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천주교, 누가 거짓말하나

그럼 김승훈 신부가 거짓말했나?
정부, 애초 지킬 맘 없이 기만했거나 약속 깼거나

청와대와 천주교 누가 거짓말 하나?
"단병호 위원장 석방을 약속한 적 없다, 다만 반성하면 선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을 뿐이다." 단 위원장 재구속에 대해 '정부가 천주교와 한 약속을 깼다'는 비난이 일자 청와대가 내놓은 반응이다. 청와대와 천주교 가운데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올해 상반기 대우자동차 정리해고와 노조원 폭력진압에 대한 항의투쟁 - 6.12 연대파업 - 민주노총 지도부 검거령 - 민주노총 명동성당 농성 등 민주노총과 정부가 정면대결로 치닫던 7월 김승훈 신부가 대화 중재에 나섰다. 김 신부는 지난 80년대 경찰이 박종철 학생을 고문해 죽이고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거짓말했을 때 이를 정면으로 폭로하고 군사정권에 맞섰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창립한 사람이고, 사제단의 공식결정에 따라 대화를 중재하게 된 것이다.

당국, 여러차례 말 바꾸며 '약속 안했다' 오리발
김대중 대통령과도 절친한 사이인 김 신부는 올해 7월18일 '3.1구국선언' 관계자들과 대통령이 만난 자리에서 "민주노총 문제를 풀라"고 건의했고, 그 다음 날 한광옥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현 민주당 대표)을 만났다. 하지만 이태복 청와대 노동수석 등이 "범법자와 대화할 수 없다. 민주노총이 먼저 정권퇴진을 철회해야 한다"며 무성의하게 나와 문제가 풀리지 않자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28일 대통령과 단 둘이 만난다.
대통령 지시로 같은 날 한 실장과 신광옥 민정수석(현 법무차관)을 만난 자리에서 오간 대화를 김신부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 자리에서 갈등을 풀기 위해 단 위원장에 대한 형집행정지 취소를 없던 일로 할 수 없냐고 했다. 그러자 신 전 수석이 단 위원장의 '범죄혐의'가 적힌 한 장 짜리 문서를 내보이며 '대통령 체면도 있고 하니 남은 형기(2개월4일)만 살면 다른 문제는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걸 푸는 데는 검찰이 중요하니 검찰총장을 만나 보라'고 덧붙였다."(한겨레 10월11일 김승훈 신부 인터뷰 기사)
김 신부는 그 뒤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을 잇따라 만났고 이 과정에서 단위원장 석방은 확인됐다고 판단하고 민주노총 요청대로 다른 구속노동자 석방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쪽은 두 번의 대통령 만남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만남을 부정하지 못하고 다만 확실한 약속은 안 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당연히 천주교 쪽은 청와대가 천주교회를 배신하고 오직 믿음과 진실로 살아온 카톨릭 원로 신부를 모욕했다며 강하게 분노하고 '약속을 짓밟은 김대중 정권 회개하라'며 행동에 나서고 있다.
물론 신부 말을 믿어야 하나, 정치인 말을 믿어야 하나 식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김 신부 말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고, 천주교회가 보증하는 약속이야말로 그 어떤 합의서보다 신뢰할 만 했다. 당시 민주노총은 상집회의, 지도위원회의, 중집회의를 거쳐 김 신부를 통한 정부 약속을 믿고 8월2일 자진출두하게 된 것이다.

담당검사가 '노사정위 복귀' 종용
한편 검찰은 지난 27일 수감 중이던 단병호 위원장을 불러 △ 불법행위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할 것 △ 폭력사태가 우려되는 집회를 열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 파업을 자제하고 불법파업을 지도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할 것 등을 요구했고, 단위원장이 부당한 요구라며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자 다음 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 같은 사실은 10월6일 서울 구치소에서 단위원장 담당 권두섭 변호사가 면회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검찰은 이 사실 자체를 확인해주지 않거나 영장청구 방침은 그 전에 정했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최종판단을 위해 법질서를 지킬지 노사정위에 복귀해 평화롭게 대화와 타협으로 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했을 뿐 강요한 적은 없다는 식으로 발표했다. 어떻든 반성문 제출 등 네 가지를 단 위원장에 요구한 사실 자체는 인정한 셈이다.

검찰의 이 같은 행위는 신념에 따라 노조활동을 해온 노동운동 지도자에게 정당한 노조 활동을 스스로 부정하라는 부당한 요구이자 명백한 인권침해가 아닐 수 없다. 또 단순히 폭력사태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포기하라는 것이고, 노조운동의 생명인 파업권 자체를 박탈하겠다는 것이다. 노사정위 참가여부는 노조의 자유의사이며, 불참 사실 자체가 불법행위도 아닌데 검찰이 법이 부여한 권한을 넘어서 정부정책을 강요한 것이다.

더구나 노사정위 불참은 의결기관인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일이니 위원장이 복귀하겠다 말겠다 약속할 수 없는 문제이다. 네 가지 모두 단 위원장이 거절할 게 당연한 데 왜 굳이 검찰은 이런 일을 벌였을까? 가능성이 없지만 만약 쓴다면 단위원장 석방 후 이 사실을 흘려 민주노총 내부를 시끄럽게 할 무기로 쓸 수 있고, 예상대로 거부한다면 '선처하려 했으나 전혀 반성하는 빛이 없어서' 구속했다는 구실로 쓰려는 의도로 밖에 달리 볼 길이 없다.

청와대가 단위원장을 감옥으로 유인하기 위해 애초부터 지킬 마음이 없던 약속을 했거나, 아니면 지금 와서 석방하려고 보니 예상되는 민주노총의 투쟁이 정권연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약속을 깨뜨렸거나 둘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쪽이건 천주교회를 배신하고 민주노총을 기만한 건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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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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