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미국 CBS방송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소송에 휘말릴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그의 처벌을 바라는 쪽은 레네 슈나이더라는 전 칠레 장성의 유족들이다.슈나이더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노동자들의 지지 속에 칠레 사상 처음으로 민선대통령에 당선되던 1970년 무렵 납치돼 살해당했다.
슈나이더의 납치를 지휘한 자는 칠레 주재 미국대사관 무관 폴 위머트라는 예비역 대령이었다. 슈나이더의 죄(?)는 군부의 정치개입을 반대하고 아옌데가 대통령에 선출되지 못하도록 쿠데타를 선동하라는 미국쪽 압력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때 위머트에게 쿠데타 선동 지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였다. 키신저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중남미 군사정권을 비호하고 거기에 반대하던 반체제 인사를 납치, 고문, 살해한 중앙정보국(CIA)의 `콘도르 계획'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미국의 비밀공작은 실패했고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3년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1973년 미국이 지원한 우익 장성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대통령 아옌데는 비장한 최후를 맞았다. 쿠데타에 저항한 수만명의 칠레인들이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슈나이더 유족들은 20여년의 피노체트 철권정치가 막을 내린 지금에야 키신저를 재판정에 세우라고 외칠 수 있게 됐다.
1951년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정권을 잡았다. 그가 영국의 이란 석유 독점권을 제한하려 하자 영국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았고 반공을 모든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던 미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권은 영국의 사주대로 이란 석유의 세계시장 진출을 봉쇄한 뒤 CIA 비밀공작을 통해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켰다. 30년에 가까운 친미 팔레비 왕정 독재가 시작됐고 수많은 이란인들이 희생당했다.
같은 해인 1951년에 집권한 뒤 2%의 인구가 70%의 토지를 과점한 중미 과테말라의 토지개혁을 추진하려던 야코모 아르벤스 구스만 정권도 최대지주였던 미국 유나이티드 프루트사와 대립한 끝에 미국 CIA 공작에 의해 무너졌다. 그 뒤 31년간이나 계속된 친미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수십만명의 과테말라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역시 도미노 이론을 앞세운 미국 반공정책의 미명 아래 베트남에서는 수백만명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1991년 걸프전쟁 이래 지금까지 미국이 설정한 공적 1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1979년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린 이란 아야툴라 호메이니 혁명 뒤의 이란-이라크 전쟁, 같은 무렵 소련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10년 내전 때는 CIA의 절대적 지원을 받은 골수 `미국편'이었다. 그때 미국이 적극 지원한 또 한명의 테러리스트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갑부의 아들 오사마 빈 라덴이다.
그는 2001년 9월 11일 자본주의 심장부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날려버리고 워싱턴 국방부 청사 일부를 무너뜨린 전대미문의 항공기 테러참사 배후로 지목돼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간의 자유'를 위해 대규모 전쟁까지 공언하며 제거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바로 그 인물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히 찢겨지고 피흘린 아랍 이슬람세계. 2차대전 뒤 유럽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적 기형아 이스라엘을 지원하며 유럽 제국주의를 대신해 새로운 중동 석유의 패자로 등장한 미국.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굴곡진 인생은 뒤틀린 서구와 아랍의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제국주의세력이 국가의 이름으로 저지른 대규모 살륙, 억압, 음모, 기만과 거기에 저항한 테러리스트들의 무모한 인명살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국가테러와 개인 또는 집단테러간에 무슨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인간의 자유, 정의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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