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 선거, 정치는 없다

학생회 선거, 정치는 없다

정치 토론장이 된 92년 학생회 선거

총선과 대선을 앞둔 92년 각 대학 총학생회 선거판은 정치 토론장에 맞먹었다. NL, PD 두 운동권 선본은 전국연합 건설을 앞두고 상설연합체 건설론과 민중연합 건설론으로 정치 논쟁을 벌였다. 학생회 선거판은 각 운동세력의 정치 논쟁터가 되기 안성맞춤이었다. 가을 선거가 끝나기 전, 전국연합이 민족민주주의 전선으로 결정되고도 PD는 학생회 선거를 발판으로 전국연합의 민중성을 주장했다. 학생회 선거는 운동권이 일반 학생을 보다 대중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다음해 4월이 되자, 총선 방침을 두고 논란이 오갔고 그 해 열린 학생회 선거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민중후보냐 범민주 단일후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선거판에서 정치적 논쟁이 공공연하게 대중을 대상으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학생대중의 힘이었다. 학생들은 총학생회 후보로 나온 사람들에게 총선과 대선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듣는 것을 '권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뽑을 총학생회장이 백기완을 지지할 것인가, 김대중을 지지할 것인가는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학생들은 각 대학 총학생회의 정치적 입장이 총선과 대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고,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혀짤린 벙어리가 돼버린 2002년 학생회 선거

92년과 마찬가지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대선을 앞둔 올해 학생회 선거는 달랐다. 비권 선본이 두 팀씩 나오는 대학이 늘어나면서 학생회 선거의 쟁점은 학내 복지 등에 맞춰지고 있다. 굳이 비권 선본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운동권 선본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드러내놓고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운동권의 정치적 논쟁을 들어주고 싶어하지 않는 대학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비권이 세력화한 몇몇 대학에서는 운동권임을 숨긴 채선거운동을 펼치는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다. 운동권의 정치적 구호나 대사회적 발언은 학생회 선거의 오래된 유물이 돼가고 있다.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둔 진보진영의 움직임은 이미 가시화 됐지만, 대학은 진보진영의 움직임에 맞춰 학생회 선거를 이끌어갈 만한 여력이 없어 보인다. 도서관 앞 집회 금지나 셔틀버스 확충이 주요 쟁점이 된 학생회 선거판은 비록 진보정당을 지지한다는 대자보가 학내 게시판에 붙는다 해도 사소한 관심으로 취급될 뿐이다. 총학생회장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이 대선에서 어떤 진보정당을 지지하는가는 학생들에게 관심거리가 아니다. 애써 정치적 발언들을 한 선본들도 내년 양대 선거에서 총학생회 깃발을 들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한다. 학생회 선거가 그 해 총학생회의 활동 방향을 검증받는 자리라는 점에서 혀짤린 벙어리처럼 웅웅 거리는 사회적 발언은 총학생회의 활동기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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