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같은 시대 다른 길(1) - 남북의 대표적 과학자, 이태규와 리승기

이태규와 리승기. 해방 당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들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를 지내는 등 식민지시기 과학자로서 화려한 경력을 가졌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각각 문리대와 공대의 학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 행정의 중요한 위치에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 사람은 미국으로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북한을 선택하였다.

이태규는 1902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를 거쳐 1924년 교토제대(京都帝大) 화학과에 입학하였다. 1931년 '환원니켈 존재하의 일산화탄소의 분해'로 교토제대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화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일본에서 첫 조선인 이학박사가 나왔다는 소식은 당시 큰 뉴스거리였다. 1936년에는 교토제대 조교수가 되었다. 당시 조선인으로 일본에서 그것도 제국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이태규와 리승기 단 두 사람만이 일본 대학의 교수를 지낸 과학자였다. 193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방문교수로 가서 헨리 아이링 교수와 공동연구를 진행하였고, 세계적 석학 아인슈타인 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 때의 미국 체류 경험은 해방 후 그가 미국으로 가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미일관계가 악화되자 1941년 일본으로 돌아와 교수로 승진하였고, 일본에 양자역학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리승기는 1905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마츠야마(松山) 고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교토제대 공업화학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모교의 일본화학섬유연구소의 연구강사가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1930년대 후반 들어 일본의 대외관계가 악화되고 미국의 나일론을 필두로 합성섬유공업이 시작되자 일본의 대표적인 수출산업이었던 견직물업은 큰 위기를 맞았다. 따라서 일본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폴리비닐알콜(PVA)을 섬유 원료로 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였다. 리승기도 이 연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39년 훗날 '비날론'으로 불리게 되는 '합성1호'를 발명하였다. 이 업적으로 그에게 공학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두 사람은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태규는 1945년 12월 귀국하여 경성대학(경성제대의 후신이자 서울대학교의 전신) 이공학부장, 서울대학교 초대 문리대학장을 역임하였고, 리승기도 1946년에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가 되었고 1949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2대 학장을 지냈다. 그렇지만 남한에서는 이들 모두 유명세를 발판으로 학교 행정의 책임자 자리에 오르기는 했어도 과학 연구의 구심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이들의 행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국대안 파동'이었다. 1946년 문교부에서는 8월 27일 법령 제102호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에서는 기존의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대학,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10개교를 '국립서울대학교'로 흡수하고, 서울대학교 안에 농림과대학, 상과대학, 치과대학, 사범대학, 공과대학, 예술대학, 법과대학, 문리과대학, 의과대학, 대학원 등의 대학, 대학원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 이사회는 문교부장과 총장 및 각 대학 1명의 이사 등 총 12명의 이사로 구성하되 군정기간 중에는 잠정적으로 한국인 미국인 문교부 부차장과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등 총 6인으로 구성되는 임시이사회를 두도록 했다. 그리고 총장도 군정기간 중에는 군정장관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방침이 발표되자 '국대안'에 대한 반대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국대안'에 대한 반대가 광범위하게 전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대다수 교수나 학생들, 그리고 교육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바탕 위에서 '국대안'이 나온 것이 아니라 오천석을 중심으로 한 몇몇 교육관료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안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안에 대해 미군정 관료들만이 찬성의 입장을 보였을 뿐, 교육계 내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다.

둘째, 국립대학을 창설하는 데 있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창설된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한다는 점에 대해 일부에서 비난이 표출되었다. 이 점은 한국 역사에 대해 무지한 미군정이 국립대학을 설립한다는 사실과도 관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곧 수립될 한국정부로 모든 문제가 이양되겠지만, 아직 우리 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국립대학을 설치한다는 것 또한 모순되는 일이었다. 국립대학의 초대 총장에 미국인이 취임하는 사태도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셋째, 각 대학들이 통합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대학의 통합이었다. 1946년 '국대안'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표출될 때, 구경성대학 의학부에서는 의학전문대학의 학생들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한 움직임의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반대가 있었던 이유는 '국대안'의 성립 배경에 정치적인 목적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문교관계의 핵심자들이 '정치적으로 반대파의 입장에 서 있던 교수들을 축출'하기 위한 계획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경성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을 좌익세력이 장악하자, 기존의 대학체제 개편을 통해 대학교수와 학생들 중 좌익세력들을 제거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국대안 파동'은 1947년 후반부터 일단 수습되기는 하였으나, 사회불안의 심화와 더불어 결과적으로 동료 학자들간의 반목과 갈등을 부추겨 대학을 황폐화시켰다. 많은 교수들이 학교를 그만두거나 파면을 당하고 그렇지 않을지라도 여러 이유로 감시나 불이익을 받는 일이 일어나, 남한체제에 불평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또한 이공계열 교수들이 대체로 공감하고 있던 과학기술 고등교육기관의 발전 방향과는 다른 국대안, 즉 경성대학은 물론 경성공전, 경성광전을 각각 독립된 대학으로 발전시키는 '단과대학 독립안'이 아니라 통합된 하나의 대학을 만들려 하는 데에 많은 불만이 있었다.

두 사람도 다른 여러 과학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직후 남한의 사회 혼란과 무질서, 그로 인한 과학의 방치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특히 국대안 파동 때문에 깊은 좌절을 느꼈으며 리승기는 한때 학교를 떠나 낙향하기도 하였다.

이태규는 1948년 9월 미국 유타대학으로 떠났다. 리승기는 2대 공대학장이 되었으나 사표를 내고 떠나 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북측의 권유로 월북하였다. 이 두 사람을 떠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구 의욕을 펼칠 수 없었던 당시 남한 사회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태규는 1948년 9월에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유타대학 아이링 교수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왜 남한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첫째, 위에서 말한 대로 자신의 연구 활동을 남한에서 제대로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교수들의 국대안 반대 운동이 가장 심하였던 문리대의 학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갈등을 겪었던 듯하다. 둘째, 1938년부터 미국에서 2년여 동안 체류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만난 아이링 교수와의 친분으로 그의 초청을 받고 미국에 가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카톨릭 신자였다는 점도 남한을 떠나 갈 수 있었던 북한과 미국 중에 미국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 정착한 이태규는 유타대학에서 아이링 교수와 함께 분자점성학의 기초가 되는 '비뉴턴 유동이론'을 공동으로 연구하였는데, 이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리-아이링 이론'으로 불리고 있다. 이태규는 1969년 분자점성학으로 노벨화학상 후보가 되었으나 수상하지는 못하였고, 이후 노벨상 추천위원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 있었던 25년 동안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여 세계적인 학자 대열에 올랐고, 많은 한국 학생들에게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1973년 한국과학원 석좌교수로 귀국했다. 박정희가 사람을 보내 귀국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남한에서 많은 명예를 누리며 여생을 보냈다.

리승기의 월북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당시 북한의 실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해방과 더불어 과학기술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쏟았다. 이데올로기 다음으로 혹은 그에 못지 않게 노력을 집중한 것이 과학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북한이 왜 이렇게 일찍부터 과학기술을 중시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북한이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던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과학기술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과학기술은 일제강점기 동안 결과적으로 가장 억압한 분야였고, 그를 발전시키는 일은 식민지 폐해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는 중요한 조치로 여겨졌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사회주의 체제건설에 요구되는 '과학적 사상'의 증진과 물질 생산력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과학기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사상적 구속을 덜 받으며 활동할 수 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정치사상이 매우 강조되었지만 당시 북한의 현실이 과학기술계에 대해서만은 그 적용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북한은 과학기술자를 실제 모습보다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심지어 적극 옹호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는 '오랜 인텔리'들이 대항세력이 될 가능성은 없었던 대신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막중한 중요성에 비해 그 종사자가 너무도 적었으므로 한 사람이라도 끌어안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에는 겨우 수십 명의 과학기술자들밖에 없어서 이들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일제시기에 활동경력을 지닌 이들 '오랜 인텔리'에게 자신의 우수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상당 기간 동안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다. 급기야 자체의 부족인력을 단기간에 메울 방법으로 당시 남한에 있던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북한은 남한의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을 대거 끌어들여 부족한 인력을 충원했다. 어느 분야보다도 과학기술계 인사들이 월북을 많이 했는데, 이는 북한의 유인과 남한의 배척이 상호작용을 한 결과였다. 남한에서는 '국대안 파동'으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대학을 떠났고 북한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작전담반까지 만들어 그들의 월북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당시 이들 과학기술자의 상당수는 자신의 행동을 이념과 관계없는 단순한 '지역이동'으로 생각했기에 결과적으로 그 인원이 많아졌다. 결국 월북 과학기술자는 북한에서 과학기술인력의 핵심기반을 형성하며 이후 과학연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남한에 있던 리승기는 북한에서 유치 대상으로 삼은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몇 안 되는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데다가 교토제대에서 상당기간 연구활동을 했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해방 전에는 일제에 대한 비방과 비협조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어 투옥된 적도 있어 북한에서 영입할 만한 명분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치나 이념문제에는 거리를 둔 채 과학에만 골몰할 뿐이었다. 이런 까닭에 북한에서의 집요한 월북 제의와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남한에 남아 좌익에서 그렇게도 문제시하던 국립서울대학교의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논의하는 주요 회의에 참여하는 등 오히려 남한 정부에 상당 기간 협조적이었다. 분명 그는 북한의 기대와는 달리 적대적인 체제에서 주요 직책을 맡으며 복무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그에게 북한 당국은 어려 차례 끈질기게 월북을 권유했다. 전쟁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그에게 김일성의 위임을 받은 리종옥이 1950년 7월말 방문하여 월북을 권유하였고, 결국 리승기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북행대열에 합류하였다. 이 때 북한 당국, 즉 김일성이 그에게 제시한 약속은 비날론연구소 설립의 보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부의 평가와는 달리 좌익적, 이념적 성향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정당, 이념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일에만 골몰하는 당시의 전형적인 과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월북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먼저 리승기가 탈이념적, 비정치적이기는 하나 남한 당국과 사회에 대해 가졌던 불만이 한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그가 교토제대 때부터 가졌던 왕성한 연구욕이 월북을 결심하게 한 훨씬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그의 가장 큰 꿈은 일찍이 자신이 개발한 신섬유물질을 나일론처럼 성공적으로 공업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승기의 비날론은 당시 남한에서 자연섬유가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용품으로서의 존재 가치여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결국 리승기는 자신의 비날론 연구의 꿈이 남한에서는 실현될 가망이 없다고 여겼고, 그러던 중 북한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보장해주겠다는 제의를 해와서 북행을 감행한 것이다.

1950년 7월 31일 월북한 그는 북한 정권의 강력한 후원 하에 비날론 공업화 연구에 착수하여, 1959년 논문 [비날론 섬유의 연구와 그 공업화]로 그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비날론은 그 개발자가 한국인이라는 점, 그 기초 원료가 북한에 풍부한 석회석이라는 점, 그리고 전통적 옷감인 면과 성질이 비슷하다는 점으로 인해 북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일명 '주체 섬유'로 불리기도 하였다.

비날론의 공업화는 과학기술의 중요성, 과학기술자의 위상을 사회적으로 크게 높였을 뿐만 아니라 '주체'라는 용어의 사용을 정당화해주는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물론 '주체'라는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그보다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유포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 무렵 이후에야 우선은 과학기술계를 중심으로 '과학에서 주체를 확립하자'라는 주장이 본격화되며 문학, 언어, 경제 등 다른 영역으로 그 사용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주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학에서 그 진위가 밝혀졌으므로 가장 과학적이고 나아가서는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리승기는 이 업적으로 1959년 제1회 인민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에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과 같은 레닌상을 수상하는 등 북한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다.

이태규는 1992년 10월 사망하여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고, 리승기는 1996년 2월 사망하여 국장 후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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