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가요?

[최인기의 사진세상](11) 추석 앞둔 인사동 거리


추석을 앞둔 인사동 거리는 부산합니다. 탑골공원을 끼고 인사동 방향으로 걷습니다. 불 켜진 작은 마차 안에는 젊은 남녀가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주인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사주팔자를 봐준다는 붉은 글씨가 불투명한 미래처럼 불빛에 흔들립니다.


이곳을 지나 낙원상가로 향할 때면 꼭 허리우드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들이 떠오릅니다. 혹시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휘파람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던, 나타샤킨스키가 청순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테스’와,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지만 12월 눈 내리는 어느 날 봤던 ‘크리프행어’ 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헬 나이트’입니다. 80년대 초반 고등학교 여름방학 무렵, 한 무리의 친구들과 정독도서관으로 공부를 하러 갔던 어느 날 도서관 식당 근처 계단에서 떠들다 수위 아저씨한테 쫓겨나 인사동을 맴돌던 김에 허리우드극장엘 들어가 봤던 기억입니다. 영화는 정말 무시무시했습니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후끈 달아오른 우리는 여름비를 맞으며 동대문까지 무작정 걸으며 돈을 모을 궁리를 했습니다. 왜냐면 여름방학이면 경기도 청평으로 달려가 강변가요제를 봐줘야 했으니까요.


쇠락한 구 허리우드 극장(현 아트시네마)을 끼고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순댓국과 돼지머리를 파는 식당들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 이곳에서 이명박 후보가 광고를 찍었다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강남의 청담동에서 촬영했다는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순댓국집과 3대째 이어져 온다는 남문떡집을 지나 한 블록 더 들어가면,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부여받고 있는 ‘인사동’ 간판이 보입니다. 서울의 다른 거리에 비해 차량 소통이 적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퇴근길에 종로의 혼탁함을 피해 발길을 옮기는 곳이 바로 인사동입니다.


일찍이 인사동은 600년 전 도읍지를 옮기면서 고관대작의 출입이 잦았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골동품을 좋아하던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고 선조들의 물건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해방되면서는 조선인들이 골동품을 하나둘씩 내다 팔기 시작하여 미술품, 글씨, 도자기 등 골동품 거래가 시작됐던 곳입니다. 70년대 들어 자연발생적으로 고서점과 화랑가가 조성되었고, 80년대는 시위 대열이 종로를 지나 시청 앞 광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결집하던 곳이 인사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사동이 소비문화 중심으로 완전히 뒤바뀐 것도 비슷한 시기가 아닐까요?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그즈음 인사동도 변화무쌍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미래와 희망으로만 꿈틀거릴 것만 같은 인사동의 뒷골목 선술집도 차츰 자리를 내주고, 대신 한정식집이나 화려한 카페 골목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인 천상병님이 운영하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부인께서 직접 차를 꺼내 오셨던 찻집 ‘귀천’에 앉아 세상이 변하고, 동지들도 변하고, 인사동 차값도 술값도 모두 모두 변했다고 아쉬워하던 것도 그즈음의 이야기였습니다.


인사동 가게들이 고급화되는 가운데도 노점상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인사동을 깊숙이 들어가 어귀에서 엿을 팔고 있는 노점상 이영석 씨를 소개할까요. 이분을 만난 건 90년대 중반입니다. 노점상 봄나들이 야유회에서 사회를 보시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경쾌한 트로트풍으로 불러 젖히던 이영석(남 63) 아저씨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전국을 떠돌면서 소리패 생활을 했던 양반입니다. 한때는 생계를 위하여 밤무대에서 전기오르간을 켜며 ‘밴드마스터’ 활동을 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이분은 인사동에서 엿장사를 하고 있고 어떤 방송에서는 인사동 터줏대감이라고 소개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2004년 인터뷰한 이야길 풀어 보겠습니다.


“인사동은 첫 번째 문화 관광지구로 선정되었어요. 그래서 서울에서는 제일 빨리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노점상에 대한 단속을 자행했지요. 98년에는 인사동 바닥을 들어내고 보도블록을 까는데 무려 80억이라는 돈을 투자하고 몇 달 동안 장사는커녕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마찬가지고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노점상은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점상들이 관광객에게 부끄러운 대상이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점상을 어엿한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육성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지요. 국제적인 문화의 거리를 만든다면서 노점상을 쫓아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점상이 사라진 거리는 일단은 보행이 쉽고 겉으로 보기에 깨끗해 보이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 후로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나고 인사동에 화단이 대대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걷기 좋은 거리를 조성한다는 것인데 화단이란 게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실 걷기에는 보행자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 인사동은 그야말로 서민의 문화가 주를 이루던 장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옹다옹 왁자지껄 생활하는 사람들의 문화죠. 때로는 악다구니가 짜증스러워 보여도 생활 속에 사람들의 활기 있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재래식 시장이나 하늘 아래 산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삶! 고되면서도 펄펄 뛰는 생명력이 있어 보이는 삶! 그런 삶 말입니다.


인사동에 약장수나 야바위꾼이 있던 시절은 옛날이지만 그때의 거리는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그때 귀정이의 장례 행렬이 종로3가 탑골공원 앞에서 막히던 날. 싸우다 싸우다 밀리면 가방을 숨겨주던 노점상들, 물 한잔 건네주던 사람들, 상가 앞에 지쳐서 잠시 쉬어가도 나무라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토토의 오래된 물건’처럼 진열장에 갇혀 과거를 뜯어먹고 사는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거지요.


2011년 8월 14일에는 종로구가 용역반 등 50여 명을 동원해 인사동에서 장사하던 노점 20여 개를 철거한 사건이 있습니다. 노점상들은 쇠사슬로 가로등에 가판대를 묶어 저항하였으나 가판대가 넘어지면서 액세서리 등 팔던 물건이 바닥에 쏟아졌습니다. 그 모습을 인사동을 찾은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 속의 노점상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씨가 자신의 마차에서 장사했다고 늘 자랑이십니다. 그러나 저분도 작년 단속에 쫓겨나 지금의 자리에서 노점을 하고 있습니다. 청각장애인이 이십니다. 이영석 씨는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대선 때는 인사동에서 노점상과 함께 장사했었는데 이제 와서 마구잡이로 단속하고 있다"며 선거 때 만 되면 노점상을 이용해 서민적인 모습을 연출하거나 홍보이벤트로 이용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립니다.


노점상이 길거리를 무단으로 점유해 보행권을 침해한다는 것은 더 많이 가로채고자 하는 이들의 이익에 방해된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이 되지 않는 사회,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놓여 있거나 내몰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나마 한 뼘 공간을 지키려는 이들의 싸움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공간은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다지만, 돈 많은 이들이야말로 곳곳을 장악하고 이윤을 넓히기 위해서 힘없는 자들을 또 다른 곳으로 내몰고 쫓아내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인사동을 걷다 보니 노점자리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커다란 돌 화분이 놓여있는 것이 군데군데 눈에 보입니다. 안에는 가을꽃들이 예쁘게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옆자리에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진정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가요?


* 이영석 씨는 2005년 이후 점점 시각이 나빠져 지금은 시각장애인이십니다. 종로지역 노점상연합회 고문을 맡고 계시고요. 2012년 추석을 며칠 앞두고 이영석 씨를 뵈러 인사동을 찾았지만 뵐 수 없었습니다. 이날 대신 부인이 자리를 지키시며 강정과 달콤한 엿을 팔고 계셨습니다. 예쁘게 사진을 찍어 달라시면 활짝 웃으셨습니다. 정말 곱고 예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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