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큰게 오고 있다"-테러 이전부터 오고 있었던 것

'나, 떨고 있니?'
몇 년 전 방송됐던 인기 미니시리즈가 낳은 이 유행어는 최근 심장부에 테러 공격을 받은 월스트리트의 상황을 요약한다. 폐업 4일만인 지난 9월17일 뉴욕증권거래소는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소방관이 개장을 알리는 벨을 누르는 것과 함께 다시 문을 열었다. '미국은 끄덕 없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이벤트를 동원한 것이다.

개장을 앞두고 월스트리트는 '뇌동매매는 안 된다' '한주 동안은 그냥 보유하는 게 낫다' '역사는 폭락 뒤 반등했음을 보여준다' 등 온갖 논리를 들이대며 주식을 팔아치우지 말 것을 주문했다. 테러 직후 1천2백억달러의 긴급 유동성을 쏟아부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개장 한시간 전 단기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전격 인하했다. 유럽중앙은행과 일본은행이 금리 인하 조처를 취하며 사실상 1986년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정책공조에 나섰다.

하지만 허사였다. 다우존수산업평균지수는 9000선이 붕괴된 채 7.13% 폭락했고, 나수닥종합지수는 6.83%, 스탠더드앤푸어스(S&P) 500지수는 4.92% 떨어졌다. 시스코 시스템즈, 제너럴 일렉트릭(GE), 플리트 보스턴 등 75개 회사가 자사주 매입에 나섰지만 폭락세를 막지는 못했다. 내년에 미국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3.2%에 이를 것이라는 폴 오닐 재무장관의 구두개입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리고 월스트리트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선방했다' '하락폭은 예상했던 수준이다' 등등. 오닐 재무장관은 이날 저녁 방송에 출연해 "달러는 강세이며 '강한 달러'가 미국에 좋다는 이야기 외에는 달러 정책에 관해 할 이야기가 없다"며 월스트리트를 다독거렸다.

이 모든 것이 월스트리트 유지를 위한 경제대응능력의 발휘였다. 이 노력은 성공을 거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테러 직후에도 월스트리트에서는 "이전 것(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보다 훨씬 더 큰 뭔가가 비틀거리고 있다"는 소문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자본금 48억달러로 차입을 통해 1천2백억달러가 넘는 자산을 굴리다 98년 9월 파산 직전에 이르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금융시스템을 붕괴시킬 뻔했던 미국계 헤지펀드다. 연준이 개입해 36억5천만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돼 가까스로 파산을 모면했다.

금융전문연구기관인 '타스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단기투기자본인 헤지펀드에 투자된 돈이 70억달러가 넘는다. 지난해 전체 헤지펀드에 투자된 것과 비슷한 규모다. 미국의 금융 전문 인터넷신문 <스트리트닷컴>의 선임 컬럼니스트인 피터 이비스는 "시장 자체가 문제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거래 규모는 1조달러에 이르는 장외 파생상품시장을 뜻한다. 금융 전문가들은 "헤지펀드들이 테러로 인한 손실을 회피하는 데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고 있다.

헤지펀드들의 어려움은 미국 경제의 추락과 함께 테러 사태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 재무부와 은행, 증권사들이 '플런지 프로텍션 팀'(붕괴예방팀)을 구성해 주식시장과 파생상품시장에서 '최후의 구매자' 구실을 하며 연착륙을 꾀하고 있었다는 것은 월스트리트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은밀한 활동의 재원은 의회의 승인이나 감시를 받지 않아도 되는 '환율안정기금'(ESF)을 통해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한 금을 유럽시장에 현금화시켜 조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린 한 금융전문가는 "이 과정에서 영국 중앙은행인 영국은행의 협조가 있었다"며 "금 시장에 대한 조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주력상품인 금 가격을 떨어뜨려 옛 소련을 붕괴시키려고 시도했다"고 밝혔다.

이에 비춰, 이번 테러 사태는 월스트리트에게 문제의 근원을 호도할 수 있는 기회다. 미국 금융시장, 곧 월스트리트의 불안정은 그 자체가 간직한 본래적인 문제점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도, 이를 테러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설사 월스트리트가 살아남는다 해도, 더욱 큰 파국이 예상된다. 테러 사태 여파로 미국 정부는 월스트리트의 일시적 안정을 위해 '강한 달러' 연착륙을 포기했고, 이에 따른 부작용은 부메랑이 되어 월스트리트로 돌아갈 공산이 높기 때문이다.

제조업의 침체와 무역수지 악화, 이로 인한 실물부문의 수익성 악화, 이에 따른 자본 유출 가능성, 헤지펀드 파산에 따른 금융시장 붕괴 가능성은 테러 사태에도 감춰지지 않는 미국 경제의 취약점이다.

더욱이 월스트리트가 상징하는 금융시장은 도덕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다. 테러의 배후로 꼽히는오사마 빈 라덴이 테러 직전 이번 테러로 큰 피해를 보게 되는 업체들의 주식을 공(空)매도해 막대한 차익을 챙겼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공매도란 해당 주식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매도한 뒤 이 주식 가격이 떨어지면 실제로 주식을 싼값에 싸들여 차익을 챙기는 수법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독일·이탈리아 등의 증권당국은 이번 테러에 이용된 항공기가 소속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과 아메리칸 에어라인, 세계무역센터가 가입한 보험사인 독일계 뮈니히리와 세계 최대 생명보험사인 프랑스계 악사 등의 주식에 대해 이뤄진 대규모 공매도와 풋옵션 거래의 배후에 라덴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라덴은 무력공격뿐 아니라 월스트리트를 조롱하기도 한 것이다. 테러자금을 바로 월스트리트에서 조달한 셈이기 때문이다.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은 월스트리트를 주무르고 있는 유대계 자본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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