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과 저항의 시간

[워커스 27호] 이슈

[출처: 홍진훤]

평화의 심리

경찰은 분명 변했다.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직후, 서울지방경찰청이 배포한 보도자료를 보자. 불법, 폭력 시위, 핵심 주동자, 극렬 행위자, 엄중 사법처리 등의 하드코어 한 단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하지만 최근 경찰의 시위 관련 보도자료는 안전, 질서유지, 집회 및 시위 권리, 보장, 불편 최소화, 평화, 성숙한 시민의식 등 온건한 단어들로 채워지고 있다. 집회 현장에서도 ‘나라 사랑’ ‘성숙한 시민의식’ ‘친구’ ‘비폭력’ 같은 단어가 경찰 방송차서 흘러나온다. 촛불 집회 내부 분위기도 묘하다. 예전 같으면 땅바닥에 굴러다녔을 노란 폴리스라인은 신줏단지가 됐다. 폴리스라인을 넘지도 않을뿐더러, 누군가 폴리스라인을 건드리기만 해도 비난과 욕설이 쏟아져 나온다. 폴리스라인을 건드리거나 선을 넘으면 프락치로 몰리기도 한다. 비폭력, 평화집회, 민주시민 등의 단어는 경찰과 시위대의 동일한 구호로 자리 잡았다. 밧줄만 들어도 ‘폭력 무기’ 소지자로 감옥에 보내던 경찰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경찰은 이제 자신과 시위대 간에 강력한 ‘래포(rapport)’를 형성하며 시위 길들이기에 나서고 있다.

“결국 의경이 고생해서 떼야 한다.” “또 붙을 건데 의경들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냥 두라.” 시민들이 경찰차에 붙인 꽃 스티커에 대한 이철성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발언이다. 꽃 스티커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의경이며, 자신들이 의경을 배려하고 있다는 취지의 멘트였다. 달리 말하면 의경은 약자, 자신들은 약자에 선의를 베풀고 있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대 권력을 향한 약자들의 분노. 경찰은 이를 내부의 약자를 내세워 방어하고 있다. 노란 플라스틱 폴리스라인 같은 완충지대를 만들어 눈을 돌리는 방식이다. 시민들이 여기에 감정이입을 하는 순간, 경찰과 시위대 간에는 동질감과 기이한 동맹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번엔 심리학자 엘리엇 애런슨(Elliot Aronson)의 실험 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여러 어린이를 모아두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 하게 했다. 절반은 약한 처벌로 위협을 했고, 절반은 심한 처벌로 위협했다. 중요한 것은 약한 처벌을 받은 어린이는 나중에 기회가 주어져도 장난감을 갖고 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엘리엇은 이를 자기 설득의 결과라고 봤다. 그는 “자기 설득은 외부의 위협이나 압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므로 더 영속적”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심한 처벌을 받은 어린이들은 할 수 있는 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고 했다. 엘리엇은 “한 번만 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최상의 전략은 심한 처벌로 위협하는 것이고, 태도나 행동이 변하기를 원한다면 처벌이 적을수록 효과는 영속적”이라고 설명했다.

반체제 성향이 뚜렷한 이들의 시위는 강하게 제압을 하고, 수백만 명의 시위에는 ‘비폭력’과 ‘평화’ 프레임을 내세워 약하게 대응하는 경찰의 방식. 이는 군중의 변화를 꾀해 그들을 자신의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심리전이다.

심리학에서는 일관성의 법칙(law of consistency)이란 것이 있다. 공공연히 “나는 절대 00이라는 행동을 하지 않을 거야”라고 표현할 경우, 그에 반하는 증거가 나오더라도 자신의 믿음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성향을 말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케빈 호건(Kevin Hogan)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태도로 인해 생긴 믿음을 터무니없이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스스로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려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규범적 사회적 영향과 권위에 대한 복종 심리도 복잡하게 얽힌다. 앨리엇은 규범적 사회적 영향은 사람들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혜택을 유지하고 싶을 때 일어난다고 분석했다. 규범적 사회적 영향은 보통 공적인 순응을 끌어내곤 한다. 그는 “사람들이 때로 다른 사람에게 용납되고 잘 보이기 위해 동조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며 “규범적 압력은 사람들이 권위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멈추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은 자기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권위자들을 기쁘게 만들기 원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물론 군중 시위의 방향과 경향성을 단지 심리적으로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심리학 박사 강범석 씨는 “지금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아직 경찰 권력과 시위대 사이에 긴장 관계는 존재한다. 폭력 시위의 빌미를 줘 대중과 지도부가 분리되는 현상을 두려워하고 자제하려고 하는 지도부의 전략적 판단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국민은 퇴진을 명령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를 생중계로 지켜보던 시민들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 18년간 정치권에 몸 담았던 소회를 밝히며 이제 작별 인사를 하려나 했지만, 박 대통령은 역시 정치의 달인이었다. 자신의 거취를 여야 정치권이 결정해 달라 공을 넘겼다.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라고 말했으니, 담화 후 여야 입장은 온도 차를 보이며 또 한 번 정국 혼란을 초래했다.

6개월 뒤에 18차 대국민 담화를 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과 다섯 번의 대규모 촛불 집회에서 나온 분노를 안타까움으로 포장하는 기술이 놀랍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야당은 단일하게 탄핵 절차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헌법재판소의 상황은 여러 변수를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 법관 2명의 임기가 조만간 끝나고, 탄핵까지 걸리는 시간도 짧으면 2개월 길면 6개월이 걸린다. 다만 성난 민심이 있으니 헌재 역시 이를 의식하지 않겠냐고 추측할 뿐이다. 국민은 새로운 사회를 위한 논의까지 시작하고 있는데 정치권 퇴진 대응은 느리고 무심하다. 시민은 주말마다 시린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드는데, 정치인은 말만 무성할 뿐 법과 정치협상, 거리의 군중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일보는 시장경제 엄호에 나섰다. 민심의 불똥이 경제민주화나 재벌체제 개혁까지 손을 뻗칠까 잔뜩 긴장하는 눈치다. 사설과 칼럼을 통해 경제가 위험하다며 그동안의 규제 개혁 기조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연신 주장한다. 해고와 취업규칙을 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한 고용노동부 양대 지침, 대기업 구조조정을 특혜 지원하는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 등 박근혜 정권이 꼼수와 편법으로 만든 경제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는 여론을 감지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과 가장 직접적 연관이 있는 삼성은 지주제 전환을 꾀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배권 확립은 수순을 밟아가고 있다.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시민은 이제 대국민 담화를 들어줄 아량도 없고, 국정농단 게이트의 한 축인 재벌이 제 살길 찾아 조직을 정비하는 꼴도 못 보겠다고 한다. 더 강한 목소리를 전달할 수는 없을까?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11월 30일을 1차 총파업-시민불복종의 날로 정했다. 퇴진행동은 “박근혜가 멈추지 않겠다면, 우리가 세상을 멈춰 세우고자 한다”며 “세상을 움직이는 것, 세상을 멈추는 것,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저 부패한 권력과 재벌, 그 부역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것을 보여주자”고 선언했다. 노동자 총파업, 빈민 철시, 대학생 동맹 휴업 등이 전개됐다. 특히 이번 노동자 총파업은 정치 총파업이었다. 고용노동부와 사용자단체인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은 ‘불법 파업’이라며 날뛰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 등은 “노동자 총파업은 이 나라 주인인 국민의 명령에 따른 것이고, 최고의 의사표시인 헌법상 저항권의 행사로 정당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한 문장으로 된 헌법 전문을 보면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적시돼 있다. 법학자들은 이 문구를 저항권의 근거 규정으로 삼는다. 저항권은 말 그대로 불의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다. 국가권력이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고 정의롭지 않게 행사될 때, 국민이 나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권리이다.

4.19혁명은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독재자를 끌어내린 혁명이다.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기까지 1,7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5.18 광주항쟁은 신군부를 해체하고 합법적 정부에 권력을 다시 돌려놓겠다는 저항이었다. 열흘에 걸친 신군부의 살육 작전으로 4,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7년 저항권 발동은 퇴진 이후의 정치사회구조 변화를 노동자와 시민의 손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다.

균열을 내기 위한 흔들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가장 먼저 문제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동안 손댈 엄두조차 못 냈던 문제들이 쌓여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는 지난해 성인 2,085명을 대상으로 ‘우리 사회가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설문조사 참여자들은 청년실업(28.3%), 인구고령화(20.6%), 비정규직문제(15.8%), 저출산(9.6%), 자살률(6.5%), 이념갈등(6.2%), 학벌주의(5.3%) 등을 문제로 꼽았다. 다양한 과제가 산적한 만큼 저항도 구체적 전술이 필요해 보인다.

오진호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활동가는 전선의 다양화를 저항권의 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재벌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선 각 기업의 노동자가, 각 단체는 해당 영역의 장관 등에 직접 압박을 가하는 식이다. 시민들은 불매 운동, 항의 표시 등으로 광범위한 압박에 동참하게 하는 것. 구호 역시 ‘정권퇴진’과 함께 잘게 쪼개져 ‘xxx 장관 사퇴’ ‘xxx 의원 구속’ 등 권력 하나하나의 고리를 끊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00만 촛불에 대해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말을 해 큰 비난을 샀던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춘천 시민들에게 직접 사퇴 압박을 받고 있다. 춘천 시민들은 주말마다 열리는 지역 집회 때 김진태 의원 사무실을 점거하고 그 앞에 모여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사무실은 각종 피켓과 스티커로 도배됐다. 원조 친박이기도 한 김 의원이 또 어떤 압박을 받을지 지켜볼 일이다.

손미아 강원대 교수는 시민의회를 제안했다. 손 교수는 “국민이 스스로 대표자를 뽑아나가는 방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며 “시/군/구 단위든, 도 단위든 대표를 뽑아 정권 퇴진, 새누리당 해체, 악법 폐기 등을 해나가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이민숙 전교조 교육선전실장은 “교사는 결국 학생과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라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실장은 “교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저항인 연가 투쟁(같은 날 휴가를 내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싶다. 이날 학생과 함께 체험학습을 가거나 사회적 고민을 함께 해볼 수 있는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고 말했다.

박정훈 알바노조 위원장은 저항권 행사를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민이 동의하느냐가 문제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페미니즘에 주목한다고 했다. 페미니즘 단체와 페미니스트들은 퇴진 이후 사회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주체 중 하나다. 이들은 때때로 (촛불집회 참가자들로부터) ‘우리 편’이 아니라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정권 퇴진을 위한 시민들이 절대 선은 아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이들을 상대하는 한편, 구조화된 권력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놓여있다. 박 위원장은 “사회가 성숙해지기 위해선 페미니스트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워커스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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