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판 전국노동자대회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3일 유럽연합(EU) 정상회담이 열리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모인 8만 시위대의 주력은 프랑스, 독일을 주축으로 한 노동자부대였다.
형형 색깔의 깃발과 모자, 조끼로 단장한 노동자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장 조합원들이 시위대의 다수를 이룬 것도 이채로왔다.
이들의 요구는 일자리 지키기와 사회보장 제도 수호였다. 전세계적인 경제침체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서유럽 노동자들이 쌓아 올린 노동시간 단축, 안정된 임금과 좋은 노동조건, 퇴직자를 위한 연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최근 부채 압력으로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통지서를 우편으로 받은 벨기에항공, 사베이나항공 노동자들도 거리에 나섰다. 이날 시위대는 브뤼셀 시가지에서 정상회담이 열리는 시외곽 라켄 방향으로 별 충돌 없이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행진했고, 행진을 마치고는 전철로 시가지로 돌아왔다.
전철은 시위대로 가득 찼고 좁은 전철 안에서 일부 네덜란드 좌파 청년들은 프랑스 노조원들과 함께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단결투쟁"을 외치기도 했다.
이날 저녁 한 대학의 강당에는 프랑스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이태리 재건공산당 등 서유럽 급진좌파정당들이 함께 모여 연대집회를 가졌다.
작년 아셈(ASEM) 정상회담 당시 민주노동당 중앙당을 방문한 바 있는 LCR의 로젤린 바케타는 "9.11 테러사건 이후 미국의 보복공격으로 세 부류의 희생자가 있다"면서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민중들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대자본은 의료, 대중교통, 전력 산업 같은 공공산업을 새롭게 뜨는 사업분야로 보고 사기업화(민영화)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공공 서비스의 사기업화는 시민의 안전과 환경오염을 방치하고, 서민들의 복지혜택을 줄이므로, 이를 막기 위한 투쟁에 앞장서자고 주장했다.
SWP 대표로 나선 린지 저먼은 "부시와 블레어가 테러와 여성억압에 대한 전쟁이라고 주장하지만, 아프간에 있던 이슬람권 방송인 알 자지라의 위성 안테나를 폭격하고, 이라크의 무고한 시민들을 지금도 폭격하고 있는 영국과 미국도 테러국가다. 부시가 자국에서도 성차별을 없애지 못하면서 아프간 여성을 해방시키겠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의 위선을 폭로했다.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의 로코 파판드리아는 7월 제노바 시위 이후 이탈리아 대중운동이 성장하고 있으며 미국의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도시마다 수천, 수만명이 모이고 있다고 이탈리아 상황을 전했다.
정상회담 개막일인 14일에는 1만2천여명의 시위대가 "사회복지의 후퇴를 가져오는 유럽연합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의 건설"을 외치고, 국제테러조직의 섬멸을 내세우면서 민간인에게도 무차별적인 폭격을 퍼붓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사전에 경찰이 허가해준 시위행로를 따라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날 시위대의 대부분은 국제투기꾼들의 외환투기를 막기 위해 외환거래에도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걸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대중적인 반세계화운동을 이끌고 있는 아탁(ATTAC)과 반전운동단체들이 차지했다.
시위대는 "부시, 블레어!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폭격해 죽였나?", "기아에 허덕이는 제3세계에 폭탄을 퍼부을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주어라", "폭탄을 떨어뜨리지 말고, 못 갚을 지경인 빚을 탕감해라"는 반전구호를 외쳤다.
네덜란드에서 온 한 대학생은 "유럽연합이 공공서비스 분야의 사기업화 정책을 무모하게 추진하고 있다"며 "영국철도에서 보듯이 공공서비스의 안전이 무시되고 의료, 교육 분야에서 저소득층이 양질의 서비스를 못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사건 이후 유럽사회에서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공안정국이 형성되고 있으나 이날 항의시위는 비판세력의 힘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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