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호/초점] 이 시대의 징후들

이 시대의 징후들 :
자본주의의 강력한 상징들을 목표로 한 저항이 전환된 국면에 처하게 되다

[네이션] 10월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뉴욕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충격적일 것인데,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인 토론토의 가로등에는 기업 밀집 지역을 10월 16일에 "폐쇄"시켜버리자는 빈곤반대 활동가들의 계획을 선전하는 포스터들이 잔뜩 붙여져 있다. 그중 9월 11일 전에 붙여진 몇몇 포스터는 심지어 지목된 직접행동구역의 경계선을 의미하는 빨간색으로 윤곽이 그려진 마천루 사진까지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애도 분위기 속에서 O16은 다른 시위와 행동들처럼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화된 경찰 폭력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폐쇄 행동 계획은 그대로 진행된다. 결국, 9.11 사건은 밤이 점점 추워지고 불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안전"하고 글쎄, "조금은 지루한" 것처럼 묘사되곤 하는 도시에서, 만약 즉시 더 많은 잠자리들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지난 겨울이나 그 전 겨울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
그런데 그 사건, 그것의 군사적인 어조와 목표 선정이 무시무시한 기억들과 연관성을 자극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많은 정치적 캠페인들은 서로 비슷하고 급작스러운 전환에 직면해 있다. 9.11 이후, 자본주의의 강력한 상징에 대한 공격 -심지어 평화적인- 에 기반한 전술은 완전히 전환된 기호학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공격은 아주 실제적이고 소름끼친 테러 행위였으나 또한 그것은 상징적인 전쟁행위였고, 즉각적으로 그렇게 이해되었다. 톰 브로코와 많은 사람들이 표현했듯이, 그 쌍둥이 빌딩은 그냥 일반 건물이 아니었고,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다.
어떤 사람은 "반세계화 운동"이라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반자본주의" 운동이라 부르는 것(나는 단순하게 "그 운동"이라 적당히 얼버무려 부르는 경향이 있다)에 삶을 완전히 바친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날의 상징주의에 관한 논쟁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이 운동의 지배적인 메타포를 구성하는 모든 반기업 기호들과 기표들(signifiers) -문화적 로고, 게릴라전 스타일, 브랜드명과 정치적 타깃의 선정- 에 관한 것이다.
반기업 행동주의에 대한 많은 정치적 반대론자들은 게릴라 전쟁을 장난처럼 하는 젊은 활동가들이 이제 실제 전쟁에 기가 죽을 것이라 주장하는 데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 공격을 이용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신문에는 이미 부음이 나타나고 있다: "반세계화는 어제의 일이다"라고 전형적인 헤드라인이 등장한다. [보스톤 글로브]에 따르면 "누더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게 진실인가? 우리의 행동주의는 그전에도 사망선고가 내려진 적이 있다. 사실 모든 대중 시위의 전후, 마치 제의식과 같은 규칙성으로 사망이 선고되었다. 우리의 전략은 명백히 신뢰을 잃었다고, 우리의 동맹은 분열되었다고, 우리의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그럼에도 시위는 시애틀의 5만에서 제노아의 약 30만까지 점점 커지고만 있다.
동시에, 9.11 이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척하는 것도 바보스러운 짓이다. 나는 최근 테러 공격이 있기 전에 작성하고 있던 슬라이드 쇼를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즉, 어떻게 반기업 이미지가 점점 기업 마케팅에 흡수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한 슬라이드는 시애틀의 WTO반대 시위에서 갭(Gap) 상점의 창문에 스프레이 페인팅하는 일단의 활동가 그룹을 보여준다. 다음 슬라이드는 조잡한 낙서들 -검정색으로 쓰여진 "독립"이란 단어와 같은- 로 채워진 갭 상점의 최신 유리창 디스플레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현란한 머리모양의 아나키스트들이 가상의 미국무역기구를 지키고 있는 악한 폭력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모습이 등장하는 쏘니 플레이스테이션의 "비상사태" 게임이다. 내가 처음 이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았을 때, 나는 기업의 포섭 속도에 놀랐다. 이제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업 대 반기업 이미지 전쟁에서 나온 스냅 사진들이 마치 재난 영화 세트 위의 많은 장난감 자동차와 액션 배우들처럼 9.11 공격에 의해 어떻게 그렇게 즉각적으로 무색하게 되고, 날아가 버렸는가이다.
변화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 때문에- 왜 이러한 운동이 첫 단계로 상징적인 투쟁을 행했는지를 상기시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 밀집 지역을 "폐쇄"시키자는 온타리오빈곤반대연합의 결정은 아주 특정하고 여전히 유효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기 위해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그룹이 대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외됐고, 체제 밖으로 내버려졌고, 강력한 신규 법안을 요구하는 구걸 또는 걸레질(squeegee, 미국 홈리스들이 신호등에 정차한 자동차 유리를 무조건 닦으면서 운전자로부터 돈을 요구하는 행위-옮긴이) 문제로 재규정된다고 느끼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맞서야만 하는 것이 단지 한 지역의 정치적 적 혹은 특정 무역 법률뿐만 아니라, 경제 체제 전체 -탈규제화되고, 통화침투설(trickle-down, 정부의 재정 지출은 복지 사업 등에 직접 나가기보다는 대기업을 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하는 이론-옮긴이) 자본주의의 깨진 약속- 라는 점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현대 활동가들에게 과제가 주어진다. 너무나도 광범위해서 끝도 없고, 모든 곳에 있으면서 아무 곳에도 없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폐쇄할 공장도 없고, 자신의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파괴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항의 공간은 어디인가? 통화 거래, 주식 가격, 지적 재산권, 비밀 무역협정 등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상은 가상적(virtual)일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움켜쥐고 나가야 하는가?
최소한 9.11 이전에, 손이 가는 어떤 것이라도 잡으면 된다라는 간단한 대답이 존재했다. 유명한 다국적기업의 브랜드 이미지, 주식 거래, 세계 지도자들의 회의, 단일한 무역협정, 혹은 토론토 그룹의 경우 이러한 의제에 힘을 실어주는 동력인 은행과 기업 본부들. 무정형을 실재적인 것으로, 그 광범위함을 사람 수준의 것으로 순간적으로나마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상징을 발견하고 그것이 변화를 위한 메타포가 되기를 희망했다.
예를 들어, 미국이 호르몬처리된 소고기를 금지하려는 프랑스를 상대로 무역전쟁을 시작했을 때, 조제 보베와 프랑스 농민연합은 로끄포르 치즈 수입 관세에 대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름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맥도날드를 "전략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나이키, 엑슨모빌, 몬산토, 쉘, 세브론, 피저, 소데호 매리옷, 켈로그, 스타벅스, 갭, 리오 틴토, 브리티시페트롤리움, 제너럴 일렉트릭, 월마트 홈디포, 시티그룹, 타코 벨- 이들은 자신들의 눈부신 브랜드가 우유에 포함된 소의 성장호르몬부터 니제르 델타지역의 인권까지, 플로리다의 멕시코계 토마토 농장 노동자에 대한 노동권침해부터 챠드(Chad)와 카메룬 송유관을 통한 전쟁자금 조달까지, 그리고 지구 온난화부터 노동착취공장까지, 모든 영역에서 문제제기하는 데에 이용되는 처지가 되었다.
9.11이래 수주동안, 우리는 미국인들이 특히 자기들 국경 밖의 세계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상기해야했다. 이것이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많은 활동가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국제관계에 대한 무지 상태를 유명한 브랜드와 그들의 운동을 연결시킴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왔다. 이런 방식은 편협주의에 대한, 때로는 문제적이지만 효과적인 무기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업 캠페인은 이어 국제무역 및 금융의 비밀스러운 세계, WTO, 세계은행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문제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반대로 쉽게 공격당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9.11 이후, 전세계 정치가들과 현학적인 지식인들은 즉각적으로 테러 공격이 반미와 반기업 폭력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타벅스 유리창, 이제는 세계무역센터.... 라는 식으로. [뉴 리퍼블릭] 편집자 피터 베이나트는 테러 공격이 "우리 중 한 명"에 의해 저질러졌는지를 묻는 반기업 인터넷 대화방의 모호한 게시물 하나를 포착했다. 베이나트는 "반세계화 운동은 부분적으로 미국에 대한 증오로 촉발된 운동이다"라고 결론 맺었다. 미국이 공격당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반세계화 운동이) 매우 부도덕한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성이 있는 세상이라면, 그러한 반격에 기름을 붓기보다는, 테러 공격을 계기로 왜 미국 정보기관들은 대량 학살을 음모하는 테러리스트 네트워크가 아니라 환경주의자들과 인디미디어센터(Indymedia Center)를 감시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 붓는지 제기될 것이다. 불행히도 9.11 이전에 벌어졌던 행동주의에 대한 탄압은 보다 높은 통제와 잠입 그리고 경찰 폭력으로 단지 강화될 것이라는 게 확실해 보인다. 반자본주의를 보증해줬던 익명성 -마스크, 반다나(bandanna, 마스크나 머리띠로 접어서 사용하는 천 조각-옮긴이)와 별명- 은 비밀 첩자를 찾아내려는 분위기 속에서 용의자로 의심받을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공격은 시민권 이상을 희생시킬 것이다. 나는 그들이 우리의 얼마 되지도 않는 정치적 승리조차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걱정스럽다. 아프리카 에이즈위기에 대처할 기금이 사라지고 있으며, 외채탕감을 확대하는데 필요한 재원들도 뒤따라 없어질 것이다. (그 동안) 이주민과 난민들의 권리 보호는 호주, 유럽 그리고 미국에서도 천천히 직접행동 부대의 주요한 초점이 되었다. 이것 역시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주의의 확산으로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오랜 동안 '홍보 부족'의 위기를 겪어온 자유무역은 쇼핑이나 야구처럼 아주 빠르게 애국적 의무로 재각인되고 있다. 미무역대표부 로버트 죌릭(그는 이러한 호전적인 분위기 속에서 미친 듯이 신속협상권한을 통과시키려 노력하고 있다)에 따르면, 무역은 "이 장기적인 투쟁의 심장부에서 그 가치를 증진시킨다". 마이클 루이스는 자유를 위한 투쟁과 자유무역 간 비슷한 합성을 시도한다. 그는 [뉴욕타임즈 매거진]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죽은 무역인들은 단순히 상징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 수호자이기 때문에 공격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다른 사람들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들은 자동적으로 어떤 가상의 신성한 권력의 이름 아래 개인적 자유를 부정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종교적 근본주의자과의 정신적인 대립물이 된다.
카타르에서 다음달에 열릴 WTO 협상으로 향한 전선은 무역은 자유와 같고, 무역반대는 파시즘과 같다라는 명제를 둘러싸고 형성됐다. 오사마 빈 라덴이 현금작물 농업에서 송유관 사업까지 걸쳐있는 지구적인 수출 네트워크를 소유한 백만장자라는 사실에 신경 쓰지 말아라. 그리고 이 싸움이 시위대에게 외국인 비자를 허용하지 않는 곳, 그러나 국가보조금을 받는 알자지라(Al-Jazeera) 네트워크에서 빈 라덴이 자신만의 텔레비전 쇼를 소유하고 있는 곳, 그야말로 '자유의 요새'인 카타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시민권, 우리의 별로 많지 않은 승리, 우리의 일상적인 전략들- 이 모든 것들이 의문에 처해 있다. 그러나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사회적 정의를 위한 운동의 과제는 경제적 불평등을 현재 우리를 휘어잡고 있는 안보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 즉 정의와 평등만이 폭력과 근본주의에 맞선 가장 지속가능한 전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시킬 아주 실질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위협이 정치적 개혁만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할 수는 없다. 사회적 정의가 필요하지만, 또한 이 공격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며, 미래의 공격에 대한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예방책이 필요하다. 테러리즘은 그야말로 국제적인 위협이나, 이것이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지는 않았다. 부시가 전세계를 미국의 전쟁에 불러 들였고, 유엔과 국제법정이 슬며시 비껴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반세계화"라는 꼬리표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진정한 다자주의를 열정적으로 옹호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부시의 "동맹"은 테러리즘에 대한 진정한 국제적 대응을 표상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대외정책 목표의 국제화에 다름 아니다. WTO 협상에서 교토까지, 이것이 미국 국제관계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즉, 당신에겐 우리 규칙에 기반해 행동할 자유가 있다. 아니면 완전히 배제당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연관성을 "반미국인"이 아닌 "진정한 국제주의자"이기 때문에 지을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고통의 정도를 따지는 일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몇몇 좌파 활동가들은 더 큰 참사에 대한 대응과 비교하면 9.11 테러에 대한 동정과 슬픔은 과다하고, 심지어 조금은 인종주의적이라고 말한다. 부정의와 고통을 증오하는 사람의 임무가 마치 한정된 재화인 양 동정심을 인색하게 나누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동정심을 인색하게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지구적으로 동정심을 확산시켜내는 시도가 전개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 비극이 이끌어낸 상호 원조와 지원의 거대한 물결은 이 운동이 열망하는 인본주의적 목표와 그렇게 차별적인 것인가? 이윤보다 인간을 우선시하라,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와 같은 거리의 구호들은 그 자체로도 명백하며, 테러 공격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진실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와 기업의) 이기적 행위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공항 안전과 같은 중요한 서비스를 민간 기업들에게 맡기는 사고방식에 대해, 그리고 왜 항공사에는 구제금융이 있고,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에게는 없는가라는 지점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모든 영역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거대한 감사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간단히 말해, "공공성(the common)"-공공 영역, 공공 선(善), 비 기업영역, 우리가 지켜왔던 것, 카타르 협상테이블에 올려질 것- 은 미국에서 재발견되고 있는 듯하다.
미국인들은 공동의 적을 죽이려고 준비할 때만 서로 애정을 보인다고 가정하는 대신,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단순히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은 이 시기를, 인간주의적 대응과 기업 이윤에 인간적 필요가 앞서야 하는 많은 다양한 문제의식 -에이즈 치료에서부터 무주택문제까지- 을 연결시키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시민의 영혼(Soul of a Citizen)]의 저자 폴 룁은 비록 전쟁 도발과 외국인혐오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조심스럽고, 민감하고 아주 친절한 것 같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닫혀져 있는 마음 속 공간으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활동가 전략에 있어서 극적인 변화, 즉 상징보다는 본질에 보다 근거한 전략을 요구할 것이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상회담 밖에서 진행된, 또는 개별 기업에 반대하는 다분히 상징적인 행동주의는 이미 운동 영역 내부에서도 문제제기 되어왔다. 상징 전쟁에서의 싸움에는 불만족스러운 지점이 많다. 맥도날드 유리창이 산산이 깨지고, 회의들은 점점 먼 곳에서 열린다.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여전히 상징, 겉모습, 재현에 불과하다.
9.11 전에도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새로운 분위기, 즉 토지개혁에서부터 노예 배상문제까지, 부정의의 징후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뿌리까지도 문제제기하는 사회·경제적 대안들을 내세우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다양성, 진보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포괄하면서도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목소리들 -치아파스, 포르토 알레그레, 케랄라 등에서 나오는- 을 위한 공간을 만듦으로써 우리 내부의 허무주의와 복고주의 세력에 도전하는 데 지금이야말로 좋은 때인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우리의 임무는 경제적 근본주의인 "맥월드(McWorld)"와 종교 근본주의인 "지하드" 사이에서 비가시적이던 모든 세계를 폭로함으로써, 두 가지 이상의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미지 전쟁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1년 전, 나는 "나이키 U"라는 별명을 가진 캠퍼스의 노동착취공장 반대 행동주의에 관한 글을 쓰려고 오레곤 대학을 방문했다. 거기서 나는 사라 제이콥슨이라는 학생 활동가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나이키는 자신의 행동 목표가 아니며, 오히려 광범위하고 때론 무정형한 경제 체계에 접근하는 일종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 운동은) 현관 마약(gateway drug, 보다 강력한 마약으로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마약 보조물-옮긴이)이지요"라고 즐겁게 말했다.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이 운동에서 우리 반대론자들의 브랜드, 그들의 사무실 건물, 전시용 정상회담 등의 상징들을 이용해왔다. 집회의 구호로, 운동의 쟁점으로, 대중 교육의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들은 절대 진정한 목표가 아니다. 지렛대이며, 손잡이일 뿐이다. 영국 작가 캐서린 에인저가 최근 지적했듯이, 우리에게 "역사에 조그마한 틈을 여는 것"을 가능케 해줬을 뿐이다.
그 상징들은 단지 문일 뿐이다. 이제는 그 문을 통과해야 할 때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No Logo : Taking Aim at the Brand Bullies]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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