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선택한 발전산업노동자들
"'민영화 저지' 향해 더디지만 꿋꿋이"
회사 '노조무력화' 공작으로 발목…"계속되면 투쟁으로 대답"
2000년 12월3일,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강당. 이른 새벽부터 5∼15명씩 조를 이뤄 고속버스, 열차, 승용차로 상경한 노조원들이 오후 3시가 넘자 2천여명에 이르렀다. 정문돌파를 꾀하는 조합원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기도 했다. 경찰 14개 중대가 오전부터 본사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다. 공사쪽은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3일 오전 9시부터 별도명령이 있을 때가지 본사출입을 금한다"고 공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합원이 불어나 한밤중에는 5천여명이 모였다. 한전분할매각을 담고 있는 '전력산업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전국전력노조(위원장 오경호)는 두 차례 유보 끝에 다음날 파업돌입을 선언해놓고 있었다.
열 달 전의 분통터지는 기억
매각저지가 애국운동이라 생각했던 조합원들은 자정을 넘어 중노위 조정안에 노사가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경호 위원장과 최수병 사장 등이 △법인분할 시 노조에 사전통보하고 고용보장과 근로조건에 대해 성실히 협의 △민영화는 노조, 한전, 정부로 구성된 노사정협의회에서 제반문제점을 협의해 시행 △공사는 민영화시 고용승계토록 적극 노력 등에 전격 합의한 것이다. 노조는 새벽 1시 파업을 철회했다. "국가기간산업이 시장에 매물로 나올 수 없다"며 파업돌입을 기다리던 조합원들은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공기업이던 ㅎ사가 민영화를 전후해 '희망퇴직'으로 관리직원들이 대거 무보직발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조합원들서는 '민영화가 돼도 고용승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열 달이 지난 2001년 9월4일. 전력노조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울산화력지부는 한국발전산업노조 동서발전본부 울산화력지부로 바뀌어 있었다. 지난 겨울의 '법인분할 시 사전통보' 합의에 따라 발전부문은 지난 4월2일 동서, 서부 등 5개 화력부문과 수력원자력부문으로 쪼개졌다. 전력노조는 5월29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논란 끝에 화력부문 단일노조와 수력원자력노조를 설립키로 결정했다. 이어 7월19일 실시된 발전산업노조 임원 선거에서는 현장조직 전력노조민주화투쟁연대가 내세운 이호동-김순섭-김인(위원장-수석부위원장-사무처장)후보가 3파전 속에서도 61.1% 지지로 당선됐다. '배신 없는 투쟁으로 답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투쟁으로 민영화 저지', '민주노총 가입'을 주요공약으로 내걸었다.
회사쪽 '단체협약 포괄 승계' 거부
그런데 이호동 위원장은 회사쪽의 협조거부로 설립필증이 나온 7월28일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출신지인 울산화력지부에 머물고 있었다. 이 위원장은 "회사쪽이 순순히 노조사무실이나 전임, 조합비 공제를 인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여유 있는 웃음을 지었다. 노조는 분할되기 전 전력노조와 체결한 단체협약을 포괄적으로 승계할 것을 제기하며 원만한 노사관계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회사쪽은 "채무적 부분과 집단적 노조활동에 관한 사항은 승계의무가 없다"며 새로 교섭하자고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회사쪽은 이호동 집행부 출범과 민주노총 가입이란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하다. 상급단체 변경을 위한 조합원투표에 들어가자 회사 임원과 관리자들은 가족들이 있는 사택까지 찾아가 "위원장이 잠적했다" "어떤 지부는 투표를 포기했다" 따위의 악선전을 늘어놨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8월9일부터 이틀 동안 진행된 투표에는 전체조합원 5천6백45명 가운데 4천5백93명(81.4%)이 참가해 3천4백94명(76.1%)이 민주노총을 선택했다.
노조는 지난 9월2일 대전에서 설립 뒤 첫 대의원대회를 열었다. 이호동 위원장은 대회사를 통해 단협의 포괄적 승계와 노동조건 개악기도 중단 등을 촉구하며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처럼 회사쪽이 원한다면 투쟁으로 대답하겠다"고 경고했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회사쪽이 계속해서 노조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지부별로 조합비를 직접 걷고, 노조사무실은 공공연맹 한 귀퉁이라도 얻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날 대회에서는 조합비와 희생자구제기금을 결정하고, 노조 중앙과 본부, 지부의 조합비 배분비율을 2대2대6으로 정했다.
"쌓인 과제들, 조합원과 함께"
정부는 내년 2월부터 발전자회사를 하나씩 매각한다는 계획이다. 산업자원부 등에서 이를 위한 민영화기획팀을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민영화가 되면 몇 명이 정리될 것이라는 따위의 얘기도 떠돌고 있다. 노조는 다시 대의원대회를 열어 구체적인 투쟁계획을 잡을 예정이다.
한편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을 다시 한번 민영화 저지투쟁으로 묶어 세우는 일도 시급하다. 56년 어용노조의 관행 탓에 조합원 상당수는 아직도 회사가 노조 대의원대회에 숙식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한다고 한다. 노조활동 보장, 민영화 저지, 산별노조 정착과 함께 조합원들을 투쟁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게 갓 출범한 발전산업노조가 풀어야 할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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