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쇄신파가 용서받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

10월 25일 재보궐선거 이후 한나라당과 이회창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했다. 한겨레의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10월 재보궐선거 이후 정당지지도에서 한나라당(26.9%)이 최초로 민주당(22.2%)을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선 가상대결에서도 이회창(46.2%)-이인제(34.6%), 이회창(50.1%)-노무현(29.7%)이라는 결과가 보여주 듯 이회창이 여권의 예비주자인 이인제와 노무현 의원을 큰 폭의 격차로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여론조사 결과에 당황하고 초조해 했을 민주당의 모습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움과 초조함은 소위 ‘쇄신파’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되었다. 민주당 최고위원 전원이 사퇴하고 결국 DJ가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당 내에는 특별기구인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특대위)가 만들어졌다.

DJ의 당 총재직 사퇴에 대해서는 초당적이고 대승적인 국정운영의 의지의 표현이라느니, 내년에 지자체 선거와 대선에서 공정하고 중립적인 선거관리의 여건이 형성되었느니 하는 ‘기대성 평가’들이 돌고 있다. 또 특대위에 대해서도 당내 제도 쇄신의 계기가 될 것이라며 격려가 필요한 때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DJ, 아무 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꾸려 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한국의 ‘정치발전’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첫째, DJ의 당 총재직 사퇴는 국면전환을 위한 초강수에 불과하다. DJ는 민주당에 대한 자신의 장악력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 민주당 쇄신파의 공격은 권노갑과 박지원의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분명히 DJ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것은 DJ정권의 총체적 실정과 인사정책에 대한 누적된 불만의 폭발이었다. DJ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민주당의 총재직을 유지하면서 정국운영에서 피동적인 처지에 처해지는 것’과 ‘민주당 총재직을 버림으로써 국면전환을 꾀하는 것’ 두 갈래뿐이었다. DJ는 후자의 길을 선택했으며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기 위한 대승적 결단’이란 세간의 평가는 DJ의 의도가 먹혀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DJ의 총재직 사퇴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에 대한 애당심과 충성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당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협력하겠습니다.”

이인제는 권노갑이, 노무현은 ‘김심(金心)’이 필요하다
둘째, 이인제는 권노갑을 끌어안을 생각이며, 노무현은 ‘김심’이 필요하다. 정계은퇴요구에 버티기를 시도하던 권 전최고위원은 DJ의 총재직 사퇴 파문을 틈타 예정했던 기자회견을 취소해 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는 아직 건재하다. 그리고 여당 내 대선 예비주자로 앞서 달리는 이인제와 노무현은 권노갑과 DJ의 힘이 필요하다. 이인제 진영은 권노갑과의 연대 의사를 밝히며, 본격적으로 전당대회로의 체제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은 “지금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면 지지도가 올라갈 것이나 나는 손해를 보더라도 이 정권을 지킬 것…김대통령의 자산과 부채를 동시 인수할 것'이라며 `김심'을 의식하고 있다. 쇄신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권 대선예비주자 중 최선두에 선 이인제와 노무현이 권노갑과 DJ를 필요로 한다.

쇄신파의 협소한 미봉책으론 될 것이 없다
셋째, 쇄신파가 말하는 정치발전은 위기 탈출을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 쇄신파는 ‘1인 보스정치 청산’, ‘공천제도 개선 등 당내 민주주의 재고’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쇄신파들의 생각을 훨씬 앞질러 있다. 국민은 현재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이 독점하고 있는 정치 지형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위에 또아리 튼 지역주의를 청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정당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정치환경을 정치발전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정당 내 쇄신파에 대한 최소한의 용서 기준
이렇듯 한국 정치의 시급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당운영 제도를 개선하는 것에 국한된 쇄신파의 주장은 그 협소함과 비본질성으로 인해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고, 당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민주당 쇄신파가 진정으로 한국 정치의 발전을 원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달라야 한다. 돈으로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기탁금 제도를 폐지하는 것, 지역주의의 온상인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는 것, 기존 보수정당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1인1표제를 정당명부제에 기초한 1인2표제로 개정하는 것. 이것이 ‘보수정당 안에서 쇄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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