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서사건 폭로대회 3명 영장 신청방침
3천 군중 몰려 최루탄 쏴 저지
서울시경은 지난 19일 낮 [고문 및 성고문 용공조작 범국민 폭로대회] 개최 예정장소인 서울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현장에서 시위를 주동하고 극렬한 시위를 벌인 김연지 양(21·서울대 사회복지과 3년) 등 3명을 집시법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21일 밝혔다. -중략- 이날 낮 1시경 코스모스 백화점 쪽 명동 입구에서 로얄 호텔 사이에 모여든 군중의 수는 2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1시 20분 경 명동성당에서 옥외 스피커를 통한 방송이 시작되면서 시민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시위노래를 합창했다. 일부군중은 전경들과 난투극을 벌여 방패와 헬멧 등을 뺏기도 했다.
-1986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
이 날, 150cm 남직한 작은 키에 고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오를 선두 지휘한 사람은 스물 한 살의 앳된 여학생이었다. "성고문 자행하는 강간정권 물러가라" 구호가 확성기를 통해 퍼질 때마다 대오가 내지르는 함성은 몇 곱절 커지고 있었다. 조영래 변호사가 최후 변론에서 가리킨 '작고 가녀린, 그러나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처녀'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주인공인 권인숙 씨만은 아니었다. 성고문의 진상을 폭로하기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연지 씨는 또다른 권인숙이었다.
위장취업, 인천 5.3사태 배후조사, 그리고 성고문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위장취업한 여성 노동자가 부천경찰서 문귀동 형사에게 성고문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노동운동 지도부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노동운동가가 아니라, '여성'이 성고문을 당했다"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성고문 투쟁을 개량주의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 씨는 86년 노동자들의 집단 가두 투쟁인 인천 5.3 사태 주동자들에 대한 연관관계를 수사 받던 중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여자가 강간당한 이야기가 퍼지면 좋을 게 뭐냐'는 식의 이야기를 유포시켰다. 권씨의 언니가 보낸 편지에는 "네가 그것을 계속 문제로 삼고 나온다면 부모님이 아마 돌아가실 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적혀 있다. 권인숙 씨뿐만 아니라 부천서 성고문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한국사회의 순결 이데올로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맞서야 했다.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이 당한 문제니까 여성이 책임을 지라"는 식의 책임 회피가 이어졌다. 민민투, 자민투로 일컬어지는 사상투쟁이 학생운동권 내부에서 격화되면서 부천서 성고문 투쟁은 남의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여성운동에 대한 몰이해와 가부장적 성윤리에 치우쳐 정권의 폭력성을 폭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나는 또다른 권인숙이었다
여학생들까지 손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김연지 씨는 집회 전날 명동성당에 몰래 들어와 혼자 화장실에서 밤을 꼬박 새고 대오가 성당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밤을 다음날 집회에 대한 생각만으로 지새웠다. 그래서일까. 김연지 씨는 7월 19일 명동성당 집회를 끝으로 구속되고 만다.
"원래는 내가 나설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위원장으로서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상황이 하도 급박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대오가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지 못하자, 김연지 씨는 홀로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대오 속으로 스며들었다. 대오는 길 잃은 양이었다. 그러나 작은 여자가 대오 앞에 서자, 성난 사자가 되었다.
김연지 씨가 그처럼 대오를 진두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권씨가 자신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현장에 투신한 선배 언니가 당한 치욕을 알게 되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남의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운동하는 여자들에겐 그게 바로 제 일이었던 거죠."
학내에 사복 경찰이 상주하던 83년 서울대 여학생이 4.19 탑 근처에서 강간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속칭 진달래 사건이었다. 84년에는 서대문과 청량리 경찰서 등지에서 여대생 추행 사건이 일어났고, 85년에는 5.3 인천시위로 연행된 여학생이 성폭행 당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권양은 바로 그 자신일 수도 있었다. 그 역시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노동현장 이전을 고민했고, 감시가 심한 구로나 영등포 지역보다는 부천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김연지 씨 역시 또다른 권인숙이 될 수도 있었던 것.
활화산이 된 여학생운동, 여공투
여학생들의 분노가 한데 묶인 것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권인숙 씨의 감방 동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지 보름만이었다. 서울대, 고대, 이대, 서강대 등 9개 대학의 총여학생회를 중심으로 여학생들이 여학도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고대 학생회관 앞 민주광장에서 2백여 명이 모여 시작한 발대식에는 집회가 끝날 무렵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공투가 이처럼 신속히 조직되고 부천경찰서 성고문대책위원회와도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단과대까지 뿌리를 뻗치고 있던 여학생회의 힘이었다.
85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얼마간 여학생운동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 내 주류 운동이었다. 학생운동권 내에서 여학생회는 하나의 운동세력으로 인정받으며 총학생회처럼 단대, 학과까지 기층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학도호국단 체제의 여학생부가 아닌 총여학생회가 총학생회와 함께 85년 최초로 세워진 것이다. 단과대 여학생회는커녕, 총여학생회 하나 제대로 세우기 어려운 지금의 대학상황과는 달랐다.
그러나 여공투 위원장이었던 김연지 씨가 단 한 번의 가두시위 지휘로 구속되어 버리자, 여공투 지도부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출감 후, 대학에 돌아왔을 때는 여학생운동은 이미 사그라든 후였다. 그는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다시 부천이었다. 그러나 그도 오래 버티진 못 했다. 2년 만에 위장취업이 밝혀져 강제 퇴사해야 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고작 3년 6월의 형량 차이, 그러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화제를 몰고 다녔다. 1백66명이라는 사상 최다 변호인단이 구성되고, 김수환 추기경이 자필로 권양에게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월간 말지의 '보도지침' 폭로기사는 언론마저 국민의 눈을 속여왔음을 시인하게 했다. 그리고 짧지만 활화산처럼 타오른 여공투의 숨은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검찰의 판결은 미심쩍기만 했다. 피해자 권인숙 씨는 위장취업, 공문서 날조 혐의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성고문 가해자 문귀동 형사는 5년 실형에 처해졌다. 성고문을 당한 사람과 성고문을 가한 사람의 형량은 고작 3년 6개월의 차이였다.
김연지 씨는 당시 분위기에 대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86년 5.3 인천 사태 이후 침체되어 있던 국민들을 다시금 분노케 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권인숙 씨를 겨레의 처녀로 받들며, 성고문의 피해자로 세우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노동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권인숙 씨가 쓴 자필 수기를 펼쳐보였다.
[86년은 정말 우리 모두에게 아픈 해였다. 그러나 87년 7, 8월 투쟁이 타올랐다. 활발했던 시민들의 지원 투쟁, 지도성은 부족했으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열기로 영글어졌던 하나하나의 놀라운 투쟁들. 우리가 처음 공장에 들어갔던 2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 광경들을 우리는 현실의 경험담으로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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