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 90년 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 농성 허동욱 씨

[사진-copyleft 대학생신문사]

90년 5월 4일(골리앗 점거 8일째, 총파업 투쟁 10일째)

[05시] 옥상경비를 위해 기상하다. 말이 기상이지 02시부터는 바닥으로부터 한기가 올라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눈만 감은 채 옆 동지의 품으로 파고들며 뒤척이다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 어제까지는 연이틀 비가 내려서 옷이며 담요가 눅눅해진데다 주로 생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사흘째 빗물을 받아먹고 있다. 질병에 걸리기 좋은 모든 악조건이 대원들의 몸과 마음을 조여오고 있다. 벌써 감기에 걸리고 설사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이런 악조건이 계속된다면 이탈자가 급증할 것이다. 게다가 가족들의 방송마저 집요해지면…오늘은 구름이 제법 끼어 있기는 하지만 비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제발 구름이 활짝 개고 따뜻한 햇볕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골리앗 상공에서 쓴 비밀일기』(노동문학사) 중에서


82m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에서 보낸 14일. 그 14일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헬기와 불도저 그리고 군함을 통해 달려드는 1만여 병력보다, "○○야, 내려오라"며 울부짖는 가족들의 목소리보다, 단식과 추위로 상할 대로 상한 신체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는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비밀일기'가 나오기까지

90년 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은 '전설'이 아니다. 살아있는 이들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몇몇은 결국 버티기 힘들어 골리앗을 내려가기도 했고, 때로는 주먹까지 오가며 투쟁 방향에 대해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허동욱 씨는 카메라에 그런 현대노동자들의 고민을 숨쉬듯 담아냈다. 그 스스로도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필름은 경찰과 회사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출판사로 전해졌다.

"중간중간 기자나 아는 사람들 편에 밖으로 건네주기도 했고, 저만 아는 비밀 장소에 숨겨뒀다가 나중에 따로 골리앗에 숨어들어 챙긴 것도 꽤 되죠." 14일간의 생생한 기록,『골리앗 상공에서 쓴 비밀일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초짜 노보 편집기자 허동욱 씨의 작품이었다. 골리앗 투쟁을 준비하면서 노보 편집국은 전부 야전사령부로 배치됐는데, 그는 부득불 골리앗에 올라가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아무도 올라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88년 엔진노조 투쟁을 접으면서 자신과 했던 약속 "맨 앞에서 싸워야 한다!" 때문이었다.


그들이 골리앗에 올라간 이유

총파업 3일째인 4월 27일, 70여 명의 노동자들이 82m 골리앗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깨에 짊어진 배낭은 전투에 쓰일 볼트와 너트, 물품으로 불룩했다. 의식주에 필요한 준비는 거의 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골리앗, 짐은 꼭 필요한 것만 챙겨야했다. 먹을 것보다는 싸울 것이 먼저였다. 뒤로 밀려나면 바다, 공장 밖으로 밀려나는 것은 패배. 이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생산의 중심 골리앗을 멈추고, 끝까지 공장을 지켜야했다. 투항한 비대위 의장과 지도부를 대신해 새롭게 이갑용 사무국장 중심으로 꾸려진 파업 지도부의 결단이었다. 야전사령부는 외곽에서 지원연대투쟁을, 골리앗은 최후의 투쟁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철근 기둥 사이 기계실 공간에서 웅크리고 잤어요. 어떻게든 비를 가릴 수는 있었지만, 철판이 주는 추위는 상상 이상이었죠. 철판은 낮에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밤이 되면 금새 식어버렸고, 챙겨간 음식은 날이 갈수록 줄어갔습니다. 씻는 물은 생각할 수도 없고, 나중에는 마실 물조차 빗물을 받아써야 했을 정도니까." 이들은 왜 그렇게 힘든 싸움을 해야 했을까.

87년 노조가 설립된 이후 계속된 현대중공업 노조의 시련. 88년 128일간의 총파업, 89년 1월 사측의 노동조합 각목테러 사건, 90년 2월 사복경찰 2백여 명의 노조사무실 압수수색, 연일 계속되는 파업 지도부에 대한 연행과 구속…'한번 싸우면 끝까지 싸운다'는 조선소 노동자들 특유의 억센 근성을 누르기 위한 현대 측의 노조탄압은 이미 악명 높은 것이었다. 작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이거나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연말 고가심사에서는 평가자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1년 만에 10원, 30원 오른 임금에 만족해야 했다. 억눌린 감정들은 노조 수석 부위원장의 연행, 구속으로 현장에서 폭발해 나왔다. 단협이냐, 해고자 복직이냐를 놓고 갈팡질팡하던 노조 지도부의 혼란은 파업투쟁의 열기 하나로 모아져갔다.

고립, 그리고 분열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골리앗 점거 다음날 새벽,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최루탄을 퍼부으며 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볼트와 너트, 화염병으로 헬기와 최루탄을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노동자들은 공장 밖으로 밀려났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제는 가두투쟁이었다. 현대자동차 노조를 비롯해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이들의 싸움에 동참했다. 골리앗에 있던 이들에게 밖에서의 싸움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투쟁이 줄어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골리앗은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다 우리만 고립되는 것이 아닐까. 점거 5일째인 5월 1일, 결사대 중 한 명이 골리앗을 내려가다 연행되는 일이 발생했다. 밑에서 애타게 부르는 가족들의 목소리에 하나 둘 내려가는 이들이 생겼다. 불안감이 골리앗을 흔들고 있었다.

"골리앗을 내려가야 한다는 주장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어요. 내려가서 열심히 싸우자는 것이었죠. 매일매일 토론이 계속됐고, 점거 10일째 결사대는 단식을 결정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음식을 전부 밖으로 던져버렸어요. 조금 더 버텼어야 했는데……. 우리 조는 식량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일찍부터 지급된 음식을 조금씩 떼어 모으고 있었거든요." 오래 싸우고 싶어서였다.

대형버스 2대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골리앗 크레인 꼭대기. 70여 명의 노동자들은 크레인의 양쪽 끝 두 조로 나뉘어 생활했다. 양쪽의 거리는 100m나 됐다. 허동욱 씨를 비롯한 엔진노조 출신의 20여 명은 정문 쪽으로 배치됐다. "정문 쪽 우리 조와 후문 쪽 A조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어요. 내려가야 한다, 아니다를 놓고 우리들 사이에 주먹싸움까지 벌어졌죠. 열흘이 넘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정서의 차이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때 좀 더 강하게 내려가지 말자고 고집 피웠어야 하는 건데." 허동욱 씨에게는 골리앗에서 내려오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 여전히 마음 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다. 점거를 끝내고 내려가 다시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88년 엔진 점거 투쟁 때 이미 경험한 그였기에, 골리앗을 내려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다.

언젠가는 태양이 뜬다

“우리는 골리앗에서 내려왔다. 14일 만에 자기 아이도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버지가 아니라며 울 정도의 처참한 몰골로 골리앗을 내려오던 날, 엔진부의 최성국 동지는 계단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죽어도 못 내려간다고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참고 참았던 우리도 울었다. 차라리 산소통을 끌어안고 죽자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것은 내려오기 직전에 보았던 미포만의 일출이었다. 바다가 마치 태양을 가슴에 품은 것처럼 발그스레 물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야 비로소 태양은 뜬다. 지금 노동해방의 저 드넓은 바다에 미명이 돋기 시작하는데 곧바로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절망할 수야 없지 않은가.”

5월 10일, 농성 14일째. 이들이 '현중노조가'를 부르며 골리앗에서 내려와 전원 연행되는 것으로 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내려오자마자 일부는 경찰서로, 일부는 병원으로 끌려갔다. 단식을 풀면서 환자가 속출했던 것이다. 허동욱 씨는 위험 환자로 분류된 데다 평조합원이라 구속은 면할 수 있었지만, 바로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88년 말부터 노골적으로 계속된 노태우 정권의 노동탄압 결정판이 울산 골리앗 투쟁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거겠죠. 준비가 미흡했고 지도부가 튼튼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골리앗 투쟁은 성공한 싸움이었습니다. 전국의 노동자들이 골리앗을 지켜보면서 전노협과 함께 싸웠고, '울산 골리앗 투쟁'의 상징적인 의미는 이후 연대투쟁의 불씨가 되었기 때문이죠."

92년 복직해 공장으로 돌아간 그는 얼마 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선거에서 노조 부위원장으로 당선됐다. 90년 골리앗 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함께였다. 그의 나이 마흔 셋. 골리앗 투쟁이 시작되기 얼마 전 태어났던 둘째 꼬맹이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됐다. 부모님, 아내 다음으로 노조를 만난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허동욱 씨. 그는 오늘도 동트는 미포만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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