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열사 31주기 추모식이 11월12일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렸다.[사진-copyleft 사진모임'1987']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날따라 유독 날이 많이 추웠다. 모란공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대학 일 학년, 스무 살 <<전태일 평전>>을 밤새워 읽으며 가슴이 답답해지고 끝내 소리 죽여 울어야 했던 기억들. 모란공원에 처음 갔던 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던 기억.
무겁게 짓눌린 잿빛하늘아래 모란으로 향하는 시간동안 눈에 익숙한 버스 창 밖 풍경만큼 나를 놓아주지 않고 부여잡는 현실들이 필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서른이란 나이에 다시 모란공원으로 향하는 나의 가슴에는 무엇인가 꽉 막혀 숨쉬기조차 힘든,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먹먹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많은 재야인사들과 노동단체들 그리고 이 소선 어머니. 추모식 준비가 한창인 즈음 노란 국화 한 다발을 든 채 단결투쟁이라는 글씨가 박힌 빨간 조끼를 입은 다섯 명의 노동자들이 나타났다. 다가가 물어보니 구로 공단에 있는 작은 주물공장의 노조원들이라고 했다. 그 분들이 있어 추모식이 한결 더 의미 있겠다 싶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31주기 추모식은 치러졌고 어느 여성노동자는 추모사를 읽으며 끝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추모식을 지켜보다가 묘역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러 단체에서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많은 플랭카드들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에서 나의 눈길을 머물게 한 글귀는 어느 비정규직노조에서 내 건 '노동기본권 보장하라'였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몸을 던진 전태일 열사의 부르짖음. 그 절규 속에 스러져간 그 분의 외침을 30년이라는 세월,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땅의 노동자들은 똑같은 구호를 외치며 절규하고 있다니...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니... 라는 생각들 때문에 목이 메어 왔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속에 노동자의 삶은 더욱 척박해지고 특히 비정규직, 영세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어느 날 `해고'도 아닌 `계약해지'라는 통보를 받으면 그 날부터 실업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통계약직, 이랜드, 삼미특수강등 수많은 장기파업현장의 노동자들과 기본적인 인권마저 침해당하며 3D업종에 종사하는 외국인노동자들, 장애인 노동자들. 그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금도 부르짖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답게 살고싶다' 라는 것이다. 30년 전 전 태일 열사의 절규와 지금 이 시간, 밀레니엄의 뒤안길에 서 있는 이 땅의 노동자들의 절규가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그토록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고 더욱더 교묘한 방법으로 착취해 갈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현주소 인 것 같다.
얼마 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추경예산안 심의가 있던 날, 세 명의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이 방청석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한 명의 노동자는 '의원님들 보십시요..'라는 글이 적힌 유인물을 뿌리며 국회 본회의장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그 사건으로 국회의원들이 우리에게 보인 반응은 '어떻게 이토록 신성한 국회에 와서 저런 난리를 ...'이라는 비난과 국민들의 방청불허, 그리고 세 명의 노동자 구속으로 끝이 났다. 권력집단은 어느 누구도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도 집회현장과 파업현장으로 향한다. 다양한 외침들이 들리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목터져라 외치는 구호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동기본권 보장하라'이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현실이지만, 뼈 속을 파고드는 추위만큼이나 차가운 현실이지만 주저앉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나간다면 또 한세대 ,30년이 지난 그 날은 더 이상 똑같은 구호는 외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곳곳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려 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해 현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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