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벌어진 3차 WTO 각료회의에 맞선 전세계 민중들의 투쟁은 충격이었다. 전세계 운동진영들에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국제연대투쟁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신선한 충격이었던 한편,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업,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등 이윤이 창출되는 모든 영역을 무역에 연계지어 자유화, 개방화시킴으로써 WTO에 전지구적 권력을 부여하려했던 미국 등 중심부 국가들에게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혀 당혹스러워하는 충격과 이로 인해 WTO내-특히 중심부 국가들과 제3세계국가들간-에 반발과 이견이 격화되어 끝내는 3차 각료회의가 결렬되는 충격이라는 이중의 충격을 맛보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WTO는 과거의 상처와 비난을 뒤로한채 다시금 찬란한 지구적 권력을 형성하기 위해 4차 WTO 각료회의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반드시 뉴라운드를 출범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말이다. 그것도 초국적 자본과 중심부 국가들에게 더많은 이윤 추구를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4차 WTO 각료회의 선언문 초안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제3세계는 분노한다
그간 제3세계 국가들은 WTO 무역체제에 대해 몇가지를 요구해왔다. 주되게는 우르과이 라운드 협상결과의 이행문제-제3세계에 대한 특별차등대우, 보조금문제, 지적재산권협정(TRIPS) 등에 내재해 있는 불평등성 문제의 해결 등-를 우선적으로 처리할 것과, WTO가 세계적 빈부격차의 심화를 완화하고 제3세계 국가들의 개발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할 것, 그리고 농업과 서비스 협정 등 기존에 다루어져왔던 협정들을 구체화시키고 개정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투자나 경쟁정책, 정부조달 등 새로운 의제를 WTO에 포괄함으로써 뉴라운드를 출범하고자 하는 중심부 국가들의 입장에 반대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3세계 국가들의 기대와 요구는 이번 선언문 초안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이행문제 등에 관해서는 각료회의에서 우선권을 부여한다고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이지 않으며, 제3세계 국가들의 입장을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지는 못하다. 반면에 이번 선언문 초안은 철저히 초국적 자본과 중심부 국가들의 이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소위 새로운 의제라 불리우는 투자, 경쟁정책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투자와 관련해 선언문 초안에서는 해외직접투자를 위한 투명하고 예측가능한 환경을 확보할 수 있는 다자적인 규범형성을 위한 협상을 제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간 초국적 자본은 내국민대우를 보장받으면서 그 어떠한 규제나 조건도 없이 세계 곳곳에 직접 투자하기를 원해왔으며, 심지어는 투자를 규제하고 통제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기업이 국가를 제소할 수 있는 투자자 권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초국적 자본의 요구가 WTO라는 다자간 무역체제내에 포괄된다면 각 국가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각 국가의 경제는 초국적 자본에 장악되고, 자율적인 경제정책이 위협받을 수 있다. 비록 이번 선언문 초안에서 언급한 투자정책이 투자에 대한 전면적인 자유화와 배타적인 권리를 부여하고자 1998년 OECD에서 추진하다가 전세계 민중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MAI(다자간투자협정)를 당장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를 위한 초석을 다지는 작업을 진행중이라 볼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주목해야 한다.
한편 경쟁정책이란 표면적으로는 국가가 국내 산업 나아가서는 국내 독점을 보호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국내제도들을 축소하고 제거하여 자유로운 경쟁체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목표하는 바는 초국적 기업의 자국내 유입과 활동에 대한 국가의 규제 및 제한을 축소 및 철폐함으로써 초국적 기업에 의한 새로운 독점을 형성하도록 하는데에 있다. 물론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투자와 경쟁정책 의제에 대해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여 곧바로 WTO에 포괄하지는 못할 것이다. 제3세계 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기의 문제일뿐 새로운 의제들을 WTO 무역체제내에 포괄하려는 바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편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보장하면서 WTO 뉴라운드를 출범하고자 하는 조짐은 새로운 의제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존에 협상중이었던 농업과 서비스, 지적재산권 협정도 마찬가지이다. 농업협상의 경우 소위 농산물 수출국가들의 모임인 케언즈 그룹과 미국의 이해를 주로 대변하여 농산물에 대한 보조금을 감축 및 철폐하도록 하고, 전면적인 개방화를 추진함으로써 남한사회와 같은 소규모 영세농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구조의 해체를 가속화시키고 이에 따른 농촌사회의 빈곤화가 심화될 상황에 놓여있다. 현재 제3세계의 수많은 농업수입국 및 소규모 농업국가들은 자국내 농민생존과 농업기반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을 공산품과 같은 상품으로 취급하기를 반대하고 있으며, 농산물의 비교역적 특성과 지역특수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러한 제3세계의 요구가 WTO 무역체제에서 반영되기란 요원한 일이다.
서비스 협정의 경우에는 민중들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공적 영역인 교육, 보건의료, 상수도, 에너지 등을 사유화, 자유화시킴으로써 경제 위기의 상황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은 이중으로 고통받는 한편 초국적 서비스 기업은 거대한 부를 획득케 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한편 의약품 특허 등 지적재산권을 무역과 연계지음으로써 AIDS 문제로 10초에 한명씩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 민중들은 죽음에 방치되어 있으며, 식물 종자 등에까지도 특허가 형성되어 초국적 자본의 배타적 독점이윤을 보장하고 있다.
WTO 다자무역체제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번 4차 각료회의가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결과가 어떠할 지는 아직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미국과 EU, 일본 등 중심부 국가들은 최대한 이견을 줄이는 가운데 반드시 뉴라운드를 출범하고자 하지만, 농업협정, 이행문제, 지적재산권 협정 등에 있어서의 제3세계 국가들의 이견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핵심은 뉴라운드 출범의 유무에 있다기보다는 WTO 무역체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다. WTO 무역체제로 인한 세계적 빈부격차의 심화와 민중들 삶의 피폐화는 누누히 지적되어 온 바이며, WTO는 초국적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는 가운데 이러한 폐해를 더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라운드 출범을 통해 더더욱 강화된 권력을 WTO에 위임해서는 안되며, WTO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수정의 방향은 지적재산권, 공공서비스, 농업 등 민중들의 생존과 삶의 기본적인 권리들과 직결되어 있는 부분들과 투자, 경쟁정책, 정부 조달 등 각국의 자율적인 경제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들을 자유무역규범의 틀에서 제외하고, 세계적 빈부격차를 극복하고 제3세계 및 세계경제체제로부터 배제된 국가들의 개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본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며, 환경·보건·노동권·인권·민주주의 등 민중의 삶의 권리와 사회적 발전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다자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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