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운 영구임대주택, 고단한 심야버스

[1단기사로 보는 세상]드물지만 보수언론 사회면에도 서민의 삶이 실린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였던 지난해 4월 1일, 조선일보 경제섹션엔 코로나로 어려운 지역 소상공인을 도우려고 인근 직장인들이 ‘착한 소비’에 나섰다는 기사가 나왔다. 굳이 조선일보가 아니더라도 당시 여러 언론에서 ‘착한 소비’를 띄우는 기사가 유행했다. 하필 조선일보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영구임대 아파트 주변 식당을 섭외해 임대아파트에 사는 독거노인 1060명에게 점심 도시락을 제공하는 사례를 소개했다.

1년 뒤 ‘LH 투기’라는 고유명사가 생길 만큼 비난을 한 몸에 받은 LH이지만, 우리 언론은 평소 이들 공기업 미담 기사를 자주 썼다. 서울의 주거 취약지역의 대표명사였던 ‘영등포 쪽방촌’도 LH 등이 나서 저소득층 영구임대주택과 청년 행복주택촌으로 변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2020년 4월 1일 B2면(왼쪽)과 2020년 7월 16일 B2면.

조선일보 같은 극우 언론이라도 존재의 이유는 있다. 거기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 중에는 극소수 일지라도 선의를 가진 이가 있다. 조선일보가 밉다고 깨부수는 게 진보가 할 짓은 아니다. 다른 주류 매체가 조중동과 경제신문이 쏟아내는 혐오의 단어를 질적으로 능가할 만큼 실력이 있지도 않다. 민중의 삶을 놓고 볼 때 양자는 도긴개긴이다.

조선일보가 7월 31일 사회면(13면)에 “서러운 영구임대주택 ‘에어컨 켤 땐 냉장고 꺼요’”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썼다. 시중에 파는 소형 벽걸이 에어컨 소비전력이 0.6kW인데 2000년 이전에 완공된 영구 임대아파트의 가구당 전기 용량이 1.2kW라서 에어컨을 켜면 냉장고 같은 다른 가전을 꺼야 한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담았다. 이 때문에 2018년 기준 영구임대주택 14만 가구 중 42%만 에어컨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서울 노원구의 한 영구임대 아파트를 취재하면서 베란다 실외기 숫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5층 건물 한 동에 실외기가 한 곳만 설치된 곳도 있었다. 정부는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영구임대주택을 제대로 배려하지 않는다. 애초 설계부터 변압기 용량이 적어 영구임대주택에 사는 저소득층 서민들은 더 힘든 여름을 나고 있다. 내 친구가 사는 영구 임대아파트는 재벌 회사가 시공한 영어 이름의 브랜드 아파트인데, 영구임대 동엔 1년 내내 햇볕 한 줌 들지 않았다.

2018년 기준 전국의 영구임대주택은 14만1000여 가구인데, 조선일보는 이들의 팍팍한 삶을 취재했다. 지난 3월 ‘LH 투기’로부터 촉발한 부동산 기사가 왜 진작 이런 주거빈곤층을 조명하지 못했는지 아쉽기만 하다.

  조선일보 2021년 7월 31일 13면 머리기사.

  조선일보 2021년 7월 29일 12면 머리기사.

조선일보가 7월 29일 사회면(12면)에 쓴 머리기사 ‘올빼미 버스는 고단한 꿈을 싣고…’도 기자가 심야버스를 직접 타 체험 취재했다. 기자는 7월28일 새벽 1시 서울 강남구 삼성역 사거리에서 N61번 버스를 탔다. 대리운전 기사와 우체국 소포 분류 알바, 청소 미화원이 심야버스의 주 이용객이었다. 기자는 버스 안에서 이삿짐을 나르는 60대 여성과 생활비를 벌려고 저녁부터 자정까지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20대 취준생, 60대 삼성역 인근 빌딩 청소 미화원을 만났다.

버스 기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엔 심야의 취객들도 이용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요즘엔 취객들이 거의 안 보인다고 했다. 좀 뜬금없고, 문제점과 개선점을 찾을 수 없는 단순한 동행 취재라도 조선일보 사회면 머리기사에서 서민들 삶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면 두 기사를 쓴 기자가 대학생 인턴 기자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누가 봐도 대학생 인턴이 발로 취재한 내용을 조선일보 기자가 도와서 마무리한 기사다. 대학생 인턴 말고 조선일보 기자들도 이런 기사를 많이들 썼으면 한다.

대학생 인턴이 썼다고 다 훌륭한 기사는 아니다. 조선일보 8월 7일 사회면(10면)엔 ‘앉아서 분리수거 안내, 922억 들인 공공 꿀알바’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도 대학생 인턴이 현장 취재하고 조선일보 기자가 마무리한 앞선 두 기사와 같은 형식이었다.

  조선일보 2021년 8월 7일 10면.

조선일보는 지난 4일 영등포구 안 주택가 분리수거장에서 ‘자원 관리 도우미’라는 조끼를 입은 남성 2명이 올바른 폐기물 분리배출을 안내하는데, 주민들이 수차례 잘못 버렸지만 두 사람은 의자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기자는 이유를 물었고, 60대 자원 관리 도우미는 “구청에서 되도록 민원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하더라”고 답했다.

조선일보는 자원 관리 도우미 사업이 올해 922억 원 예산을 들여 만든 ‘공공 일자리’인데도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간만 때우는 유명무실한 ‘꿀알바’라는 거다.

‘공공근로 사업’은 70년대 박정희 시절 ‘새마을 취로사업’으로 시작해 저소득층의 소중한 일-자립을 돕고 있다. 물론 형식에만 그치는 퍼주기 식 공공근로 사업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공공근로 사업을 없애면 차상위 이하 계층은 살길이 막막해진다.

혹시 공공근로 하는 노동자가 앉아서 일하면 안 된다는 편견에 갇힌 건 아닐까. 공공근로 하는 사람들은 새마을 취로사업처럼 삽 들고 도랑을 치고 무거운 돌덩이를 옮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진 건 아닐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자원 관리 도우미가 재활용품을 버리는 주민들에게 원칙대로 지적질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온다. 분리수거의 원칙과 주민 민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도 집 앞 지하철역엔 코로나19 방역 안내 문구를 적은 어깨띠를 매고 공공근로 하는 중년 노동자를 본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있다고 격분할 게 아니라 그 열정으로 좀 더 구조화된 모순을 취재해야 한다.

조선일보만 현장감 있는 기사를 쓰는 건 아니다. 같은 보수언론인 동아일보도 8월 2일 사회면(10면)에 ‘20평집에 13명 북적북적… 지역아동센터 불안한 밀집 돌봄’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시행에 따라 지역아동센터도 기존 수용 인원의 절반까지만 아이들을 받을 수 있다. 7월 27일 강원도 원주시 한 센터에선 센터장과 직원, 아동 등 26명이 코로나에 집단 감염되기도 했다. 하지만 센터 직원들은 맞벌이 가정 부모들이 다급하게 요청하는 데 방역 지침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거절하기도 어렵다.

  동아일보 2021년 8월 2일 10면 머리기사.

동아일보는 방역 지침과 현실 사이의 고충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방역수칙을 지키고 싶어도 어머니들의 난처한 상황을 알기에 거절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지역아동센터 센터장의 고충을 담았다. 동아일보는 “방학을 맞으면서 인원 제한 권고가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어려울 것”이라는 서울시 관계자 말을 전하면서도, 부모와 방역당국, 지방정부 어느 곳도 비난하지 않았다. 방역지침 위반이라고 몰아붙이거나 부모 입장만 일방으로 대변하지도 않았다.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전국 11만여 명의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선 그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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