림픽 찬가는 전음계에 토대를 두었으며 그 선율은 최대한 단순했다. 나치 선전을 민중 전체에 용이하게 전파하고자 노래는 익히기 쉽고 따라 부르기 쉽게 작곡했다. 나치 돌격대 찬가는 누구나 아는 <나의 아버지는 나그네였네> 멜로디에 새 가사를 붙인 거다. 나치 당가였던 <호르스트 베셀 리트>가 국가로 채택됐다. <깃발을 높이 올려라>는 원제목의 이 노래를 지은 호르스트 베셀은 시험에 떨어져 1926년 히틀러의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에 기입했다. 그는 매춘부 에르나 야에니케의 기둥서방이었는데 1930년 에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또 다른 포주로부터 총격을 받고 죽었다. 나치는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된 그의 죽음을 공산주의자에게 기습당한 것으로 만들어 문화성 장관 괴벨스는 그를 민족사회주의의 순교자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

나치가 우선 보급한 건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이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베버, 슈베르트, 바그너가 있었다. 문화성 장관 괴벨스는 1933년 3월 1일 ‘방송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수중에 넣었다. 1933년 독일문화전투동맹은 ‘음악회의소’라는 특수기관을 설립했는데 발기인은 하인리히 일레르트 같은 정치가들이었다. 음악회의소의 목적은 당연히 모든 음악 창작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 중요 목표는 독일 문화계에서 유대인 음악계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회의소는 금지할 음악 목록을 완성하고자 했다. 음악가 사전에는 음악가의 혈통을 명시했다.

힌데미트

지도자 평의회는 1933-1934년 파울 힌데미트, 에밀 니콜라우스 폰 레츠니체크, 한스 피츠터, 에두아르트 퀘네케 같은 유명 예술가들을 의회 요직에 임명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대표를 맡았고 그의 대리인은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맡았다.

푸르트벵글러는 대외적으로 유명한 유대인 음악 동료를 최선을 다해 비호했다. 힌데미트는 처음엔 독일 정당에 전적으로 협력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음악 어법은 나치 국가가 요구하는 영웅적 멜로디의 아름다움에 부합하지 않았다. 푸르트벵글러는 유대인 비호로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 음악감독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직위는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대신했다. 총애를 잃은 타락한 지휘자는 가택에 연금돼 출국도 금지당했다. 푸르트벵글러는 결국 괴벨스에게 접견을 신청하고 힌데미트와 관련한 자신의 기고문을 사과했다. 지휘자는 권력 앞에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1938년 힌데미트의 오페라 <화가 마티스>가 취리히에서 초연됐다. 오페라는 마인츠 시 광장에서 이단자의 문서를 소각하는 종교재판 장면을 강하게 묘사했는데 이는 나치의 분서갱유를 암시했고, 결국 같은 해 힌데미트는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

피츠너

나치의 위협이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예술가들은 짐을 챙겨 외국으로 떠났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한스 피츠너도 마찬가지였다. 한스 피츠너는 과거 구스타프 말러의 제자로 1905년 <사랑의 정원에서 가져온 장미>를 빈 궁정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했다. 1917년 피츠너는 뮌헨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오페라 <팔레스트리나>를 초연했다.

히틀러는 3년 뒤 1923년 여름 병원에 입원한 피츠너를 찾아왔다. 피츠너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제국음학회의소 지도자평의회 일원이 됐다. 피츠너는 친구였던 작가 파울 코스만과 친분이 두터웠다. 여러 번 그의 시로 작곡했다. 유대인이던 코스만은 1933년 다카우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피츠너는 가장 친한 친구의 체포에 방관하고 정권의 앞잡이가 돼 친구의 살해에 일익을 담당했다. 파울 코스만은 결국 1942년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러나 피츠너는 작곡 차원에선 나치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나치는 훗날 그에게 <독일인의 정신으로 부터>와 유사한 작품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피츠너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피츠너의 음악은 히틀러의 취향과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는 1933년 이미 음악계 원로였다. 1905년 오페라 <살로메>로 충격적 반응을 끌어냈다. 슈트라우스는 1930년대 지배하던 권력자에게 그때 상황에 걸맞는 음악들을 작곡하며 충성을 바쳤다. <올림픽 찬가> <트럼펫 합주를 위한 빈 축제음악> <일본 축제음악>(1940년)이 그것이다. <일본 축제음악>은 3국 동맹을 기념하는 음악으로 1930년 작곡한 <평화의 날>과 같은 오페라는 히틀러의 정치적 의도에 탁월하게 어울렸다.

그랬지만 슈트라우스도 숙청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제3제국’ 음악계에 상징으로 여전히 주요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은 히틀러와 괴벨스가 선호하는 종류의 음악이었다.

바그너의 반프리트 저택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반프리트’라는 저택을 갖고 있었다. 바이로이트는 1933년 이전부터 히틀러에게 음악 정치를 위한 무대를 제공했다. 바그너가 죽자 부인 코지마와 아들 지그프리트가 바이로이트를 물려받아 ‘축제극장’을 일대 혁신했다. 지그프리트가 신부로 맞이한 영국 여성 위니프레드는 철두철미한 쇼비니즘주의자로 히틀러의 천박한 환상에 열광했다. 위니프레드는 히틀러가 1923년 쿠데타에 실패에 란츠베르크 감옥에 복역할 때도 무수한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위니프레드는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지그프리트는 이런 아내를 평하며 “나의 아내는 히틀러를 위해 한 마리 사자처럼 투쟁하고 있다. 참으로 훌륭하게도”라고 말했다.

  히틀러와 바그너의 미망인 위니프레드(앞줄 왼쪽)

지그프리트 바그너가 요절한 뒤 아내 위니프레드는 몰려드는 히틀러 일당에게 반프리트 문을 활짝 열었다. 언론은 위니프레드와 히틀러 사이의 혼담 낌새를 감지했지만 지그프리트는 미망인이 재혼하면 상속권을 박탈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서 바그너도 독일 제국시대를 맞이한 초창기에 이런 기대에 부응했다.

나치가 물러간 1949년 위니프레드는 바이에른 수상의 지지에 힘입어 바이로이트 축제의 수장 자리를 다시 찾았고 민족사회주의 음악사업과 긴밀한 연관을 맺던 푸르트벵글러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같은 지휘자들은 계속 자신의 경력을 이어 나가며 우위를 지켰다. 바그너 자손들의 비호아래 다시 ‘축제’가 열렸다. 1917년에 태어나 1966년에 죽은 바그너의 손자이자 위니프레드의 아들인 빌란트 바그너는 1960년대 말 반프리트를 방문한 나치 때 공군총사령관이던 헤르만 괴링의 외동딸 에다 괴링과 나치 때 부총통이던 루돌프 헤스의 아내 일제 헤스를 위한 환영식은 물론 영국의 파시스트 지도자로 1932년 영국파시스트 동맹당을 창단한 히틀러의 열성 지지자 오스왈드 모즐리의 환영행사는 거의 시 전체 행사였다.


15장 타락한 음악 : 스트라빈스키, 아이슬러, 코른골드

1차 대전 중 병사들이 부른 노래 가운데 <북 치는 소년이여, 북을 울려라>라는 곡이 있다. 이후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이 음악에 변변찮은 가사를 붙여 불렀고 곧 그 노래는 나치 집단의 무력시위에 사용됐다. 무수한 나치 노래들은 주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당가 <호르스트 베셀 리트>도 마찬가지다.

나치 반대파들은 나치에게 사절당한 음악들을 취해 나치에 대한 저항 무기로 삼았다. 저항 예술은 대도시 카바레에서 특히 왕성했다. 1943년 뮌헨에서 만든 반체제 독일청년단체 ‘백장미단’의 리더였던 조피 숄과 한스 숄 남매는 사형당했다. 두 사람의 누나 잉게 숄은 1917년에 태어나 1998년까지 살았다. 두 동생이 죽은 뒤 동생들의 죽음과 저항을 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알렸다. 마르크 로테문트 감독은 2005년 조피 숄의 죽음 막바지를 다룬 <조피 숄의 마지막 나날들>이란 영화를 만들어 유럽에 잔잔한 반향을 불렀다.

잉게 숄은 처음 남동생 한스가 민족사회주의자들의 연대 사상에 감명 받아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했다고 말했다. 한스는 히틀러유겐트가 특정 노래를 금하자 처음으로 당에 의심을 품었다. 저항단체 ‘백장미단’은 철학교수 쿠르트 후버 교수와 한스, 조피 남매가 뮌헨에서 만들었다. 그들은 1942년부터 선전용 전단을 만들어 배포했다.1943년 2월 뮌헨 대학에서 전단을 나눠 주다가 체포당했다. 반역죄로 고소당한 뒤 단두대에서 죽었다. 숄 남매는 1943년 2월22일, 후버는 1943년 7월13일에 사형당했다.

피아니스트 카를로베르트 크라이튼도 비합법적으로 억울하게 숙청당했다. 1916년 본에서 작곡과 교수 아들로 태어나 뒤셀도르프에서 자란 크라이튼은 쾰른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나치 당원들이 학교로 쳐들어와 눈엣가시로 여기던 교수 산 명을 주먹과 막대로 구타하는 걸 봤다. 크라이튼은 1937년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크라이튼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이 스트라빈스키가 문제였다. 그는 독일 정권의 감시대상 명단에 오른 작곡가였다.

1943년 5월 ‘날개를 단 젊은 거장’ 크라이튼은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어떤 나치 여성 광신자는 그를 두 번이나 나치 문화성에 고발했다. 크라이튼은 체포되고 고문 받고 독방에 감금당했다. 판결은 이상하리만큼 초고속이었다. 1943년 9월7일 젊은 크라이튼은 단두대에서 죽었다. 수많은 망명 독일 음악들은 음악적 저항을 실천했다. 나치는 곧바로 그 음악을 금지시켰다.

최초의 박해 물결

1933년 5월10일 나치가 서적을 불태울 때 음악이 울려 퍼졌다. <불길이어 높이 솟아라> 같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의 승전가가 울려 퍼졌다. 유대인 음악가는 요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작곡가 베를톨트 골트슈미트는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쫓겨나자 영국으로 도주했다. 2월 중순 하인리히 만과 캐테 콜비츠는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와 등을 돌렸다. 이틀 뒤 ‘사격 면제’라는 법이 나왔다. ‘국가의 적’을 상대로 무기를 사용하면 무죄라는 내용이었다. 1933년 3월8일 강제소용소 설립을 공표했다. 공무원 지원요건을 아리안 족 만으로 제한했다. 노조 축소정책도 있었다. 모두 나치 집권 한 달 만인 1933년 7월14일에 이루어졌다. 강제 추방자는 집계한 숫자만 33만명이었다.

1933-1936년 망명자 대부분은 인접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언어가 통했기 때문이다. 작곡가인 한스 갈도 그랬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마저 합병하자 그들은 다시 영국으로 도주했다. 나치는 망명예술가가 참가하는 1933년 여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보이콧했다. 괴벨스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참가를 일시 금지시켰다. 괴벨스는 슈트라우스가 1920년대 이 페스티벌을 만들고 오랫동안 예술감독을 지낸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망명자들이 선호한 또 하나의 도시는 파리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경제적 이유로 망명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속하게 설립한 프랑스망명대책기관 ‘코미테나시오날’은 허용 가능한 망명자 수를 제한했다. 영국도 이민자들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영국도 프랑스처럼 경제적 걱정을 안고 있었다. 영국은 1938년 오케스트라 단원을 대상으로 이민자 금지법을 선포했다. 망명길에 오른 한스 갈은 막차를 타고 겨우 영국에 들어왔다.

그 밖의 망명지는 독일 예술가를 관대하게 대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음악을 문제 삼지 않았다. 러시아의 독일 음악은 긴밀하고 대체로 친근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노르딕 운명공동체 선서’로 나치에게 형제국가로 인정받았지만 1937년 외국인을 위한 새 법령을 만들어 정치적 망명자들을 조건 없이 수용했다. 덴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지휘자 레오 블레흐가 스웨덴에서 안식을 찾았고, 베를톨트 브레히트와 아내 헬레네 바이클로 린딩 섬에서 망명 첫해를 보냈다.

어디로 망명하든 <프라터 공원의 봄>을 작곡한 로베르트 슈톨츠 같은 일을 겪었다. 슈톨츠는 1880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나 대부분 독일 베를린에서 살았다. 1936년 빈으로 돌아갔지만 스위스로 다시 도망쳤다가 파리로 날아갔다. 나중엔 미국까지 갔다. 미국에서 슈톨츠의 영화음악은 승승장구 하고 오스카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망명객이었다. 코른골드는 11살 때부터 고향 빈에서 신동이었다. 1934년 영화음악 작곡가로 미국을 자주 다녔다. 나치 집권 이후 헐리우드에 남았다. 종전 후 오스트리아에 돌아가 예술가로 다시 기반을 잡는데 실패하고 1957년까지 여생을 헐리우드에서 보냈다. 망명음악가는 체류하던 나라의 음악계에 저마다 분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16장 “우리는 늪의 병사들” - 수용소의 노래들 : 울만

나치는 유대인을 독일 문화의 위험한 적으로 지명했다. 제3제국은 직업음악가로 구성한 유대인 연대를 제도적으로 조직했다. 1933년 창설한 ‘유대인 문화연맹’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문화연맹 가입만이 그들의 작품을 발표할 유일의 길이었다. 1942년 1월 개최한 악명 높은 ‘반제회의’는 모든 유대인을 단계적으로 제거한다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테레지엔슈타트

테레지엔슈타트는 체코 프라하에서 60km 떨어진 도시다. 나치는 여기에 1941년 대규모 유대인 거주구역인 ‘게토’를 설치했다. 테레지엔슈타트는 1940년 아우슈비츠 강제소용소로 가기 전 중간 기착지이자 유대인 학살 의혹을 숨기기 위한 전시용 도시였다. 중부 유럽 전역에서 이곳에 끌려온 유대인은 14만 명에 이르렀다. 대다수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었다. 1944년 유대인 학살로 국제 비난을 받은 나치는 테레지엔슈타트를 이상적 유대인 도시로 위장해 적십자를 초대했다.

나치는 비위생적인 병원으로 사용하던 학교를 급하게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건물 벽을 새로 칠하고 상점과 유치원, 콘서트홀까지 만들었다. 적십자 대표단이 올 때 커피숍에 앉아 평화로운 도시의 이미지를 심어줄 젊고 아름다운 여성까지 차출했다. 나치는 심지어 적십자 대표단이 방문하기 직전 게토에 너무 많은 유대인들이 수용됐다며 7천5백명을 아우슈비츠로 보내 죽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1944년 6월23일 적십자 대표단은 테레지엔슈타트를 방문했고 나치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대표단의 조고서는 칭찬 일색이었다. 이곳이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중간기착지라는 점과 대표단이 오기 전 6만8천명의 유대인이 살해됐다는 사실은 전혀 알리지 못했다.

비판 정신은 비밀스럽게나마 있었다. 레오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테레지엔슈타트 판 빈의 노래>라는 저항곡이 유행했다.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는 과거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빅토르 울만이라는 비범한 작곡가가 수용돼 있었다. 1942년 9월 빅토르 울만은 테레지엔슈타트에 있었다. 울만은 ‘여가 선용’ 부서의 예술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울만은 불안과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서서 대표작인 오페라 <아틀란티스의 왕>을 완성했다. 울만은 1944년 10월 16일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절멸 또는 대학살

순교는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사람들은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헬름노, 소비보르, 트렌블린카에 있는 집단 학살 수용소로 옮겨졌다. 기차가 서자 화물칸 문이 열리고 야간조명이 번득이며 “빨리 빨리”를 외쳤다. 음악이 파편화돼 흘러나왔다. 여자 노인 청년 어머니들은 따라 분류했다. 나머지는 ‘천국으로 가는 길’ 즉 가스실로 걸어갔다. 확성기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차르트의 실내악곡 <아이네 클라이테 나하트 무지크>와 함께 죽음을 기다리던 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죽은 시체를 매장하는 작업은 하루 대략 4-5회 교대로 진행했다.

수용소 음악은 나치친위대가 관리했다. 아우슈비츠에는 남성 및 여성 악단이 있었다. 절대로 멈출 수 없는 나치 군가 <개암나무 열매는 흑갈색>과 더불어 아침 점호가 끝나면 수감자들은 오케스트라의 행진곡을 들으며 강제 노동을 하러 출발했다. 여성 악단 소속 가수였던 파니나 페넬롱은 “악단은 마치 티롤의 악단처럼 무척이나 유쾌하게 행진을 진두지휘했다”고 회고했다. 저녁이면 점호가 끝나고 유행가를 부르라는 위협이 시작됐다.

불가사의 하지만 제3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들이 만든 음악프로그램의 영향력은 몇십 년 동안 지속됐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후가 낭만주의음악에 대한 편애도 이런 프로그램의 영향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카를 뵘처럼 제국이 키운 음악가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민족사회주의 음악학자들은 1980년대까지 제자를 길러내고 자신의 학문을 널리 알렸다. 카를 뵘은 1894년에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나 1981년에 죽은 지휘자다. 1921년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극장 지휘자가 돼 나치 때 1943년 빈 국립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이었다. 종전 뒤 빈 필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고 베를린 필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와도 좋은 궁합을 이루었다. 카를 뵘은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당의 입장에 찬성하고 적극 나치를 옹호했다. 그는 드레스덴 음악감독 시절 나치의 통치와 문화적 목적에 경의를 표했고 1938년 빈 필을 지휘할 땐 당시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환영하며 히틀러식 경례를 했다. 그러나 나치가 유대이이던 자기 아내를 체포했다는 소식에 불같이 화를 냈다고도 한다.

내(저자) 기억에 17살 무렵이던 7학년 때 음악 교과서에는 <빛나는 피리소리가 우렬 퍼지네>라는 나치 노래가 아무런 주석 없이 수록돼 있었다. 나는 당시 어떤 의심도, 지식도 없이 나는 그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


17장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다 : 쇼스타코비치

드리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사중주 8번은 이해하기 쉬운 모티브도 아니고 멜로디 형태도 선율적이거나 호의적이 않다. 쇼스타코비치는 스스로 이 작품이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장송곡으로 연주되길 원했다. 암호 D-Es-C-H는 실로 강박적으로 반복했다.

1960년 쇼스타코비치가 이 사중주를 완성하자마자 정부는 이 작품을 파시즘과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작품으로 헌정하라고 명령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에 순응해 작품이름을 이에 상응하는 부제를 붙였지만 “작품들이 대체 파시즘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사중주 8번은 하나의 자전적 사중주 작품이다. 나는 그 안에서 누구나 아는 <괴로운 노례노동으로부터 고통받다>라는 노래를 인용했다”며 잘못된 해석에 대해선 분개했다.

흐루시초프 정권 하의 문화성은 이런 그의 취지를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반발로 인식했다. 사중주 8번은 소비에트 정부의 음악적 견해에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쇼스타코비치는 형식주의라는 명목 아래 ‘낡아 빠진 부르주아 문화’에 호감을 표한다고 매우 자주 비난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예술작품 전체를 통해 국가적으로 부단히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초연되고 나서 경탄을 받았으면서도 바로 다음 <프라우다>에게 무자비하게 혹평 받고 두 번 다시 상연하지 못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저항과 타협

쇼스타코비치는 당당하게 소신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정부가 지시한 과제를 받아들이거나 노골적으로 소비에트답다고밖에 할 수 없는 영화음악을 작곡하곤 했다. <유대인 민중시에 의한 작품> 시리즈를 중앙위원회가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안 쇼스타코비치는 바로 이어 영화음악 <베를린의 몰락>과 <숲의 노래>를 전반적으로 민중이 좋아하는 요소를 고려해 만들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 9월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진보적 시민계급 가문으로 나로드니키를 지지했던 쇼스타코비치의 부모는 민중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려서 레오 톨스토이와 혁명을 적극 지지하는 진보적 사상가 알렉산드로 헤르첸의 책을 읽었다. 어머니는 유난히 음악에 애정이 많은 피아니스트였다.

1905년 1월 ‘붉은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민중은 전함 포템킨 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대도시에서는 동맹파업이 벌어졌다. 1918년 혁명정부는 파괴된 경제를 안정시키려고 서방 투자가를 불러들였다. 문화 교류도 허용하고 서유럽 예술계의 거장을 초빙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쇼스타코비치는 근대주의를 밀도 높게 공부했다.
레닌그라드에선 진정한 의미의 부르주아 작품도 성영했다.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가 그것이다. 쇼스타코비치도 오페라를 작곡했다. 1927년 고골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코>를 작곡했다. 3년 뒤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작곡했다.

천박했던 스탈린의 음악 이해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반전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궁정예술이라는 이유로 오페라를 거부했다. 쇼스타코비치의 무대작품은 강도 높은 비판의 대상에 올랐다. 1931년 예정된 오페라 <코>의 상연은 취소됐다. 국가는 말년의 쇼스타코비치에게 영화음악을 작곡하도록 강요했다. 스탈린(본명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은 쇼스타코비치의 천적이었다. 스탈린은 어린 시절 가엾은 구두닦이였고 매일 밤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잔혹하게 두들겨 맞으며 자랐다. 1894년 신학교에 들어가기까지 교양이라곤 없었다. 신학교를 중퇴한 스탈린은 사회주의노동당에서 구원을 찾았다.

트로츠키는 1937년 결국 멕시코에서 안식을 찾았다. 멕시코의 위대한 프레스코 화가 디에로 리베라는 트로츠키 사상의 조건 없는 추종자였고 이 추방당한 정치가를 기쁘게 맞이했다. 아내 프리다 칼로도 트로츠키의 초상화를 그렸다. 리베라와 마찬가지로 프리다 칼로도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였다. 자신의 ‘푸른 집’을 망명자들에게 제공했다. 트로츠키는 1940년 여름 피켈을 든 청부자객의 손에 죽었다.

라흐마니노프는 국외로 명명했다. 1년 뒤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도 망명했다.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마르크 샤갈도 192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서방으로 망명했다. 1924년 러시아에선 현대음악연맹이 창립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이곳에 가입했다. 1922년 아버지의 때 이른 죽음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쇼스타코비치가 선택한 첫 직업은 영화관에서 무성영화를 위해 반주하는 일이었다. 교향곡 1번은 1926년 5월12일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초연했고 대성공했다. 두 번째 교향곡은 국가의 위촉으로 작곡했다. 제목부터 <10월>로 혁명 1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 제목과 내용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됐다. 쇼스타코비치의 라이벌 니콜라이 미야스코프스키도 교향곡 6번에 <혁명>이란 제목을, 교향곡 12번엔 <콜호스>(집단농장)라는 제목을 붙였다. 쇼스타코비치도 이런 부추김에 번번이 무릎을 꿇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합창이 들어간 오케스트라를 선호했다. 가사가 있는 노래가 절대음악보다 더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이런 음악적 이해는 조학하기 이를 데 없다.

쇼스타코비치는 고골리의 <코>를 선택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없어진 코가 나중에 직접 혼자서 고급 관리행세를 하다가 다시 주인에게 되돌아오는 코발료프라는 관리에 대한 이야기다. 코라는 단어는 ‘성기’를 뜻하기도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니콜라우스 1세 황제시대에 대한 풍자에 주목했다. 그러나 작품은 호평을 얻지 못했고 1931년 <코> 공연은 취소됐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음악가는 늘 억압당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지부에서 간부를 맡았다. 이는 현 정권과 화해를 하고자 한발 나아간 시도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적 줄타기를 감행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이 변질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작품 29번은 이런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 작품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냉철하면서도 투명한 관현악곡이었다. 가난한 여인 카타리나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 지노비 이즈마일로프와 결혼한다. 폭력적인 시아버지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러다 새로 고용된 젋은 세르게이라는 하인과 사랑에 빠진다. 카타리나는 시아버지를 독살하고 남편도 살해한다. 살인자 커플은 유죄를 받고 강제노동을 선고받아 시베리아로 추방된다. 유형 길에 세르게이는 카타리나를 배신하고 소네트카라는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카타리나는 절망해 라이벌 여인을 물에 빠뜨려 죽인 뒤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맥베스 부인>은 프라하, 취리히, 뉴욕에서도 상연됐다. 1935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스탈린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조용히 이 작품을 경청했다. 한 달 뒤 <프라우다>엔 쇼스타코비치의 이 작품을 비난하는 기사가 나온다. 쇼스타코비치는 ‘민중의 적’이 됐고 그의 음악은 추방당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암살당할 것에 대비해 늘 옷을 완전히 입고 잠잤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투자할 만한 음악 천제를 소유하는 편이 국가적으로 유리하고 국제적 명성을 유지하는데도 좋다는 사실을 알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허락 하에 미국 여행까지 다녀온다.

1937년 여름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비상근 교수가 돼 교향곡 5번도 순조롭게 초연했다.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음악적 척도를 거의 건드리지 않고 만들었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 스탈린이 훌륭한 음악이라고 말한 조건에 부응하는 작품을 생산했다.

러시아 조국의 전쟁

2차 대전에 터졌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비에트 연방을 기습침공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때 만든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양식을 포기하고 전쟁의 잔임함을 폭로했다. 이 교향곡은 미국 청중에게 열광적 찬사를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전쟁을 반대하는 상징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 C단조는 반혁명 작품으로 배척당했다.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진정 베토벤과 같은 숭고함이 우러나오는 아홉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라고 요구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9번은 스탈린의 뜻과 반대로 대단히 난해한 작품이었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1945년 전쟁은 끝났고 냉전시대가 왔다. 쇼스타코비치는 서방의 영향에 저항하는 문화전쟁의 최전선 한가운데로 내몰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집 앞에는 매일 밤 소련 지도부가 보낸 어둠의 추적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48년 교수직 등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소련 중앙위원회는 <유대인 민중시에 의한 작품> 시리즈를 거부하라고 명령했다. 쇼스타코비치는 후퇴 말고는 여지가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스탈린의 산림경제정책을 찬양하는 <숲의 노래>와 영화음악 <잊을 수 없는 1919년>을 작곡했고 1951년엔 혁명을 기념한 시에 합창곡을 붙였다. 2년 뒤 1953년 스탈린은 죽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사형 집행이라는 숨 막히는 상황에서 한숨을 돌렸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0번, 더 정확히는 2악장의 조잡하면서도 적절하게 혼란스럽게 꾸며댄 스케르초로 스탈린을 추모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아내가 죽은 지 2년 뒤 1956년 두 번째 결혼했지만 다시 3년 뒤 이혼으로 끝났다. 1962년엔 세 번째 결혼했다. 아들 막심은 피아니스트가 됐다.

쇼스타코비치는 1959년 미국 학술 아카데미 회원, 1963년엔 유네스코 음악 자문위원, 1967년엔 오스트리아 훈장 수여, 프랑스 예술 아카데미에서 뇌종 도뇌르 상을 받았다. 소비에트 연방정부의 달라진 태도는 그의 예술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1961년 9월 쇼스타코비치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18장 공동체에 음악만큼 유용한 도구는 없다 : 헨체, 슈톡하우젠, 크세나키스, 윤이상

2차 대전 중 학살당한 유럽 유대인은 4백만명이 넘는다. 불구자만 7만명이 넘고, 정신질환으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다. 1947년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칸타타 <바르샤바의 생존자>가 초연됐다. 이 작품의 가사는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동시대인의 증언에 근거해 나왔다.

‘냉전’의 절정은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이다. 이런 긴장이 무엇보다 이후 문화계에 영향을 끼쳤다. 한스 베르너 헨체가 1968년 칸타타 <메두사의 뗏목>을 함부르크에서 연주하기 직전 이 작품은 볼리비아에서 죽은 체 게바라에게 헌정한다고 하자 청중은 격렬하게 그를 비난했다. 항의는 극에 달해 초연은 결국 중간에 중단됐다. 우익 젊은이들의 시위대가 헨체의 의도로 걸려 있는 ‘혁명가’의 플래카드와 체 게바라의 사진이 있는 지휘대 위로 돌진하고 사진과 플래카드는 콘서트를 찾아온 관객들에 의해 다시 한 번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방가르드와 보수주의

헨체 같은 진보주의 작곡가들은 유럽에서 보수적이고 복고주의를 지향하는 집단과 대립했다. 전후 독일 세대인 보수파가 주도하는 음악계의 성향은 히틀러 시대에 만든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나치때 인기가 좋았던 남성합창단은 더 번창했다.

나치식 모성 숭배는 1970년대 중반까지 독일에 퍼졌다. 헨체는 국가와 사회의 민족주의적 사상의 총화에 반대해 여러 차례 음악으로 저항했다. 1960년 그는 다서 명의 동료와 함께 <유대인 연대기>라는 작품을 공동 작곡했다. 1965년엔 제3제국에 대한 저항을 추모하는 실내관현악곡 <백장미에 대한 회상>을 발표했다.

로이지 노노가 1960년에 작곡한 <대립>은 한 노동자에 관한 오페라였다. 시위 중 체포돼 심한 고문 끝에 무너져 버린 주인공은 결국 정치적 수용소에서 탈출해 사랑과 고향 안에서 짧은 행복을 찾는다. 노노의 역시 1960년작 <삶과 사랑의 노래>는 ‘히로시마의 다리 위에서’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2차 대전의 겸험과 강압적 군사, 정당 독재, 아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베트남 등에서 행해지는 핵전쟁 위협하는 군비 확장, 소수민족의 해방운동 등에서 여러 작곡가들은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을 엿봤다.

국가는 아무리 의사표현의 권리를 보장해도 자국의 작곡가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보수 언론을 동원하거나 지원금을 취소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카를 하인츠 슈톡하우젠은 정치적 편향에 밀려 헨체와는 다르게 공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슈톡하우젠은 2007년에 죽었다.

‘뜨거운 가을’에 섰던 슈톡하우젠

슈톡하우젠은 1944년 15살에 위생병으로 징집돼 전쟁 말기의 섬뜩한 공포를 체험했다. 아버지는 전사하고 정신병을 앓던 어머니는 히틀러의 앞잡이에게 안락사 당했다. 젊은 시절 쾰른에서 음악을 공부하면서 슈톡하우젠은 서독일방송국에서 일했다. 1951년 이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슈톡하우젠는 큰 반향을 불렀는데 1952년 오보에, 베이스 클라리넷, 피아노, 타악기를 위한 <십자가 연주> 초연이 그랬다.

좌우익 진영이 슈톡하우젠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슈톡하우젠은 자신만의 독자 노선을 고수했다. 1967년 6월2일 일어난 대대적 대학생 시위는 벤노 오네조르크라는 대학생이 경찰관의 사격으로 죽은 게 시발점이었다. 이 발포는 베를린 도이치오페라극장 앞에서 벌어졌다. 당시 베를린 주 정부는 이란 국왕을 영접하는 축하공연을 열었고 대학생들 이란 국왕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리게티, 크세나키스, 테오도라키스

조르지 리게티는 1956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슈톡하우젠 일파가 모인 쾰른으로 망명했다. 그리스에서 이아니스 크세나키스가 공산주의와 군주제 옹호자 사이의 내전을 피하고자 1947년 파리로 도피했다. 1925년 태어난 이 그리스 작곡가는 공산주의에 열광했다. 그는 충실한 사회주의 음악미학을 그리스 민요에 적용하고자 했다. 1964년 콘스탄틴 2세가 정권을 잡았다.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는 조처 중 하나로 그는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을 국영방송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같은 해 테오도라키스는 국회의원이 됐다. 1967년 4월2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테오도라키스는 체포돼 고문 당했다. 1973년 그리스는 다시 민주주의로 회귀했다. 테오도라키스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개혁에 투신했다.

윤이상

1980년대 대부분의 독제국가들은 민주주의를 성취했다. 위대한 거장 중 한 명으로 1995년 78살에 숨질 때까지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인권을 무시하는 정권에 저항한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은 생전이 이렇게 말했다.

“작곡가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다. 일간적인 고뇌, 압제, 부당함이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고통이 존재하고, 오류가 존재하는 그곳에 나는 내 음악을 가지고 함께 나아갈 것이다.”

1917년 윤이상인 태어났을 때 그의 조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작곡 지망생이던 윤이상은 일본의 음악 역사를 배우고 일본어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언젠가 한국어로 된 노래를 작곡했지만 곧 연주 금지 처분을 받았다. 당시 그는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1937년에 터진 중일전쟁을 8년 동안 지속하면서 일본은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종전 2년 뒤 일본은 패망했다.

남북한에 정권이 수립돼 국가 안팎으로 예외 없는 공격적 정치를 시행했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은 수백만의 희생자를 낳았다. 남한에 수립된 이승만 정권은 권위적 정치로 인해 한층 더 유약해졌다.

1963년 결국 군인이던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고 군사독재 시대에 들어갔다. 남한은 이미 그러한 조짐이 10년 전부터 있어 왔으며 윤이상은 1967년 납치, 형무소에 수감돼 무수한 고문과 심문을 당했다. 기악곡 <광주여 영원히>는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 학살에 항의하는 작품이다. 그는 여기서 제3제국의 은유를 이용했다. 윤이상은 나치의 희생자가 지은 시를 토대로 칸타타를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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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윤이상 , 권력 , 베토벤 ,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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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과 삶

    도대체 이런 식의 글이 어디 있나요. 이건 서평입니까 아니면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까. 이글은 이정호의 견해입니까 이책을 쓴 사람의 견해입니까. 삶을 소중히 생각하고 음악을 아끼는 사람으로서 분노를 느낌니다.

  • 음악과삶

    민주노총 정책국장이라는 분 한번 말씀해보세요. 님께서 이 음악을 다 들어보시고 이런 글을 쓰시나요. 아니면 몇개라도 들어보셨나요. 구체적으로 음악을 감상해본 소감을 말씀하세요.

  • 음악은 감성적인 서사를 만들고 또 같은 공간안에서라도 다른 시간을 만들어내는 조작성이 강한 마술 같아서 권력관계와 떼어내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나두

    꼭 사서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글 잘읽었습니다. 꼭 사서 읽어야 겠습니다.

  • 주제가 주제이다보니.. 좀..

  • 나원참

    이렇게 성의없는 글을.... 민주노총에서 공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직함까지 드러내고 이런 글을 쓰다니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가 있는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참 답답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