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이 이야기

[유하네 농담農談] 농사가 주는 즐거움과 힘

민정이를 만났습니다

수줍게 인사를 합니다. 밀짚모자 사이로 살짝 고개를 들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합니다. “민정아! 한 주 동안 잘 지냈어?” 하니 “네….”합니다.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하는 민정이의 옅은 미소에서 반가움이 느껴집니다.

[출처: 이꽃맘]

여름이 팽팽하게 기세를 더하던 지난 8월 말, 민정이를 처음 만났습니다. 민정이는 원주의 한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내년이면 사회에 나가는 3학년이지만 민정이는 조금 다릅니다. 편의점 직원이 되는 것이 꿈인 민정이. 주중에는 민정이 엄마가 일하고 주말에는 민정이가 일하는 편의점 직원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 “사장님이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해줘요. 사장님이 열심히 하면 정직원 시켜준다고 했어요”라며 기뻐합니다. 중학교 시절 왕따를 당할 때 함께 해준 언니들과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는 민정이. 민정이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거 최저임금 위반인데…근로계약서도 안 썼다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그래? 잘 됐다. 열심히 하면 될 거야. 대신 힘든 일 있거나 사장님이 괴롭히면 선생님한테 얘기해. 달려갈 테니까”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땅과 하늘을 믿고 시작한 농업 수업

민정이의 손을 잡고 밭으로 나섭니다. 2학기 동안 민정이와 농업 체험 학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마을에서 진행 중인 사회적 농장에서 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농업 수업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조금 망설였지만 흙과 풀, 하늘이 나에게 줬던 힘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민정이와 가을 농사를 지었습니다. 텅 빈 밭에 무씨도 뿌리고 배추 모종도 심었습니다. “민정아 우리 매주 사진을 찍어서 무랑 배추가 어떻게 크는지 담아보자.” 손가락 위에 눈곱만한 무씨를 올려놓고 말합니다. “이 작은 씨가 무가 된다고요?” 민정이는 믿지 않는 눈치입니다. 원주에 살지만 항상 도시에서만 살아 밭일은 처음인 민정이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땡볕에 서서 말합니다. “그럼. 마트에 파는 커다란 무 있잖아. 이 작은 씨가 그렇게 커다란 무가 되는 거야.” 얼른 차로 뛰어가 밀짚모자 하나를 들고 와 민정이 머리 위에 씌워줍니다. “우와~” 민정이는 밀짚모자 끈을 조이며 모자 끝을 올려다봅니다. 자기표현에 서툰 민정이의 최대 반응은 “우와~”입니다.

무에서 싹이 나고, 배추 모종이 자라고 민정이는 “우와~”를 연발하며 매주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자 무는 민정이 종아리만큼 자랐습니다. 배추도 속이 꽉 들어찼습니다. 가을장마에 다른 밭의 배추는 병에 걸리고 물러 버렸지만 민정이 밭의 배추는 참 잘 자랐습니다. 무를 뽑아 깍두기를 담기로 했습니다. 서걱서걱 잘 자란 무를 썰고 미리 준비한 각종 양념을 넣어 깍두기를 무칩니다. “민정이 집에 김치 있어?” 물으니 “예전에 외할머니 살아 계실 때는 김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엄마도 바쁘고 해서 없어요. 오늘 깍두기 담는다니까 엄마가 엄청 좋아하셨어요” 합니다. 빨간 깍두기가 완성되자 민정이는 “우와~”합니다.

외할머니 맛이 나는 김치

2주 후 김장을 하기로 한 날입니다. “깍두기 맛있게 먹었어?” 하니 “엄마가 외할머니 맛이 난다고 했어요”라고 합니다. 미리 절여놓은 배추에 속을 만들어 넣습니다. 채칼을 처음 잡아보는 민정에게 무채를 써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민정아 잘 기억해둬.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민정에게 김치를 담는 방법을 하나하나 설명해 줍니다.

민정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서를 외웁니다. “무를 채 썰고, 갓이랑 쪽파를 썰어 넣고 찹쌀죽이랑 젓갈, 고춧가루를 넣고….” 작은 목소리로 따라 합니다. 어느새 김치를 완성해 김치통을 가득 채웁니다. “우와~” 민정이가 즐거워합니다. “오늘 저녁밥은 뭐 먹어?” 물어보니 “엄마랑 일하는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가져와서 먹어요.” “매일 사서 먹는 거야?” “시간 지난 거 사장님이 그냥 주시는 거라 돈 안 들어요.” “매일 다른 도시락 먹으면 맛있겠다. 오늘 저녁에는 민정이가 직접 만든 김치랑 먹으면 더 맛있겠네.” 민정이가 웃습니다.

마지막 수업

“마지막 수업은 쫑파티 하자! 선생님이 맛난 거 준비해 놓을 테니 기대해.” 12월 초 마지막 수업을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수업 날. 쌀쌀한 날씨에 유하 아빠가 모닥불을 피웁니다. 민정이가 왔습니다. 함께 오신 담당 선생님이 “민정이가 선물을 준비했대요. 민정아 얼른 드려” 합니다. 민정이가 수줍게 박스를 하나 내밉니다. “이게 뭐야. 무슨 선물이야?” “선생님 제가 만든 거예요.” 박스에는 천연재료로 만든 보습크림, 핸드로션, 바디로션과 노란색 종이에 작은 글씨가 가득한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민정이가 돌아간 후 민정이와 함께 떡과 소시지, 고구마를 구워 먹었던 모닥불 앞에 앉아 편지를 읽습니다.

  민정이가 보내준 선물 [출처: 이꽃맘]

“농업 선생님께. 선생님 저 민정이에요. 항상 저한테 좋은 거 알려주시고 어려운 일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께 드리는 선물이 작아서 죄송해요. 선생님, 마지막이지만 선생님이 알려주신 여러 가지 일들 다 기억하고 있을게요. 사랑해요. 선생님께서 저한테 알려주신 사랑 그대로 저도 남한테 베풀게요.”

괜히 눈물이 핑 돕니다. 민정이와 조금이나마 마음이 통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작은 씨앗부터 김치를 담을 만큼의 무와 배추를 키워내는 동안 민정이와 함께 느꼈던 “우와~”의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작은 씨가 큰 무가 된다고 했을 때 신기함, 무 싹이 솟아났을 때 즐거움, 땡볕에 앉아 풀을 뽑을 때의 힘겨움, 큰 무를 쑥 뽑았을 때 성취감. 민정이가 마음속에 가지고 갔으면 했던 것들입니다. 내가 농사를 지으며 마음속에 담은 것들입니다.

하늘과 땅이 주는 용기

민정이와 보낸 3개월의 시간을 ‘사회적 농업’이라고 부릅니다. 약육강식 자본의 논리만 가득한 도시의 어둠을 농사가, 농민들이 사는 시골이 품어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늘과 땅이 큰 품으로 유하네를 품어줬듯 유하네도 큰 품으로 힘든 사람들을 품어주며 살아가려 합니다. 민정이와 전화번호를 나누며 “민정아 힘들 때나, 놀고 싶을 때 언제나 전화해”라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민정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너무 즐거웠어요. 내년 봄에 양파 뽑으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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