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우리 사회는 NG

[이슈①] 라이더, 제빵사, 하청노동자, 콜센터 상담원… 우리가 모두 MZ세대

건조한 눈빛 쓰디쓴 그대의 혀
항상 말만 앞서고 행동하진 못해
나는 좀처럼 스스로 판단할 수 없어
필요한 건 Rocket punch

때론 나 대신 싸워주는 로봇
그건 말도 안 되는 만화 속 이야기
너의 어깨가 부서져라 부딪혀야해

1 & 2 & 3 & 4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지마
Rocket Punch Generation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10년도 더 전에 한 광고에 삽입된 노래다. 노래 제목인 ‹R.P.G.샤인›은 ‘Rocket Punch Generation 샤인’을 압축했다. 당시에는 나름의 반향이 있어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의 후보조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고, 정치인의 선거 노래로도 쓰였다.

나 대신 싸워주는 로봇은 만화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고, 실제로는 어깨가 부서져라 부딪혀야 한다는데, 이들이 날리는 펀치가 로켓펀치다. 드넓은 땅에서 꼬리에서 방출되는 가스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어 하늘로 날아가는 로켓. 요즘 MZ세대를 주축으로 노조가 결성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노래가 생각났다. 학교에선 가르쳐준 적 없고, 회사에선 더욱 가르쳐준 적 없는 ‘노동조합’과 ‘조직’을 맨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이들. 이들은 여러 노조와 노무법인을 찾아가 밑줄을 긋고, 별표를 치며 어떤 노조가 최선일까, 강한 한 방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다.

비교적 넓게 잡힌 MZ세대(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는 그만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들을 포괄한다. 매스미디어는 이들의 ‘구매력’과 ‘소비패턴’ 등을 강조하며 소비시장에 이들을 위치짓지만 노동시장에서 불안정하게 선 MZ세대는 덜 다룬다. MZ세대는 임금도 가장 불평등하게 분배받으면서, 빚은 어느 세대보다 빠르게 늘고 있다.

《워커스》는 척박한 노동시장을 드러내는 MZ세대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MZ세대가 외치는 오마이갓, 이들의 로켓펀치로, 자본의 입에서 오마이갓이 나오길 기대하며 《워커스》 78호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수

귓가에 찻길 소음이 잦아들 쯤이면 가만히 피아노 건반을 누른다. 가지런한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음계에 따라 차례로 치고 있으면 복잡한 하루도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 든다.

지수(29)는 오토바이 페달을 밟은 지 만 7년이 됐다. 그 사이 택배에서 배달의 민족이나 쿠팡까지 배달업계를 두루 거치며 20대를 보냈다. 최근에는 맥도날드 라이더로 중랑구 일대를 돌아다닌다. 여기선 최저시급에 콜 하나당 400원을 받는다. 1시간에 만 원정도 될까. 주3일 노동에 한 달이면 80만 원이 들어온다. 지금은 라이더유니온을 하며 모두 120만 원 정도로 한 달을 산다. 반지하 반전세로 월 25만 원에 생활비로 80만 원을 쓰고 나면 다 없어지는 돈이다. 여기에서 등록금과 전세 대출금도 갚는다. 그래도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옥탑방보다는 형편이 훨씬 나은 편이다.

지수는 글 쓰는 게 좋아 공연예술대학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예술대는 예술이나 대학보다는 군대라는 말이 어울렸다. 단지 글이 쓰고 싶어 들어온 곳이었는데, 혼자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오토바이를 몰기 시작한 건 그때쯤부터였다. 등록금 부채에 생활비도 필요했지만 집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일할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었다. 지난해 빗길에 미끄러져 6개월을 쉬었을 때를 제외하면, 큰 사고 없이 그렇게 7년을 보냈다.

산재보험도 없이 처음 배달 일을 시작했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었을 시간이었다. 요즘도 1년 이내에 사고를 당하는 비율이 50%가 넘는다. 그래도 현장에선 그러면서 실력이 느는 거라고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오늘도 잘 넘겼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어김없이 사이렌 소리는 더 잦다.

하지만 사고율은 알고리즘을 다르게 만들면 줄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통상 배달거리를 직선으로 계산해 시간을 제한하는데 이 셈법에 따라 움직이려면 신호 위반을 하지 않을 방법이 별로 없다. 그나마 페널티가 없으면 그만인데, 배달 건수에 영향을 미치니 무시할 수가 없다. 지난해 지수의 사고도 회사 정책이 달랐다면 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장마에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배달의 민족은 배달 건수당 프로모션을 했고, 지수는 건수를 채우기 위해 속도를 내다 빗길에 미끄러져 어깨 골절을 입었다. 산재처리가 됐지만 이미 CT 촬영비에 생활비에 큰돈이 나간 뒤였다. 산재 보상을 받으려면 최소 3~4주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질병의 경우에는 사고 산재보다 문턱이 훨씬 높다. 대기 기간이 최소 6개월이 걸리는데 그래서인지 아직 질병으로 산재를 받았다는 라이더는 보지 못했다.

배달일은 항상 불안 불안하다. 언제 사고가 날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늘 머리 한 켠에 있다. 자연사하는 게 꿈이라는 말도 있다. 불안한 건 사고만이 아니다. 늘 수입이나 회사 정책이 바뀌기 때문이다. 월 300, 400만 원 버는 라이더도 있지만 반짝인 경우가 많다.

전업으로 일하는 라이더들은 하루에 100~200km를 달린다. 서울에서 세종시를 왕복하는 거리다. 그러고도 값싼 노동이 된다. 플랫폼 회사들부터 ‘쉬운’ 노동으로 선전한다. 그래서인지 갑질하는 고객들이 많다. 그 사이에서 자존감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정규직 아래 플랫폼 노동자가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그래도 코로나19로 알바 자리가 없다 보니 대학 새내기나 10대, 20대 친구들이 많이 유입된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조직 문화에 대한 피로도나 실망 때문에 하는 이들도 있다.

노조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고 보는 청년들이 많다. 그래서 대기업에서도 청년세대가 따로 노조를 조직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청년의 노동권을 다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기는 하는데, 같이 분노할 수 있는 주체가 됐으면 좋겠다고 지수는 생각한다. 지수는 최근 청년세대는 분노보다는 무기력하다고 본다. 최근 LH 직원들의 땅 투기 논란 때도 그랬다. 이미 너무 먼 얘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수는 그것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말한다.

현우

누가 살면서, 그것도 4년 사이 네 번이나 해고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 현우(35)는 매 순간마다 잘릴 준비가 돼 있었다. 어느 이유를 붙여 해고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5인 미만 사업장’만 다녔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는 사업장, 그 점은 회사가 제일 잘 이용했다.

첫 번째 해고된 곳은 법률 자문 AI를 만드는 스타트업 회사였다. 2015년 울산에서 생명과학과 대학원 수료를 마친 현우는 전공 관련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 다른 직업군을 찾던 중 컴퓨터를 좋아해 국비로 운영되는 프로그래밍 직업 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2017년 2월 첫 직장에서 프로그램 개발자가 됐다. 5인 미만의 스타트업 회사에는 사수도 없었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프로젝트 전체를 이끌다 7개월 만에 해고됐다.

두 번째 해고된 회사도 스타트업 회사였고, 역시 프로그램 개발 업무를 맡았다. 이번엔 6개월 만에 해고됐다. 연이은 해고에 현우는 업무 관련 전공자가 아니고, 실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자기 탓을 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 해고된 후에는 유독 힘들었다. 해고된 지 4개월 만에 현우의 신용은 10등급으로 떨어졌고 실업급여도 받지 못했다. 처음 잘렸을 때처럼 실업급여를 받으며 취업 준비를 하려 했지만, 6개월간 일했던 현우의 재직일수는 실업급여 조건인 180일에 미치지 못했다. 자취를 하다 보니 수입 없이는 당장 생활이 불가능했고, 결국 카드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다시 전공을 살려 생명과학 분야 직업을 찾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해고됐다. 이 회사에서 해고된 후에는, 현우의 애인이 그랬다. “이 회사가 그 가짜 5인 사업장 아니야?” 이 말을 듣고 보니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앞서 현우는 해고된 A회사에 다니기 전, B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A회사 로의 이직은 입사 두 달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이직 과정에서 면접은 없었고 이직 후 업무지시도 전 상사가 했다. 고용 형태도 정규직에서 1년 계약직으로 바뀌었지만, 계약은 계속 연장된다고 했다. 하지만 9개월째가 되던 날, 해고됐다. 현우는 관련 노동단체와 함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고, 고발당한 회사는 ‘두 회사를 하나의 회사로 주장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임금상당액의 합의금을 현우에게 건넸다. 잦은 해고로 대출 문제가 컸던 현우에게 합의는 최선이었다. 합의가 이뤄졌던 지난 2월, 스카우트 돼 들어간 5인 미만 사업장에서 현우는 네 번째 해고됐다.

불안정한 노동조건에 질렸던 현우는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 생명과학 대학원에 다시 입학했다. 대학원 수료 자격의 생명과학 연구원은 5인 미만 사업장을 벗어날 수 없어서였다. 더 이상 해고 생활은 없어야 했고, 빚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입학한 현우가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5년의 시간이 남았다. 현우는 그동안 받은 1,200만여 원의 대출, 카드빚을 메운 애인의 은행 대출과 앞으로 생길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갈 것이다.

종희

“병원에 야간 수당을 다 갖다 바친다고 해요. 젊다고 해도 저녁 8시부터 아침 7시까지 꼬박 일하는데 몸이 버티기 어려워요. 종일 자도 졸리죠.”

현대차 부품 하청공장에서 일하는 종희(30·가명)는 야간노동이 싫었다. 아침에 공장을 빠져나오면 ‘기절’했다. 140만 원 벌까 말까 하는 포장 아르바이트 보다는 나았지만 내 일이다 싶지 않았다. 그렇게 주야 2교대로 1년간 일했을 때쯤 종희는 회사를 떠났다.

서울은 다른 경험을 하기에 좋은 곳 같았다. 하지만 일자리 구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르바이트로 피팅 모델이나 쇼핑몰에서 사무직으로도 일했다. 겨우 번 돈은 친구와 같이 얻은 투룸 반지하 월세로 50만 원을 내고 나면 쏜살같이 사라졌다. 경험보다는 빚이 늘었다. 아니 그게 경험이었다. 때마침 원래 일했던 회사에서 정규직을 뽑아 재입사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동료들이 그리웠고 그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온종일 케이블을 끼우고, 볼트도 박으며 주야 맞교대로 전기차 부품을 생산했다. 하지만 일을 계속하자니 더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연차를 쓰려 해도 눈치를 봐야 하고, 잔업도 웬만하면 뺄 수 없었다. 어쩌다 불량을 내거나 생산 분량을 못 맞추기라도 하면 욕을 먹으며 시말서를 써야 했다. 화장실에 좀 오래 있었다고도 핀잔을 들었다. 숨이 막혔다. 월급도 월세나 자동차 할부금을 내고 나면 빠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동조합이 있는 인근 현대차 하청공장이 부러웠다.

그래서 종희는 제 발로 그 노조에 찾아갔다. 그리고 회사 동료들에게 같이 노조를 설립하자고 설득했다. 부당징계든 야간노동이든 한목소리를 내면 된다고. 회사를 바꿔 사람다운 삶을 살자고. 바꿀 수 있다고, 노조로 공정성을 만들 수 있다고. 그렇게 동료 수백 명과 노조를 결성했다.

종희는 처음 교섭 자리에 나갔을 때 솔직히 많이 떨렸다. 난생처음 티비에서나 봤던 파업도 해봤다. 그래도 긴장이 되기보단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파업이 합법적이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교섭에 하청 공장 경영진이 나왔지만 그들 뒤에 현대차 가이드라인이 있는 게 분명히 보였다. 현대차가 직접 고용한 정규직이 아니라 하청 간접 고용이라는 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회사 동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지금 다니고 있는 업체가 사라지거나 물량이 없어지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래서 원청 직접 고용이나 고용안정이 종희에게 중요한 사안이다. 정부와 회사는 전기차를 기후위기의 대안이라고 말하지만 그 미래에 종희와 같은 청년노동자들의 미래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종희는 어떻게 보면 대기업 때문에 먹고 사는 나라니까 정부가 아웃소싱이나 하청 제도 같은 것을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 하청제도 밑바닥에는 야간노동에 하루하루 불안한 일자리를 붙들고 사는 자신과 같은 MZ세대들이 있다고 본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정규직 사무직 MZ세대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경영진에 비하면, 부족하게 살기는 매한가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도 같은 노동자로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종희 씨는 바란다.

다혜

다혜(25·가명)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여유롭게 자랐다. 서울 출생으로 서울 소재 ‘명문’ 대학에 입학했고, 아르바이트도 용돈 벌이 정도만 하면 됐다. 아버지는 화이트 칼라이고 앞으로 일하는 데도 문제없어 보인다. 아버지가 퇴직할 경우엔 경제적 부담이 따를 테지만,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앞으로 2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다혜는 대학에 다니면서 민간 기업 인턴으로 일하며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기업은 직원 수 300명 이상, 연 매출 2천억 원에 달하는 곳이다. 다혜는 지난 3월 학교에서 배우기 어려운 직무들을 현장에서 경험하기 위해 3개월 인턴직으로 입사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도 있지만 그 여부는 회사에 달렸다. 다혜도 은근히 정규직 전환을 바래보지만 그 만큼 능력을 증명해야 하니 부담이 따른다. 다혜가 속한 팀의 임금 조건이 좋기는 하지만, 인턴인 다혜의 월급은 최저임금을 살짝 웃돈다.

다혜의 인턴 생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는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같은 이커머스 플랫폼에 물건을 파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이곳에서 다혜는 지난해 8월 3개월 계약직으로 들어가 6개월까지 일했다. 온라인 대학 강의를 듣던 기간이었지만, 회사에서 편의를 봐줬다. 이 회사의 월급은 최저임금이었고 3개월 후에는 세전 230만 원 정도로 올랐다. 다혜는 이 월급을 모아 등록금을 냈다.

다혜는 올해 졸업 필수 이수 학점으로 1학점을 남겨두고 있다. 졸업을 일부러 미루는 일종의 전략이었다. 채용 면접 때 졸업 후 취업까지의 공백은 잘 설명하면 되지만, 취업을 못 한 채로 졸업하면, 취업할 때까지의 공백이 바로 능력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학생 신분이면 대학에서 취업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지금 인턴직도 학생들의 취업을 지원하는 경력개발센터 같은 곳에서 정보를 받은 것이다.

다혜는 노조에 특별한 반감이 없다. 최근 대기업 사무직 MZ세대가 성과급 인상을 요구하며 노조를 만들었다는 기사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본인들한테 유리한 주장을 노조를 통해서 하는 것인데, 이게 MZ‘세대’의 공정성 논란이고 사회 ‘문제’로 볼 수 있을까?” 다혜는 근무환경 개선이 필요한 고강도, 서비스,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개인이 목소리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혜는 ‘소속’하고 ‘단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노조에 가입하지는 않을 것 같다. 먼저 직장에 들어가야 선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예린

제과제빵업계 1위, 3,400여 곳의 가맹점을 거느린 ‘파리바게뜨’. 파리바게뜨의 빵과 커피는 5200여 명의 제빵·카페 기사가 만든다. 11년 차 제빵기사 예린(35)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백화점, 로드샵에서 판매직으로 일했던 그는 집에서 홈베이킹을 하다가 엄마로부터 “이렇게 자주 할 거면 직장에서 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예린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기 위해 6개월 동안 제과·제빵 학원에 다녔고, 그 꿈을 이뤘다.

파리바게뜨는 가맹점 한 곳당 보통 제빵기사 한 명과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둔다. 두 명이 일하다 보니 파리바게뜨의 제빵기사는 빵을 만들 뿐 아니라, 주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예린의 하루는 6시 반에 출근해 빵을 만드는 일로 시작한다. 오전 중에는 공장에서 받은 반죽으로 성형, 발효, 굽는 작업을 마친다. 그리고 오후 1시~2시, 점심을 먹고는 케이크 시트에 생크림을 바르고 과일을 얹는다. 제빵 업무 사이사이 재료의 유통기한 관리와 매장 청소, 위생 관련 업무도 예린의 몫이다. 이렇게 예린은 대전의 한 가맹점에서 매일 7~80가지, 무려 500개에 달하는 양의 빵을 만들고 있다.

2017년도까지만 해도 예린을 비롯한 전국 제빵·카페 기사들은 SPC그룹의 계열사인 (주)파리크라상의 11개 협력업체 소속이었다. 그러나 본사가 케이크 수량 보고와 매장 홍보물 부착 등의 업무지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불법 파견’ 문제가 불거졌다. 이어 고용노동부가 2017년 9월 28일 파리바게뜨 제빵·카페 기사들을 본사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하고, 이어 2018년 1월 정당, 시민단체가 나서고 정부까지 시정명령을 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 노동자들은 모두 SPC그룹의 자회사인 (주)피비파트너즈에 고용됐다.

지난 4월 1일 회사는 출범 3년을 맞아 비전 선포식을 열고 “2018년 맺은 노사 간 사회적 합의를 충실히 이행했다” 고 밝혔다. ‘끝난 싸움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은 다른 평가를 한다. 합의서에는 본사 직원과 3년 내 동일 임금 등의 약속을 담았지만, 실수령액은 현재도 200만 원 전후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파리바게뜨지회에도 청년세대가 많다. 하지만 요즈음 MZ세대 노조 소식과는 다르게 사회의 관심은 드물다. 불법 파견을 이슈화시킨 민주노총 노조를 없애려는 움직임도 있다. 예린도 한 매장의 기사에게 민주노총 소속 파리바게뜨지회 가입을 권했다가 일주일 만에 탈퇴서를 받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한국노총 조합원이었던 기사가 민주노총에 가입하면서 한국노총 카카오톡 채팅방을 나가자 관리자가 그를 찾아와 탈퇴 이유를 묻고는 ‘예린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예린이 걱정됐던 기사는 관리자의 지시대로 “강요에 의한 가입”이라고 민주노총에 탈퇴서를 써냈다. 그렇게 700명대였던 파리바게뜨지회에는 지난 3월에만 100여 개의 가입 탈퇴서가 들어왔다.

예린은 노조에 가입하기 전, 밤 10시에도 전화를 했던 본사 관리자와 점주들을 보며 노조가 있으면 지금보다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노조를 만들고 많이 바뀌었지만, 권리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혜지

25세에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 고객센터에 입사한 혜지(31·가명)는 출근하는 하루하루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친절하게 상담해야 하는 혜지에게 함부로 대하는 고객의 말들은 퇴근 후에도 집까지 따라와 모멸감을 줬다. 전화상담 업무는 ‘감정 노동’이라 불리기도 했고,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미술을 전공한 혜지의 첫 직장은 미술학원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 후 혜지는 건보 경인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친언니의 추천을 받아 건보 서울센터에 취업했다. 그리고 건보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85%가 우울증 위험군인 것처럼, 혜지도 우울증에 걸렸다.

관리직은 고객에게 “추후 만족도 평가 시 ‘매우 만족’ 부탁드립니다”, “친절한 상담을 하는 〇〇〇입니다” 같은 말을 하도록 했다. 그러면 고객은 “친절한 상담은 됐고”라던가, “만족은 무슨”이라고 비아냥 댔다. 매일 6시간 동안 120통의 상담 전화를 붙들고 고객에게 자신을 좋게 봐달라고 비는 동안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처음 2년 동안은 많이 울었다. 당장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혜지는 눈물 속에서 잠을 자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버텼다.

3년 차가 되니 신기하게도 업무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서울시의 감정노동자 대상 무료 상담을 받았고, 정신과에도 다녔다. 그래도 혜지는 항상 마음속에 사직서를 꽂고 다녔다. 4년 차가 되던 해에는 건보 고객센터에 노동조합도 생겼지만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달 뒤 2020년 임금 협상 중관리자가 했다는 막말에 화가 나 노조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이 기존 최저임금 수준에서 임금을 올려 달라고 요구하니, 관리자가 ‘돈을 주면 그만큼의 콜을 더 받을 것이냐’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화가 난 이유는 이미 노동강도가 한도 초과였기 때문이었다. 혜지는 5년 동안 단 한 번도 인센티브를 받은 적 없다. 게다가 전화상담 시간만 하루 꼬박 6시간이 넘는다. 8시간 근무 중 상담 시간을 제외하면 2시간이 남는데, 상담 내용이나 고객센터에서 처리 불가한 상담을 지사로 이관하는 내용을 작성하는 ‘후처리’ 시간만 해도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휴게실에 5분만 넘게 앉아 있다가는 여지없이 관리직이 쫓아오기도 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이 혜지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이런 패턴으로 일하면 건보 고객센터 노동자의 하루 평균 콜 수인 120콜을 감당할 수 있다. 인센티브를 가장 많이 받는 혜지의 동료는 하루 평균 150~160콜을 받아냈고, 하루 세 번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 휴식 시간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아도 평균 임금 약 186만 원 에서 40만 원을 더 받을 뿐이다. 혜지의 노조는 지난 2월, 24일 동안 건강보험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서는 직영화가 필요하다며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건강보험 가입자의 개인정보 관련 업무를 민간업체에 위탁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또 한 콜당 2분 30초 내로 처리하라는 등의 노무 관리로 상담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2분 30초 내로 ‘소득감소에 따른 보험료 조정 관련 상담’을 할 경우, 가입자를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음에도 이를 안내하지 못했다. 이런 문제들은 다시 상담사들에게 민원으로 돌아왔다.

혜지는 지난 2월 25일 다시 헤드폰을 꼈다. 노조가 회사의 실적 압박에 저항하면서 제대로 된 상담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혜지는 고객의 문의사항을 모두 설명하며 하루 60-80콜을 처리하고 있다. 파업을 한 뒤 관리직도 지시 콜수를 줄이는 걸 보고는 속웃음이 나왔다. 상담이 잘 되다 보니 민원도 줄었다. 매일 퇴사만 꿈꾸던 혜지는 이제 파업 대회에서 발언하고 민중가요에 맞춰 춤을 추고, 고객센터 건물 근처에서 시민들에게 선전물을 뿌린다. 이제는 투쟁이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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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쉽사리 변하지 않는 구조로 말미암아 수 많은 노동자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들......언제나 직장에서 웃음을 띄우며 오고 갈 수 있는지.....늘 건강하시길....

  • 근로자

    우리는 대부분 근로자입니다. 노동자입니다. 노동자가 업무에 걸맞는 임금을,합당한 처우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노동착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