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악독한 유신 파쇼를 끝장낸 바 / 한 떨기 백합꽃 / 김경숙 아가씨여 / 조국의 아픔 가운데 그대의 아픔 함께 있었으니 / 이른바 고도 성장의 그늘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 찼던가 / 이에 그대와 그대 동지들 뭉쳐 / 70년대의 그 모순과 죄과를 / 깡그리 물리치는 빈 주먹 싸움으로 나서매 / 거기 YH 노동조합 투쟁의 역사 찬연하여라...
-고은 <김경숙 열사 묘비 헌정시>
79년의 YH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리게 되는 역사의 시발점이 됐다. 이 투쟁을 계기로 그 동안 '긴급 조치'에 억눌려 숨죽이고 있던 민중의 불만이 부마항쟁 등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민중들의 분노는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마이카 시대'를 약속했던 박정희
70년대 말 유가가 폭등하면서 경제 공황에 대한 불안감이 급속히 번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허리띠를 조금만 더 조르면 곧 '마이카 시대'가 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공장 기숙사에 기름을 때지 못해, 노동자들이 꽁꽁 어는 곳에서 잠을 자야했죠" YH 노조의 사무장이었던 박태연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청계 피복, 동일 방직, 원풍 모방 등의 노동조합들이 유신에 맞서 목숨을 건 싸움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YH무역'의 장용호 회장은 미국에 판매 회사를 만들어, YH의 생산물을 비싸게 팔아 엄청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는 비리로 얼룩진 방만한 경영으로 'YH무역'이 은행 빛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79년 3월 30일 폐업 신고를 했다. YH 노동조합은 이 때부터 폐업에 반대하며 공장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YH 여성 노동자들 대부분은 일자리를 잃게 되면 자신들이 몸을 파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여성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 때부터 공장에 취직했다. 가족에 대한 부양의 책임까지 짊어졌던 그들이기에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참고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장 폐업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YH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YH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장기화되고, 문동환 목사나 고은 시인 등을 통해 그들의 투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정부가 직접 나서서 1차 폐업을 철회했다. 하지만 폐업 철회는 회사를 살리려는 게 아니라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방한 시기를 조용히 넘기고자 했던 의도였다. 8월 6일, 이번에는 정부가 'YH무역'의 폐업을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YH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 할 것은 장용호 한 사람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자들의 처지를 고려할 줄 모르는 군사독재 자체임을 깨달았다.
혈서로 맺은 결사항전의 약속
공장에서 농성 중이던 YH 노동자 2백여 명은 8월 9일 새벽을 틈타 기습적으로 신민당사를 점거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파업은 신문에 단 한 줄 실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YH 노동자들은 그 날 석간 신문에 신민당사 점거 소식이 1면 전면에 보도된 것을 보고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한 용기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들은 드디어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신민당사 4층을 차지한 YH 노동자들은 창문에 매달려 바깥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들의 요구를 목청껏 외쳤다. 그러다가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경숙이도 실신해서 병원으로 보냈는데 깨어나더니 막무가내로 우겨서 다시 돌아왔죠. 실신하고도 일어나서 다시 투쟁하겠다고 하니 모두들 대단하게 생각했죠" 박태연 씨는 아직도 김경숙 열사의 심지 굳은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김경숙 열사는 농성장에서 혈서를 쓰면서까지 꼭 이기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농성 사흘째이던 8월 11일, 김경숙 열사는 창틀에 앉아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창 바깥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새벽 2시 경, 잠잠하던 신민당사가 갑자기소란해지면서 1천여 명의 공권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4층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은 짧은 시간에 전부 연행됐고 그 와중에 김경숙 열사의 몸은 4층에서 떨어져 싸늘하게 식어갔다. YH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국적인 봉기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박정희 정권의 폭력이 김경숙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노동조합'을 통해 변화된 노동자의 삶
박태연 씨는 처음 노조를 알게 되던 그 순간에 마음 속으로 평생 운동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과 맺은 약속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그는 신민당사 점거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0·26이후 석방됐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그는 노동 운동가로 살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활동하다가 81년 전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되고, 87년 6월 항쟁을 앞두고 또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 후 91년, 신민당사 점거 투쟁 당시 YH 노조 위원장이었던 최순영 씨의 뒤를 이어 '부천 여성 노동자회'의 대표를 맡아 지금까지 10년째 그 곳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노동조합을 알게 되면서 '노동조합은 노동자에게 참 좋은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죠. 노동자들이 사장에게 이것저것 요구할 수도 있고, 파업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어요. 노동조합 활동은 정말 어려웠어요. 탄압도 많았고 오해도 많았지요. 한 명, 한 명을 노동조합에 가입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어요. 그들에게 노동조합이 왜 빨갱이가 아닌지를 이해시키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뭉친 사람들이었기에 강한 단결력을 가질 수 있었죠"
'YH 투쟁' 이후, 박태연 씨를 비롯한 노조 간부 3명은 구속이 됐고, 나머지 조합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경찰의 감시를 받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수소문을 해 다시 만나게 된 몇 사람들이 'YH 동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 뒤로 'YH 동우회'는 김경숙 열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다.
80년대로 이어지는 저항의 흐름
박태연 씨가 자신을 성장시킨 것이 노동조합이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70년대가 다음 시대로 한 단계 발전하는 과정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역할은 컸다. 전태일부터 시작되는 70년대 민주노조 운동가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싸움이 싼 임금에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기업주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노동자들의 저항은 언제나 군사정권의 가혹한 탄압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 70년대 노동조합 운동은 군사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게 된다.
YH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렇게 70년대 군사 정권 시절의 갇혀진 틀을 깨고 시작된 민주노조 운동이었다. YH의 경우처럼 사상과 신체에 대한 구속과 폭력이 일상적이던 시대에도 민주노조 건설과 군사독재 타도의 노력들이 계속됐고, 그 힘을 원천으로 80년대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과 민주노조 운동이 만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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