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본 리버의 일기
리버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대안문화미디어팀 R.exe, riverexe@hanmail.net)
등장인물
리버 : 집에서 독립해서 서울에서 개 키우며 사는 20대 후반의 여자. 100세까지 살아서 모든 친우들의 무덤가로 산행하며 사는 게 유일한 꿈인 건망증 심하고 극심한 방향치.
모닝 : 세상만사는 착하게만 살면 그게 행복의 시작이라고 믿고 살며 사람들 앞에 나와서 산이나 낙서 같은 것을 그리길 좋아하는 리버의 덤앤더머 친구.
덕 : 나이 많고 열정적인 여성주의자로 혼자서 이것저것 다하는 30대 초반의 여자. 파티에 가서도 명함을 돌리며 의기투합을 해내는 그녀는 국회의원이 되고도 남았을 여자.
병뚜껑 : 집에 만화책을 300여권이나 소유하고 있는 환경운동가.
2001년 9월 22일 토요일
건망증 1번(대화하는 도중 인명, 지명 까먹는 것 빼고 양호), 길 잃음 0 (사람들과 종일 함께 다녔으므로), 알콜 2차(막차는 탔으므로 양호)
오전 11시 25분 저번 총회 준비 MT때 사무국을 하기로 했던 세 여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나와 몇 개월 간 먼지와 쓰레기 속에서 허덕이던 사무실의 숨통을 열어주느라 여념이 없다. 운영위 회의는 참석자가 없는 관계로 주말임에도 시간이 남아도는 성질 급한 세 여자들은 전광석화처럼 회의를 끝내버리고 대청소를 시작한다. '모닝'은 벌써부터 당혹해하며 좁은 공간의 커다란 책상 앞에서 잡다한 폐지와 수저, 밥그릇 같은 것을 양손에 쥐고는 어찌할 줄 모르며 넋 나간 표정으로 서 있다. 당연하지. 비슷한 부류의 물건부터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던지 수납공간 한 군데부터 뭘 넣을지를 결정해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알지 못한 모닝은 이미 청소의 주체임을 상실하고 저 거대하게 쌓여있는 잡동사니에게 점령당해 버린 상태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이 첨엔 이해가 안 됐지만 아마도 내가 도시 한 복판에서 100m이내의 목표지점을 찾기 위해 내게 으르렁대며 덤비는 많은 골목과 간판들의 정글을 헤매는 논리와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역시 허점 투성이의 여자들은 대립보다는 교감을, 경쟁보다는 합의를 하는 동물인가 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 없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코미디 하우스의 와룡봉추에 나오는 고명환의 애걸할 때의 표정을 지으면서 "응. 명령만 내려 줘." 라고 한다. "우선 설거지부터해서 저쪽에다 쌓아 놔." 이것이 이후 신성한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쳐 사무국의 앞날을 기원하게될 액막이가 될 지를 누가 알았단 말인가...?
오후 2시 30분 "악! 어떡해......." 한 손에 수저와 칼을 든 채 한 손가락을 휴지뭉치로 감싼 모닝이 엉엉엉 울며 들어왔다. 원래 웬만한 일에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 난 "베었냐? 지혈만 하면 돼∼(별일이 아니길 바랬다. 아마 손가락이 잘렸어도 괜찮아 붙이면 감쪽같아∼라고 했을 참이었다. 청소에 한창 피치를 올리며 혼이 빼앗겨있는 나로서는...)" 근데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검붉은 피가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청소를 끝내고 영화를 보고 맥주를 한 잔 하려고 생각했던 나는 약국으로 끌고 가 허연 지혈가루로 떡칠을 하고는 붕대로 칭칭 감고 참고 앉아있으라고 했다.(참으로 사악하지 않을 수 없군) 그러면서 별 것 아니야, 이러고 조금만 있으면 딱정이 생기고 나을 거야 하며 모닝에게 체면을 걸었다. 살점이 떨어져 칭칭 감은 붕대가 피에 젖어버렸는데도 허연 가루만 쏟아 붓고 담배하나 물려준 채, 병원가면 바늘로 꿰매는데 그러면 나중에 흉터만 생겨서 안 좋다는 말을 남기고는...
오후 5시 신은경의 왕팬인 나는 오늘 꼭 '조폭 마누라'를 보리라고 결심을 하고는 렉스 메일링에 굳건한 다짐의 글을 남겼다. "오늘 꼭 조폭 마누라를 볼 참이다. 그런데 다들 다른 영화를 보자고 할 게 분명하다. 그래도 꼭 우겨서라도 그 영화를 봐야겠다.."는 내용의...
청소가 끝나고 제일 나이가 많지만 기억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덕'이 말했다. "야 우리 브리짓 존스의 일기 보자." 모닝도 좋아라하며 동의를 했다. '이런...' " 조폭마누라 재밌을 거 같은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덕은 "야 그거 재미없대. 평론가들이 혹평했던데? 그리고 다들 봤는데 재미 졸라 없대" '이런... 입소문이 이렇게 안 좋을 줄이야..' 영화평이나 사람들의 입소문에 영화관람여부를 결정하는 속물근성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평소에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고싶어하는 매우 가난한 에코페미니스트이자 만화광인 '병뚜껑'을 꼬드겨 나와 브리짓 존스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어이없게 시작된 것이다.
밤 12시경 (술이 취해서 맞춤법이 틀림) 집에 드러왔따.. 2차바께 안가서 그나마 혀가 덜 꼬였따. 브리짓 존쓰가 빤쓰빠람으로 남자를 부짭으러 밖으로 뛰처 나가는 장면이 교차되면서 에잇 조폭마누라 볼껄생가칸다... 근데 조폭마누라는 담쭈 개봉이다. 덕이 딴 사람들이 밨는데 졸라 재미업따는 말은 뻥이얻따...이런 이런
2001년 10월 1일 월요일
건망증 0 싸움 2번(명절이니까.. 명절인데두..에라 될대로 되라) 고기 먹음(고추전에 고기가 있는 줄 몰랐다. 암튼 그거 먹고 배탈났다)
10시 30분 추석명절이다. 늦잠을 자고 눈을 떠보니 제사는 끝나 있었다. 다들 밥을 먹고 음복을 하고는 남자들은 쇼파에 즐비해서 리모컨을 든 채 배를 두드리며 앉아 있고 여자들은 빽빽 우는 아이 보랴, 청소하랴, 설거지하랴 바쁘고 바쁘다.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일하기가 무지하게 싫어진다. 그래도 어쩌랴. 어제 음식장만도 못 도와준 나는 알아서 기었다. 브리짓은 좋겠다. 영국에 사는 독립한 그녀는 어릴 때 발가벗고 물놀이하던 얼굴도 기억 못하는 이혼남인 인권변호사를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옷을 차려입고 선을 봐야 한다는 부담감에 대한 고민만 할 뿐이지, 그녀에게 설거지를 해라, 조카를 봐라, 제사음식은 웬만큼 해야 시집 잘 간다는 등의 노동과 스트레스로 명절을 보낼 염려는 없지 않는가.
11시 10분 너른 마룻바닥을 비굴한 자세로 사람들의 발길속을 헤치며 걸레질을 하고 있다. 걸레질이 끝날 즈음 나와 세 살차이 밖에 나지 않았는데 애를 줄줄이 둘이나 낳아서 돈버느라 등골이 휜다는(술 마실 때 큰소리로 지금도 밖에 나가면 아가씨들한테 총각 행세한다고 자랑삼아 떠벌리는) 사촌 오빠가 "야 오빠 커피 한 잔 타주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더러운 상태였던 난 "오빠가 타먹어! 손 없어?" 하고 쏘아 붙였다.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들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 상태다. " 늦잠이나 자고 일도 안한 게 큰소리냐?" 한다. " 일 안한 건 오빠들이지. 걸레질 같은 건 남자들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몇 안 되는 여자들끼리만 알아서 일을 분배하라는 거야? 안 한 여자들은 죄지은 것처럼 욕이나 먹구. 나보다 어린놈들도 남자라고 앉아서 놀고 있구.. 내가 명절날 음식하고 일할 거였으면 시집가지. 이래서 결혼할 생각 달아난다니까. 저 언니들이 제사지내줄라고 오빠들이랑 결혼했어? 등등..."
오빠 왈 "저런 성질머리니까 시집도 못 가지. 누가 데리고 살겠어." 그래도 엄마가 옆에서 "남자들이 일을 너무 안 해.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제삿상 차려야 되니..투덜투덜" 그래서 대충 정리가 됐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오후 4시 35분 나의 애완견 매니가 산책을 하고 싶어한다. 산책을 하러 대로에 나가서 오줌을 싼다. 그걸 보던 대로 옆 집앞 자전거에 애를 싣고 있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다짜고짜 소리를 지른다. "남의 집 앞에다 개가 볼일을 보게 하면 어떻게 해요?" 강아지가 큰 거 싸는 줄 알고 저러나 싶어서 친절한 목소리로 똥은 잘 치울 거니까 걱정 말라고 하고 돌아섰다. 뒤통수에 들리는 말 "싸가지 없는 게 어디 앞에서..."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 당장 물 떠다가 깨끗이 치우고 가!!!" 그런 식의 반말의 고함 섞인 명령조는 고딩 때 학교선생한테 들은 이유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난 뜻하지 않게 동네사람과 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1차는 밖에서 끝내고 "아이 키우시는 분이 상식적으로 말씀하세요. 지나가는 낯선 사람한테 젊은 여자라고 그렇게 막 대하셔도 되요?"라는 내 말에 분이 안 가셨는지 집으로 따지러 찾아와 2차까지 했다. 결국은 내가 28세나 된다는 걸 알고는 그 나이에 개나 끌고 다니는 것이 한심하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로 마무리하며 중고등학생인 줄 알았다고 어쨌든 사과한다는 말로 마무리됐다.
분이 안 풀린 나에게 엄마 왈 "그래서 여자는 나이 먹으면 든든한 남편이 있어야 되. 여자 혼자 살면 얼마나 무시당하는 줄 아니?" 할 말을 잃었다.
오후 5시경 곰곰히 생각해본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강아지 운반시 욕먹었던 기억들을 상기하면서... 주로 할아버지나 아저씨들한테 "쯧쯧 한심하다 한심해"라는 말을 들었다. 그 한심하다는 말이 아빠의 해석에 의하면 애를 안고 다닐 나이에 강아지나 끌고 다니는 여자는 다 한심해 보인다는 거다. 하긴 애가 있으면 강아지를 끌고 다닐 시간이 없겠지. 그래서 아빠 앞에서 강아지를 귀여워 해 주면 "인간도 사랑할 줄 모르는 게 개새끼나 끼고 앉아서.."라는 식의 비난을 듣기 일쑤였다.
그래 좋다. 앞으로 개를 데리고 다니지 말던지, 피치 못할 상황이면 개를 아기 포대기에 싸 갖고 다니던지 해야 겠다. 그럼 애엄마라고 대우가 달라질까? 아마 미친 인줄 알겠지...
2001년 10월 12일 금요일 새벽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책으로 보고 리뷰를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재미는 있었지만, 그건 순전히 남의 솔직담백하고 유머러스한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와 독신여성의 사고방식의 교감에서 오는 약간의 흥미만 있을 뿐이지 비평을 할 만한 거리는 없었다. 게다가 한국의 독신여성과 영국의 중산층이자 직장여성인 브리짓과는 너무 큰 괴리감만 있을 뿐이었다. 브리짓은 집에서 담배를 못 피워서 독립을 해야 하는 나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브리짓이 열망하는 친절하고 친여성주의적인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영국의 가족제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 내 덤앤더머 친구클럽과 비슷한 그녀의 친구들 샤론(완강한 페미니스트이며 완전한 독신주의자), 주드(전형적인 출세가도를 달리는 커리어 우먼), 톰(남자이면서 동성애자라서 브리짓에게 깊은 이해를 보내는 친구)들에게 집중을 해보자.
그러자 난 더 브리짓과 교감할 수가 없었다. 완강한 페미니스트인 샤론대신에 내겐 종류별로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 있지만, 누구도 그녀처럼 "남자들은 심각하게 진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그들은 섹스를 위한 애완 동물로 여자들에게 사육되면서 집 밖의 개집에서나 살게 될 거야... 요리, 내조, 놈들이 늙고 뚱뚱해질 때 찾는 젊은 미녀들의 육체, 놈들은 여자들이 자기들에게 그런 걸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어..."등의 독설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못한다. 대신 남성문화, 가부장제적인 질서 등의 말로 조심스럽게 비켜가면서 남성을 적대시하지는 않는다는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심각한 사례와 철학적 근거들을 잘 양념해 놓는다해도 페미니스트들은 너무 감정적이다, 남성이 연대하고 이해할 만한 틈을 주지 않으니 침묵하고 앉아있으란 얘기일 뿐이다, 페쵸(페미니스트마쵸)들! 등의 비난을 듣고 술자리에서도 회피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그럼 주드... 하지만 불행히도 내 주변엔 전형적인 출세가도를 달리는 커리어 우먼이 없다. 변호사 사무실에 나가는 친구가 있긴 하지만 만나면 멋진 봉을 잡을 궁리로 좋은 화장품과 성형수술 고민, 브랜드 옷 등의 내가 이해 못할 이야기만 해댈 뿐이다. 그런 친구가 나같이 돈도 못 벌고 정치적인 발언이나 일삼는 친구와 친하게 지낼 리가 있겠는가.
톰.. 게이인 후배가 하나 있긴 하다. 하지만 별로 깊은 이해를 하는 것 같진 않다. "남자 동성애자는 본성이 발달되고 여성동성애자는 감성이 발달했다"고 선긋기를 하는 터에다 자신의 애인 자랑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브리짓 존스의 일기 리뷰 대신에 그 즐거운 형식만 모방해서 그냥 내 일상을 적기로 했다. 작가 헬렌 필딩처럼 유머감각이 없는 데다 브리짓 존스처럼 유쾌한 인간이 못 되서 지루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마감이 늦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반응이 좋으면 계속하던지.. 나말고 다른 사람이라도, 남자들이 쓴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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