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직접행동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제는 불복종](2) 평화를 재구성하는 저항의 힘을 키워야

언어는 사유와 행동을 확장시키기도 하고 제한하기도 한다. 지금 박근혜 퇴진투쟁을 둘러싼 ‘평화시위 프레임’은 우리의 실천을 좁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이 저지른 불법과 인권유린, 민주주의 후퇴 등에 분노해서 거리로 나왔다. 그동안 권력의 말을 믿고 살다가 빼앗긴 것들이 억울해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거리에 나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권력이 주입한 ‘틀’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 박근혜 정부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들이 우리에게 숱하게 주입한 ‘불법시위’, ‘폭력시위’ 낙인이 거의 주술처럼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

[출처: 홍진훤]

준법은 평화가 아니다

가장 답답했던 일은 지난 주말 집회에서 집회시위를 막는 공권력의 상징인 차벽에 항의하기 위해 붙인 ‘꽃스티커’를 떼는 행위였다. 항의의 메시지를 지우는 것 자체가 실천을 무의미하게 한다. 집회시위는 몇 시간 하는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스티커를 떼는 사람들의 동기였다. “스티커를 떼는 경찰이 불쌍해요.” 조선일보에 인용된 말이라 얼마큼 진실일지 모르지만 경찰의 노고를 줄이기 위해 뗐다는 건 사실인 듯하다. 경찰을 비롯한 국가권력에게 ‘더 이상 차벽으로 우리를 가로막지 마라’라는 항의메시지보다 ‘집회 후 그걸 뗄 경찰의 노고’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게 안타까웠다.

왜 그랬을까? ‘박근혜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 대 ‘박근혜 대통령을 지키는 경찰’이라는 구조적 대립을 못 봤던 것이거나 경찰의 발언으로 경찰도 대통령을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착각을 한 것은 아닐까. 11월 1일 집회 후, 경찰청이 공개적으로 발표한 “나라를 걱정하는 만큼 집회 시위에서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 달라고 당부”한 것에 붙들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경찰이 정말 박근혜 퇴진에 동의했다면 그에 해당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청와대가 지시하더라도 집회금지 통보를 하지 않겠다거나 차벽을 세우지 않겠다거나 하는 경찰청장의 입장표명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이철성 경찰청장은 어떤 인물인가. 음주운전 경력을 빼더라도 밀양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저질렀고, 고 백남기 농민 시신을 탈취하겠다고 앞장선 인물이다. 그런 그가 경찰들에게 무엇을 지시할지는 뻔하지 않은가. 아니 최소한 한 명의 경찰이라도 2008년 촛불시위 때처럼 ‘더 이상 시민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거부선언이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볼 수 없었다. 일선 경찰이 하는 말은 고장난 레코드처럼 “저희도 힘들어요”라는 말이 전부다. 위로할 게 아니라 거부를 요청했어야 한다. 농민이 사망할 때처럼 경찰이 상부명령만 따라서는 안 된다.

‘질서를 부수는’ 시민의식 대 ‘권력을 유지시키는’ 시민의식

그런데도 경찰이 집회를 막느라 고생한다며 스티커를 떼는 일은 ‘권력의 질서를 부수려는’ 시민의식이 아니라 ‘권력의 질서를 유지시키려는’ 시민의식‘이다. 그러니 문화일보의 한 논설위원은 “19일의 질서 있는 비폭력 시위는 우리 국민의 높은 법치 수준”이라고 평하지 않았는가. 기득권의 질서를 깨지 않으면 박근혜 이후에도 다른 이름의 박근혜가 나타날 것이다. 박근혜 게이트로 드러난 권력의 질서를 깨기 위해 ’최대한‘ 항의하고 소동을 피우고 질서를 어지럽혀야 한다. 얌전한 게 평화는 아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더 이상 힘들어서 시위대를 막기 힘들다고 명령불복종을 선언하게 할 때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질서를 어지럽혀야 한다.

사실 경찰차에 스티커를 붙이는 행위를 이전 같았으면 ‘공공기물훼손죄’로 기소나 벌금을 부과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정세가 정권에게 워낙 불리하니 감히 그러한 말을 못할 뿐. 작년 민중총궐기 때 경찰차를 끌어당기긴 것도 ‘공공기물훼손죄’다. 헌법에 있는 집회시위의 권리를 차단하고 있는 차벽을 제거하려는 일은 비폭력 직접행동이라 생각한다. 폭력의 구조물을 제거하는 일이기에 불법일 수 있지만 폭력행동은 아니다. 많은 평화운동가들도 구조적 폭력에 맞서 불법 직접행동을 한다. 세계적인 평화운동가 엔지젤터는 트라이덴트 핵잠수함으로 침투해 잠수함이 기능을 못하도록 전기선을 끊고 컴퓨터와 문서들을 호수로 버려서 5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하지만 법원은 영국의 핵무기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며 석방했다. 국가의 재산인 잠수함에 잠입해 잠수함을 망가뜨리는 것과 시위대를 가로막은 경찰차를 끌어당기는 것이 뭐가 다른가. 다르다면 한국은 경찰 폭력이 너무 심하다는 것, 그래서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이 죽었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된 것이다. 시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권력의 폭력성이 심각하다.

평화와 위험을 헷갈리는

지금과 비슷한 일이 2008년 촛불 때도 있었다. 촛불에 참여한 시민들 사이에서도 폭력, 비폭력 논쟁이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2008년 6월 10일 광화문 광장을 차벽으로 가로막은 명박산성에 맞선 스티로폼 시위다. 당시 명박산성을 넘기 위해 대형 스티로폼을 준비했던 측은 안전사고 위험을 이유로 스티로폼을 사용하지 않았다. 인권단체들은 시민들과 토론을 거쳐 이것을 쌓겠다고 가져왔다. 집회참여자들과 3시간의 찬반토론을 거쳐 스티로폼을 명박산성 앞에 쌓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이 스티로폼을 밟고 경찰차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쳤다. 당시 직접행동에 대한 토론을 인권단체들이 주도했기에 항의를 많이 받았다. 필자가 속한 단체나 활동가들에게 집회에 참여했던 일부 시민들은 “운동을 망치려고 하냐”며 따졌다. 그때 스티로폼 행동을 폭력이라고 칭하거나 반대했던 논리는 ‘스티로폼을 쌓다가 떨어지거나 차벽에 올라가서 다치면 촛불운동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크다’는 것이었다.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타락해서 거리로 나선 우리는 직접행동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한다. 집회에서든, 일상에서든, 직장에서든. 그런데 대개의 경우 직접행동은 대결적인 양상을 띤다. 통상적인 방식으로 항의했을 때 의견이 전달되기 어려워서 직접행동을 하다 보니 권력과의 충돌과 갈등은 동반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직접행동이 비폭력일지라도 위험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린피스가 해상시위를 하거나 노동자들이 고공시위나 단식투쟁을 할 때도 위험하다. 물론 다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협조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위험의 가능성이 있다고 그것을 ‘폭력’이라고 칭하거나 ‘평화가 아니라고 규정’하면 실천의 폭은 좁아진다. 또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하는 이유는 경찰이 막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충돌을 피하는 방법으로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갈등을 잠재우는 평화가 아니라, 저항행동으로 심화되는 인간에 대한 신뢰, 그것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평화를 재구성하는 저항의 힘을 키우는 일이다.

공동의 언어를 만드는 시간

최근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비폭력 구호’의 의미는 과거와 달랐다. 지난 11월 12일, 정확히 13일 새벽 경복궁역 사거리에 있던 시민들이 외치던 ‘비폭력 구호’는 집회참여자를 향할 때도 있었고, 경찰을 향할 때도 있었다. 교통소통을 원활하게 한다며 도로에 있는 시민들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밀어내던 새벽 4시쯤, 시민들 사이에서 비폭력이라는 구호가 나왔다. 또 어떤 시민들은 경찰 방패를 뺏거나 경찰이 시위대를 잡아당길 때 ‘비폭력’이라고 외쳤다. 예전이라면 ‘경찰폭력 중단하라’고 할 상황에서 경찰을 자제시키기 위해 ‘비폭력’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봤다. 결국 시민들은 인도로 밀려났지만 경찰에 대한 분노와 허탈감에 날이 밝을 때까지 인도를 떠나지 못했다. 그때 경찰 폭력에 저항하는 공동의 언어를 갖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걸 보수언론과 경찰이 ‘평화 프레임’을 덧씌우는구나 싶었다. 이제 우리의 언어를 만들 시간이다.

우리를 변화시킬 다양한 직접행동이 필요할 때

그걸 위해서 다양한 직접행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면 좋겠다. 저항의 힘이 언어를 풍성하게 할 것이다. 100만, 200만이라는 다수의 시민이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권을 위협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앙집중식 행사나 공연에 참여하는 실천을 뛰어넘는 다양한 방식의 직접행동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다양하고 발랄하고(아니 발랄하지 않고 무거워도 좋다) 직접적인, 그리고 권력에게 타격을 주는 행동을 하자.

청와대로 가는 ‘새마음애국퉤근혜자율청소봉사단’처럼 위트 넘치는 것도 좋고, 농민들처럼 트랙터를 몰고 오며 상징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좋다. 침묵행진도 좋고, 납세 거부운동과 같은 것도 좋다. 박근혜를 탄생시킨 박정희라는 유산을 공격하는 퍼포먼스도 좋다. (그런 의미로 누군가 구미에 있는 박정희 동상에 똥물이라도 끼얹거나 구멍을 내면 좋겠다. 그러면 박근혜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아무튼 정권을 직접 위협하거나 상징적으로 조롱하는 직접행동을 다양하게 벌이자.

그리고 집회 참여자들이 소비자처럼 대상화되지 않게,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을 펼치자. 대규모 연단의 마이크를 잡은 사람의 발언이나 공연만 듣고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소규모 토론의 장이 많았으면 좋겠다. 자유발언만이 아니라 여러 주제(박근혜 퇴진 이후의 사회라든가, 퇴진 방식에 대한 것이라든가, 개혁과제라든가, 평등한 집회문화라든가 하는 것들)로 토론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직접민주주의를 함께 배우고 한걸음 내딛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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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

    기사의 논지에는 공감하는 바지만, 차벽에 붙인 스티커를 뗀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네요. 그들의 행위는 말그대로 어쩔 수 없이 거기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의무경찰'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행동이었지, 기사에서 말하는 것 같이 경찰의 소극적인 태도를 옹호하는 바가 전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백보 양보해서 설령 스티커를 뗀 행동이 비판받을만한 것이었다고 해도 이런 식의 어조는 국민들의 연대를 해칠 뿐이라 생각합니다. 모두의 방식을 이해하고 그 곳에서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 연대가 지속되는 방식을 택해야지, 직접적인 물리적 충동을 유발하는 폭력시위의 옹호와 같은 급진적인 방식은 결국 국민들의 연대에 금을 가게 하고, 시위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결론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눠 말해 보수와 진보 중 아직까지는 보수진영의 태도가 당락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만큼(탄핵안에 관한 비박계의 영행력 봐도 그렇습니다)새누리당의 콘크리트라고 생각했던 경상도와 중장년층의 지지가 지금처럼 흔들리고 있을 때, 그들의 태도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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