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끈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연대

1864년 9월 28일 영국 런던의 세인트 마틴홀에서 제1인터내셔날(국제노동자협회)이 창립되었다.

노동자들의 최초의 국제조직인 제1인터내셔날은 유럽과 미국의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교육단체, 사회주의자 등이 모여 조직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노동자 정당이 없었던 때문이다. 이들 속에는 프루동주의, 라살레주의, 바쿠닌주의, 영국식 노동조합주의 등 각양각색의 사상적 유대가 있었다.

노동운동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

제1인터내셔날은 총평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이었으며,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이 국제적인 노동자 계급의 조직을 통해 이미 상당한 조직화에 이른 유럽의 노동운동과 이제 막 성장하고 있던 미국의 노동운동이 마르크스주의와 접하게 된다.
제1인터내셔날 내에는 프루동주의, 라살레주의, 바쿠닌주의, 블랑키주의 등 여러 조류가 있었지만, 실천적 검증 속에 마르크스주의가 주도하게 된 것이다.
창립을 주도하고 총평의회 서기를 맡았던 마르크스는 임시규약과 발기문을 작성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분명히 했다. 그는 엥겔스와 더불어 제1인터내셔날의 활동을 통해 노동자에 의한 혁명정당을 각국에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제1인터내셔날은 1872년까지 모두 6차례의 대회를 열고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노동자 계급의 기본 전술을 정립하고. 8시간 노동, 보통 선거권 쟁취를 위한 투쟁, 민족 독립의 옹호, 전쟁 반대 등의 활동을 했다.
1870년 5월 기만적인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권력을 장악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그해 7월에 독일(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인터내셔날은 영어로 발표된 ‘독일-프랑스 전쟁에 관한 총평의회의 1차 담화문’에서 독일과 프랑스 두 왕조의 야심을 채우려는 전쟁의 성격과 그것이 노동자 계급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쟁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빠리꼬뮨 분석, 노동자 권력의 한 형태로 인식

어쨌든 전쟁의 결과로 왕당파는 물러나고 공화파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의 노동자 계급은 혁명을 일으켜 파리를 장악하였다. 이른바 파리꼬뮨이 성립된 것이다.
2차 담화문을 통해 공화주의적 자유를 이용해 프랑스 노동자 계급의 조직에 집중할 것을 요구했던 총평의회는 일단 사태가 진행되자 고립되어 있는 꼬뮨의 상황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알려나가고 꼬뮨과의 국제적 연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결국 파리꼬뮨은 백일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인터내셔날은 파리꼬뮨의 경험을 총괄하고 분석하였다. 꼬뮨을 노동자 계급 국가의 맹아로, 노동자 권력의 한 형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1871년 파리코뮨을 진압하고 난 후 꼬뮨 참가자들에 대한 탄압과 인터내셔날 회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제 인터내셔날은 무정부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 정당 건설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노동자 운동은 이미 분파 수준을 넘어섰으며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조직형태로 나아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의 반대, 탄압의 강화 등으로 1876년 인터내셔날은 공식적으로 해산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인터내셔날의 결과로 마르크스주의는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1876년 독일에서는 독일 통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만들어졌으며, 1875년 말에는 포르투갈에서 사회주의당 건설 시도가 있었고, 1879년에는 프랑스의 노동당과 벨기에의 사회주의 노동당이 출현했다.
인터내셔날은 해체되었지만 각국의 노동자당 건설로 계승된 셈이다.

칼 마르크스의 생애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혁명가였던 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에 독일의 트리어에서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유태인이었으며 변호사인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휴머니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사상을 교육하여 마르크스는 풍요로운 청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김나지움(중고등학교)을 졸업하며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앞으로 나는 인류의 행복과 해방을 향해 일생을 살 것”이라고 썼다.
이후 1835년 본 대학에 입학한 마르크스는 1년 후 베를린으로 가 법률, 역사, 철학을 공부한다. 청년헤겔학파를 주도하던 그는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강단에 서는 것은 물론이고 글을 발표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1842년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한다.
친구의 누나이자 누나의 친구인 평생의 반려자 예니와 결혼하고 파리로 이주한 그는 1844년 엥겔스와 역사적 재회를 하게 된다.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유물론적 역사관의 정립,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의 집필 등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공동 활동은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으로 파급되자 혁명에 참여했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따라 추방령이 내려졌다.
영국으로 망명한 그는 1864년 세상을 떠난 동지의 유산을 상속받을 때까지 그의 7남매 가운데 셋만이 병과 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았을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 시기 동안 집필해 온 <자본론> 1권은 제1인터내셔날이 창립되고 186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2·3권은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에 의해, 4권은 카우츠키에 의해 출판되었다.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4세로 생을 마감한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인터내셔날은 … 실로 그 설립자가 그밖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두고두고 자랑할만한 업적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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