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 보도를 일삼겠습니다”
저널리즘이라고 하면 응당 떠오르는 가치들이 있다. 객관적이어야 하고, 공정(불편부당)해야 하며,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워커스》의 창간 정신은 ‘편파보도’에 있다니…. 하지만 짚어야 할 게 있다. 언론의 객관성이나 공정성·중립성은 사실 불가능하다는 걸 언론인이라면 모를 리 없다. 다만 ‘척’하는 것일 뿐. 누구의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들이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워커스》가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청년과 노동자 편에 서서 편파적인 보도를 하겠다니, 그 도발이 내심 반가웠다. 《워커스》는 그렇게 2016년 3월에 창간했고, 어느덧 100호 발간을 맞았다.
응원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유지가 가능할까? 걱정이 앞섰다. 언론 자체가 사양 산업으로 돌입한 지 오래다. 많은 언론사가 생존을 위해 인쇄 부문을 없애야 하나 고민하던 때, 참세상에서 인쇄매체 창간이라니. 개인적으로 가시밭길이라고 판단했다. 미디어스 기자로 일하며 《워커스》 당시 홍석만 편집장을 인터뷰한 기사에 굳이 ‘2016년에 인쇄매체 창간을’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다. 7년 전, 참세상의 《워커스》 창간은 사실상 ‘무모한 도전’이라고 밖에 보기 어려웠다.
《워커스》가 창간호에서 이야기했던 것…
청년, 노동, 여성…사회적 소수자
《워커스》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기사들이 있다. ▲대한민국 청년 정치 실종 사건 기획_“정치는 네 것이 아니냐”, 마케팅으로 전락한 청년 정치 ▲나의 첫 노동조합 ▲진보생활백서_‘즐거운 나의 집’이 불편한 이유 기사를 눈여겨봤던 기억이 난다.
2016년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면, ‘20대 개새끼론(이십 대들의 낮은 정치 관심도를 비난하는 용어)’이 회자할 때였다. 《워커스》는 청년들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기회를 주기나 했는가?” 선거권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의제가 나올 때마다 반대 근거는 늘 이랬다. “공부해야 할 나이의 미성숙한 애들한테 투표권을 주는 건 위험하다.” 이렇듯 학교 교육과 정치는 이분화하고, 청소년을 미성숙한 인간으로 보는 시각이 농후했다. 학교에서 교사가 정치 관련 사안만 입 밖으로 꺼내도 ‘교사 자질’을 운운하던 이들은 누구인가. 2019년 12월에서야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선거권이 만 18세로 하향됐는데, 이렇듯 법 개정이 늦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성인이 되도 달라질 건 없다. 그때부터는 ‘나이가 무기’, ‘경험이 깡패’가 돼 찍어 누르기 바쁘다. 정치 관련 발언이라도 할라치면 “네가 뭘 안다고…”라며 대뜸 ‘애 취급’을 하는 통에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 정치를 논하는 자가 여성이라면 “여자가~”라며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추가해서 들어야 한다. 《워커스》는 그 세태를 꼬집었다. ‘텃밭’이라며 지역주의에 기댄 투표를 하는 세대가 누구냐고 묻고, 그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청년들은 어른들과의 대화를 포기했다고 말한다. 굳이 책임 여부를 따진다면 ‘청년’들에게만 원인이 있지 않다는 얘기다.
‘나의 첫 노동조합’ 기사 또한 흥미로웠다. 청년세대가 노동조합에 갖는 부정적인 인식은 상당하다. (물론 특정 세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이 주는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일부러 ‘유니온’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는 얘기. 노동조합 조직률이 10%를 갓 넘은 한국 사회에서 그것도 청년들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워커스》는 청년 이슈로 ‘노동조합’을 꺼내놓았다. 강요나 당위가 아니다. 당사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의 ‘경험’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고민할 수 있도록 던져 놓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진보생활백서는 ‘참세상’이기에 가능한, 더 필요한 기획이라고 봤다. 그 첫 기사 제목은 ‘집 밖에선 진보, 집 안에선 꼰대’였다. 기득권이 된 진보세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코너로 성소수자, 페미니즘, 청소년, 비정규직의 시각에서 결핍이 심각한 자칭 진보 인사들의 뜨끔함을 불러올 내용으로 채워졌다. 왜 이런 문제 제기가 필요한지는 이미 조국 전 장관과 고 박원순 전 시장의 사례에서 확인된 바 있다. 오히려 진보 진영 내에서 더 빨리 이야기해야 했던 주제였는지 모른다.
《워커스》 창간 7년, 그동안 열심히 살았구나!
개인적으로 《워커스》에서 ‘나’와 밀접해 보이는 기사들을 흥미롭게 본 편이다. 창간 초반에 있었던 ‘100명의 마을’ 기획도 그랬다. 통계를 기반으로 ‘1인 가구’, ‘노인 가구’, ‘결혼 이주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획이었다. 1인 가구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런데도 여전히 정부 정책에서 뒷전으로 밀려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그리고 1인 가구 거주자들이 희망하는 거주 형태가 “40㎡(12평) 이하 아파트 전세”라는 점에 놀랐다. 자가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커스》에서 ‘인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 ‘순식간에 쪼그라든 우리의 월급명세표 : 연봉 2,500만 원 이하 저임금 노동자 급여명세서 분석’ 기사도 “당신의 이야기야”라고 속삭이듯 눈길을 사로잡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시선도 놓칠 수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한순간에 ‘피의자’ 신분이 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법체계와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점을 담은 한국여성의전화와의 공동 기획 또한 돋보였다. ‘신영아 노조하자’ 기획은 사회에서 가려져 있던, 하지만 한국 사회를 지탱해왔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감사해하며 읽었다. 모두 내 이야기 같아서….
‘체험기’와 같은 기자들의 고생담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위클리매드코리아’ 기획에 관련 내용들이 담겼다. 참세상 기자가 강남역에 직접 노점을 차려 단속반과의 신경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단순히 강남구청의 노점 철거 문제만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2015년, 한국전력 삼성동 부지를 낙찰 받으며 현대차가 서울시에 낸 공공기여금 1조 7천억 원의 사용처를 두고 갈등이 벌어졌다. 서울시는 해당 기금을 잠실종합운동장을 포함한 인근지역 개발에 쓰겠다는 입장이었고, 강남구청은 영동대로 개발 등 강남구에 먼저 투입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면서 신현희 당시 구청장 입에서 나온 말이 ‘강남특별자치구’를 설치해 서울시로부터 독립시켜달라는 요구였다. 강남특별자치구 설치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워커스》의 기사는 여전히 한국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강남구의 오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위클리매드코리아’에서 노조 조끼를 입고 국회와 청와대, 대법원을 출입했던 실험은 웃펐다. 노조 조끼와 몸자보가 ‘높은 분들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물건’으로 취급받는 모습을 보니, 그 자체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의 현실을 보는 듯했다. 홈리스 노동팀에서 폐지 수집에 나선 기사 또한 흥미로웠다. 성인 3명이 4시간 폐지를 수집해 손에 쥔 돈은 고작 4,500원에 불과했다. 시급 375원. 《워커스》는 폐지 수집을 두고 “홈리스 또는 가난한 노인이 찾는 비공식 노동의 대명사”라고 썼다. 이때가 2016년 7월이다. 그리고 2022년 3월, KBS는
《워커스》 기자들이 참세상 후원을 늘리기 위해 전화를 돌린 기록은 마음이 아팠다. 독립 매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일까, 기사를 읽으며 눈물이 날 뻔했다. 7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 2017년 대선, 미투, 디지털 성범죄, 임신 중지, 홍콩 시위, 열악한 쿠팡 노동에 이르기까지. ‘《워커스》, 참 열심히 살았구나!’
한국 사회에서 독립 매체가 유지되는 방법
한국 사회에서 ‘언론사’를 운영한다는 건 쉽지 않다. 모든 매체가 ‘광고’만 바라보기에 더욱 그러하다. 수신료의 다수를 배분받는 공영방송 KBS 역시 광고를 받는다. TV 수신료는 1981년 2,500원으로 고정된 지 42년째 제자리걸음을 걷다 보니, KBS마저 ‘광고’와 ‘협찬’에 목을 매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하물며 광고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공영방송 MBC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사들의 사정은 더 나을 게 없다. 케이블이나 위성, IPTV 등 유료 방송 또한 다르지 않다. 유료 방송은 사실상 이용자들이 내는 시청료로 충당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콘텐츠 비용이 워낙 저가로 책정되다 보니, 수익을 내기 위한 ‘광고’ 유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플랫폼의 광고 의존도는 이제 OTT로 옮겨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분석도 등장했다. 넷플릭스는 최근 정체된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광고형 베이식’ 상품을 내놓았다.
광고가 아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모델이 없는 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유튜브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구독자 모델이 만들어진 지긴 했다. 정치 유튜브 판에서 화젯거리인 채널은 단연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이다. 해당 방송은 첫날 전 세계 슈퍼챗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 주 동안 벌어들인 돈이 2억 3,200만 원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씨가 출연했을 때는 하루 동안 837만 원을 벌었다고도 했다. 정말 경이로운 기록이다.
하지만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과 좋은 언론(채널)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구독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방송을 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와 위안부 수요집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들이 있다. 그들에게 누군가의 고통은 돈벌이일 뿐이다. 미디어 환경 전체를 놓고 보면, 필터 버블로 인한 편향의 극대화가 우려된다. 그 안에서 저널리즘을 기대하긴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독립적인 매체가 유지되는 건 쉽지 않다. 2016년 5월, 미디어충청이 문을 닫았다. “일하는 노동자들의 언론”을 표방하며 지역의 노동 현안을 끈질기게 취재·보도했지만, 창간하고 8년 7개월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미디어충청 폐간이 안타까웠던 건, 마지막 출고 기사 또한 유성기업 노동자 고 한광호 씨에 주목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2022년 5월, 독립 미디어 닷페이스가 설립 6년 만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미디어 생태계의 위기다. 한 공동체에서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왔던 독립 매체들이 사라진 만큼, 여론은 집중되고,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워커스》 7년,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민중언론 참세상의 《워커스》 도전은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다. 물론, 여러 차례 재정적 위기를 겪었던 것으로 안다. 주간지에서 격주간지, 월간지로 축소됐고 판형의 변화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부침이 있었을지 가늠조차 어렵다. 자본 등 권력의 휘둘림 없이 오롯이 편집국의 판단에 따라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축복의 뒷면은 이렇게 밝지만은 않다.
최근 한 선배로부터 ‘매체 기자들이 본지의 독자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 실험을 해봤더니, 기자들이 생각하는 구독층과 실제 구독층은 달랐다고 한다. 기자들이 누가 읽을지도 모르면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인사이트를 준 발언이었다. 《워커스》 창간 7년, 100호 발간을 맞아 ‘독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길 권하는 이유다. 《워커스》에 현시점에 가장 필요한 건 어쩌면 그것이 아닐까? 독자들을 파악하고 그들과 밀착되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워커스》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테지만…. 무모한 도전을 넘어 무한도전에 나서고 있는 기자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