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치아파스 IMC에 듣는 멕시코 반세계화 투쟁.

치아파스에서 온 활동가와의 인터뷰/ 이들의 얼굴이 웹상에 드러날 경우 멕시코에서 곤란한 처지가 될 수 있다.[COPYLEFT-참세상뉴스]

지난 11월12일 부터 서울 중앙대에서 3일간 열린 서울국제 노동미디어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치아파스 IMC의 루스와 칼멘 두사람과 약 세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치아파스 IMC는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세계화 반대 투쟁을 멕시코 국내외로 알려내는 역할을 하는 치아파스 지역의 인디미디어센터이다.

먼저 치아파스 지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달라.
치아파스 지역은 쉽게 말하면 밀림이다. 광대한 밀림이며 몇몇 지역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그들 몇몇 지역중 치아파스의 산안드레스(san andress)지역은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어 유럽인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그곳의 인터넷 카페등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기도 한다.

치아파스 IMC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가?
치아파스 IMC는 주로 사파티스타 투쟁에 대해 사회적으로 알려 내는 활동을 하는 데, 오디오, 비디오, 사진들, 텍스트 위주의 기사들을 쓰고 있다. 또한 각 멕시코 안에 있는 6대 언론사에 대한 모니터들을 하고 있다. 공영언론사들 뿐 아니라 지방 언론사들에 대한 사파티스타 보도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치아파스 IMC의 조직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치아파스 IMC는 자원활동가들로 뭉쳐있고, 집행위원회적인 성격의 구성원들이 10-15명정도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모여 무엇을 취재하고 알려낼 것인지 회의를 하고 그것을 통해 결정된 사항을 취재 하고 보도 한다.

치아파스 IMC의 재정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국외, 미국등의 인디미디어로부터 컴퓨터 지원을 받았고 치아파스 지역 내에서 이런 인디미어 활동들을(뜻을 같이 하는)사람들로부터 얼마의 지원을 받았고 대부분의 장비들은 개인장비들을 가지고 공적 장비로 사용 중이다.

치아파스가 생기게 된 계기는 ?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이들의 투쟁을 알려내는 미디어 활동가였던 티모라는 사람이 있다. 시애틀, 퀘백, 프라하 등지에서 얻은 투쟁 현장 미디어 지원의 활동을 했다. 각 현장에서 만났었던 활동가들과 치아파스 지역에도 인디미디어센터의 필요성에 대한 제기들을 받았다. 참고로 티모 또한 치아파스 지역에서 미디어활동가였다. 올해 1월 티모는 치아파스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인디미디어 창설을 위한 회의를 주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약 3주 동안의 준비기간을 통해서, 결국 2월 9일 인디미디어 센터를 열게 되었다. 당시 치아파스 지역의 여러 활동가들 및 미국에 있는 인디미디어 센터들로부터 컴퓨터 및 기기들의 지원도 받았다.

사파티스타와는 어떤 방식으로 같이 일을 하는가?
같은 조직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촬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거나 직접 그들의 활동을 찍어서 인터넷 상에 올린다. 그들의 투쟁을 지원해 주는 개념이다.

사파티스타를 어떻게 보는가?
개인적으로 사파티스타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내 민족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멕시코에는 원주민 및 외국인들 특히 유럽계 멕시코 사람들간에 상당히 넓으면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보통 원주민들의 경우에는 하등 국민으로 취급된다. 특히 영어로 소통하기가 어려운 원주민들의 경우 착취를 당하거나 강제로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도, 하급 직장이 최선의 대우이다. 지난 500여년동안 1세계 국민들로부터 착취를 당해왔다. 결국 사파티스타가 1994년 1월 이에 반대하여 투쟁의 전선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그동안 가리워져 있었던 멕시코 민중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멕시코 내의 사파티 스타 말고 다른 세계화 반대 투쟁은 없었는가?
세계화 반대 투쟁과 관련해 다른 그룹들도 많다. 그중에서 사파티스타가 첫번째 그룹이라 말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에 가장 선도적이었다. 특히 사파티스타의 경우 원주민이라는 것이다. 사파티스타의 사람들의 경우 신자유주의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농업과 관련이 컷고 그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정책들뿐이다. 또한 1994이전부터 나프타에 반대하고 이것의 위험성을 알려내야 한다는 논의들이 쭉 이루어 졌었다. 결국 나프타는 빈익빈, 부익부를 조장 할 수밖에 없는 협정이었고 많은 학생, 농민, 노동자들이 함께 연합그룹을 만들고 연대 투쟁이 이루어 졌다. 치아파스 이외에도 멕시코 전역에서 특히 원주민그룹들이 세계화를 반대하는 활발한 활동과 힘있는 영향력을 미치는 활동들을 하고 있다.

치아파스 IMC에 대한 정부의 위협은 없는가?
직접적인 위협이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치아파스 투쟁 현장에 있는 민중들에 대한 탄압은 여전하다. 특히 정부의 감시가 가장 큰 문제이다. 그 지역은 많은 군인들이 포진되어 있어서 매일 감시하고 있고 군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협이다. 그 지역은 사회복지와 관련해 낮은 수준으로 지원 되고 있다. 경찰의 위협이 가장 큰 문제이다. 한번은 IMC에 있던 사람이 기사를 작성했었던 곳에서 공격과 비슷한 것을 당했다. 여러 가지 조사가 있었고 여러 물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잘 모르겠고 아마 정부에 의한 스파이 였던 것 같다. 실질적으로 그때 치아파스에서 멕시코시티까지 갈 때 IMC의 활동에 대한 감시와 뒷조사를 하기 위해 정부의 탄압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사파티스타와 정부의 쟁점은 무엇이었는가?
평화행진 이전부터 치아파스 지역에 대한 정부와 사파티스타간에 논의가 굉장히 많았다. 정부의 경우에는 치아파스 지역에 원주민의 삶들을 위협할 수 있는 변화들을 요구했다. 공장등 개발의 요구였다. 당연히 치아파스지역 사람들은 반대했다. 삶을 바꾸는 개발이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협상이 진행되려 했지만 서로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산안들레스 평화협정이 97년경에 맺어 졌는데, 이것은 평화 행진이전부터 정부와 사파티스타간의 논쟁 중에서 최종 맺어진 협정이었다. 당시 치아파스 지역을 보호하기위한 사파티스타의 요구와 인권에 대한 최종 협정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협정에 대해 재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고 이에 대해 사파티스타는 계속 싸웠다.

평화 행진은 왜 하게 되었는가?
올해가 멕시코가 정권이 바뀐 첫해였다, 대통령이 바뀌면서 사파티스타 운동을 밖으로 알려내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진보적인 마인드를 갖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것이다. 특히 기간 산안드레스 평화협정이후 정부가 96년이후 평화협정을 지키지 않고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의 위협을 해서 대화가 없었다. 군대가 철수하면서 대화의 여지가 생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원주민들의 삶과 치아파스 원주민 보호법을 정부가 재대로 이행을 하느냐가 가장 큰 요구였다. 평화행진을 하면서 멕시코 뿐 만 아니라 전 세계 지역에 대한 국제적인 연대 까지 알려내기 위한 행진이었다.

평화 행진 밀착 취재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먼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처음 보도 정책을 크게 잡았던 것이다. 매일의 투쟁과 목소리들을 업데이트하고, 특히 참여했던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보도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12개의 지역을 돌면서 마지막에 멕시코에 들어오는 과정에 매일 상황을 커버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 이었지만 우리들의 가장 큰 임무가 알려내는 것이라 최대한 열심히 했다. 그때는 약 37대의 버스가 동참했고 그 외 일반 승용차와 각지 언론사들의 차들이 줄줄이 동행을 했고 이중 치아파스 IMC에서 나온 차량이 두 개가 있었다. 이 차량에 18명 정도의 치아파스 IMC가 파견되어 활동하고 두 대로 나누어서 움직였다. 매일 업데이트를 하면서 여행을 하는 게 힘들었던 것이 인터넷에 연결 할 수 있는 지역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매일 집회와 행진이 끝나면 사진과 동영상을 모아 정리하고 기사를 썼다. 보통 매일 밤8시부터 새벽 2-3시까지 하면서 하루에 2-3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굉장히 고된 활동이었다. 가져간 차량 두 대중 한 대는 인터넷카페를 찾기 위해 도시지역으로 들어가 찾고, 한 대는 행사장에서 상황 취재를 하면서 서로 연락두절이 되는 것이 힘들었다. 또한 인터넷 컨넥션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비를 가지고 다니면서 설비장치들을 모우고 푸는 작업들이 힘들었다.

특별한 기억이 있는데 otomi(오또미: 일종의 의식)라는 의식을 치루는 곳인데. 성스러운 사원이 있는 지역이다. 굉장히 작은 시골인데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었다. 차량 한대는 행진을 따라가고, 한대는 지역 곳곳을 찾아다녀 겨우 인터넷이라는 간판이 써져 있는 곳을 찾았는데 바로 하루 전에 개장을 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겨우겨우 기사를 올릴수 있었다. 그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은 에피소드였다.

이번 서울국제 노동 미디어 행사에 참가한 성과는 있었는가?
노동미디어와 특히 노동자대회 전야제, 노동자대회 등등을 통해 얻은 것들이 굉장히 많다.(이들은 노동자 대회 전야제가 있는 날 서울에 왔다: 편집자 주) 특히 현장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한국의 노동자들이 정부와 자본의 정책들에 맞서서 투쟁하고 저항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이런 목소리들을 해외와 치아파스 지역에 알려내야겠다고 생각했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투쟁하는 가 알게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세상과 바꾸려는 세상의 바램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남한 사회내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굉장히 용감하다라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치아파스 지역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단지 혼자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 공동의 연대를 통해서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행사였다..

향후 활동 계획은?
특히 치아파스 IMC의 활동들은 계속 지역의 반세계화 운동을 알려내는 활동들 뿐 아니라 그런 그룹 등을 모아내는 활동을 지원할 계획이다. 그런 그룹들의 활동들을 담아 낼 수 있는 .. 특히 인권, 환경과 관련된 운동의 요구를 알려 내고 미디어활동을 통해 이들을 알려내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예정이다. 특히 지금 멕시코에는 나프타와 같은 프에블라파나마 프로젝트(puebla-panama' project)가 있는데 이것은 멕시코시티를 통해 남쪽 끝 파나마까지 이어지는 과테말라, 니콰라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를 관통한다. 그쪽의 상업자본들이 들어가 그 지역에 굉장히 자본주의적인 호텔과 공장들을 짓게 된다. 이것들은 부자들을 위한 , 진출할 자본들을 위한 시설들인데 이것은 원주민들에 대한 배려 없이 환경을 파괴하고 나프타 보다 강력히 그들을 파괴하는 프로젝트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을 좀더 알려 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그쪽의 언론들은 전혀 알려 내지 않고 있다. 독립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 프로젝트가 워낙 거대해서 쉽게 막기는 어려울듯하나 이것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알려내기 위해 투쟁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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